128화 제1장 리턴(3)
당직실로 복귀하는 길, 황은우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다.
곁에서 걷는 이믿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하늘이 내 소원을 들어준 건가?’
황은우는 평소에 믿지 않던 하늘마저 찾았다.
솔직히 내년에도 막내 처지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 낙담하고 있었다.
응급상황이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늘 긴장하고.
바쁜 수술 스케줄에 치이고.
그렇다고 봉급이 높지도 않은 곳이 흉부외과였다.
그러므로 흉부외과는 레지던트들의 무덤이었다.
쉽게 말하면 레지던트 지원자가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오늘 인턴으로 들어온 이믿음의 한마디는 가뭄의 단비였다.
[저 흉부외과 전공할 생각입니다.]
이믿음이 흉부외과 전공 예정을 밝히면서 황은우의 인생에도 숨통이 틔었다.
레지던트 3년 차 막내.
군대로 치면 상병 막내를 벗어나게 됐으니까.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이믿음이 C턴이 아니라 A턴이라는 점이었다.
솔직히 C턴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일을 못해서 일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배,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응? 왜?”
“아까부터 콧노래를 부르고 계셔서요.”
이믿음의 말에 황은우는 호탕하게 웃었다.
이믿음이 합류한다는 소식에 무의식마저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모양이다.
“좋은 일이 있고말고. 심지어 바로 옆에서 걸어 다니고 있지.”
“…….”
“근데 너 흉부외과 전공하는 척하고 마지막에 슬쩍 과 바꾸는 거 아니지?”
황은우는 문득 의심과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작년 말에 인턴 했던 녀석이 이믿음과 비슷한 작전을 썼다.
흉부외과 전공을 할 것처럼 연기를 해서 듬뿍 사람을 받다가 결국 다른 과를 선택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치가 떨렸다.
“걱정 마세요. 제 지인들은 제가 흉부외과 바라기라는 거 다 알아요. 의심이 되면 물어보셔도 좋아요.”
“…….”
“그리고 흉부외과 오기 전까지 소아 흉부외과에서 8개월이나 근무했는데요.”
“그 괴짜가 너였어?”
황은우는 과거 소문의 당사자가 이믿음이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몇 개월 동안 고정 근무 중인 인턴이 있다.
-일을 엄청 잘하고 우수 인턴 표창까지 받았다.
-레지던트부터 교수들한테도 사랑을 받더라.
한 달 전 그런 이야기를 넌지시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설마 이믿음일 줄이야.
“근데 믿음아, 어차피 흉부외과 전공할 거면 소아 흉부외과 말고 우리 과에 먼저 들어오지 그랬냐. 그럼 일찍 친해지고 좋았을 거 아니야?”
“그게… 소아 흉부외과에 오래 있어야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혹시 홍선아한테 반했냐?”
“아니요, 반했으면 소아 흉부외과에 계속 남았겠죠.”
“고백했다가 차인 걸 수도 있잖아?”
“자전거였을 수도 있죠.”
일 잘하는 잘생긴 예비 막내의 농담에 황은우는 깔깔깔 웃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걷던 중 당직실에 도착한 황은우.
그는 당직실 중앙에 어색하게 서 있는 인턴을 바라보았다.
“손태호라고 했지?”
“네, 선배.”
“오늘은 네가 수술방 근무 들어가라.”
황은우는 손태호를 순식간에 수술방으로 내려보냈다.
손태호는 어차피 이번 달이 지나면 안 볼 사이였다.
그러니 손태호보다는 새로운 막내가 될 이믿음이 그에게는 몇백 배 더 중요했다.
“앉아서 콜 올 때까지 쉬고 있어.”
“네, 선배.”
“본격적으로 근무 시작하기 전에 보호자에게 받은 보약이나 한 팩 해 볼까?”
황은우는 이믿음에게 보약 한 팩을 주고 자신도 한 팩을 챙겨 마셨다.
달콤새콤한 맛에 쓴맛이 섞인 한약 맛을 버티기 힘들었다.
이 정도로 맛이 끔찍한데 건강에 도움이 안 된다면 탕약 처방을 한 한의사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싶을 만큼.
“근데 용케 환자가 한약 마시는 거 알아냈다?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하던데.”
황은우는 보약 환자로 화제를 돌렸다.
오전에 그가 환자를 찾아갔을 때 환자는 보약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믿음에겐 순순히 보약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과 이믿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저한테도 따로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제가 눈칫밥으로 먼저 물었던 거예요.”
“…….”
“휴지통 입구에 갈색 액체가 묻어 있고, 한약 냄새도 좀 나는 것 같아서요.”
“눈썰미 좋네.”
황은우는 이믿음의 인턴답지 않은 활약에 감탄했다.
이믿음이 없었다면 아마 환자의 심계항진과 호흡 곤란의 원인을 찾는다고 이 검사 저 검사 다 하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리고도 원인을 찾지 못해 순환기 내과에 협진까지 요청했으리라.
이믿음 덕분에 일은 커지지 않고 적정선에 마무리되었다.
“믿음아, 앞으로 잘해 보자. 알았지?”
“네, 선배.”
이믿음의 씩씩한 대답에 황은우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 * *
40여 년의 전생을 거슬러 돌아온 흉부외과.
그 흉부외과에서 보내는 첫 번째 하루는 무난하고 무탈했다.
무난하고 무탈해서 허탈했다.
전생에서 고작 이 정도 수준의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자괴감을 느꼈단 말인가.
물론 그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초연할 수 있는 건 과거의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이겨 낸 뒤 인턴 시절을 다시 겪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전생의 나는 자신감이 너무 없었다.
2단 높이의 뜀틀을 4단 높이로 착각해서 두려워하고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람이 잔뜩 위축되면, 상황에 압도당하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못하더라.
…라는 깨달음을 나는 전생의 나를 통해서 깨달았다.
무려 전생의 40년을 바쳐서 얻은, 값비싼 깨달음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오후 7시, 나는 한 병실로 들어가 환자에게 상태를 물었다.
속칭 보약 환자였다.
“딱히 불편한 데는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보약이 문제였나 봐요.”
“…….”
“저는 그것도 모르고 심장에 이상이 있는 줄 알았으니…….”
“착각하실 수도 있죠. 심장 질환 때문에 입원하셨으니까요.”
나는 환자의 편을 들어 주며 빙긋 웃었다.
황은우의 권유로 먹어 본 결과 한약은 확실히 효과가 강했다.
섭취 후 20분이 지나자 전신에 뜨거운 기운이 확 퍼졌다.
무슨 약재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한약의 약효가 강력했다는 점.
한약이 환자 체질이 아니었다는 점.
환자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는 점.
이 세 가지를 감안하면 보약으로 심계항진과 호흡 곤란이 일어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럼 푹 쉬시고, 내일 저녁부터 금식이니까 잘 지켜 주세요.”
나는 환자에게 당부 사항을 전한 뒤 병실을 떠났다.
흉부외과에서 본 첫 번째 환자의 진료는 성공적이었다. 분명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환자도 마찬가지겠지.
“보약 환자는 어때?”
당직실로 복귀하자 황은우가 대뜸 물었다.
내심 보약 환자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보약을 안 먹으니까 증상이 사라졌대요. 앞으로는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아요.”
“이게 다 우리 똘똘한 믿음이 덕분이야.”
황은우가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전생의 그는 나만 보면 얼굴을 찌푸리기 바빴는데 말이다.
내가 전생과 같지 않으므로 황은우도 전생과 같이 흉부외과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일 잘하고 싹싹한 황은우의 잔류는 흉부외과에 큰 도움이 될 테고.
이번 생의 흉부외과는 사소한 부분부터 차근차근 바뀌고 있었다.
“선배, 차트 입력하는 것 좀 도와드릴까요?”
나는 바빠 보이는 황은우에게 먼저 물었다.
1년 차 레지던트가 없었기에.
2년 차인 황은우가 1년 차의 일까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업무 부담을 줄여 주고 싶었다.
황은우는 내가 도망칠까 걱정하고 있지만 사실 나야말로 황은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전생에서 도망친 건 황은우 쪽이었고.
“할 줄 아는 거 있어?”
“어드미션(입원), 디스차지(퇴원), 프로그레스(경과) 정도는 작성할 줄 압니다.”
나는 능력의 범위를 일부러 적당히 줄였다.
황은우를 돕는 것은 좋으나 황은우를 돕느라 내 배움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엥? 그게 다 된다고? 원래 1년 차부터 작성하는 건데?”
“소아 흉부외과에서 8개월 동안 수련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때 미리 배웠습니다.”
“그럼 환자 번호 14231412 이태원 환자 퇴원 요약지 작성해 볼래?”
“네.”
나는 환자 번호를 입력한 뒤 떠오른 정보를 슥 훑었다.
필요한 정보만을 쏙쏙 빼서 암기한 뒤 퇴원 기록지 창을 띄우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황은우는 어느새 옆자리로 다가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내 작업을 지켜보았다.
물론 나는 조금도 긴장되거나 초조하지 않았다.
차트 입력은 전생의 내 주특기였다.
차트를 빠르고 꼼꼼하게 입력한 덕분에 폐급 소리를 들으면서도 흉부외과에서 버틸 수 있었다.
타다다닥.
고요한 당직실에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나는 호흡을 한 번도 끊지 않고 황은우가 내준 숙제를 끝마쳤다.
그것도 고작 단 몇 분 만에.
-주 진단명: mitral stenosis(승모판 협착증)
-주 호소: dyspnea(호흡 곤란), chest pain(흉통)
-발병일: 3month ago
-경과: 환자는 3달 전부터 흉통 및 호흡 곤란을 호소하였으며 local 병원의 순환기 내과에서 실시한 Echo 결과 mitral stenosis 진단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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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결과
mitral hypertrophy(승모판 비대), fusion of commissure(승모판 연결부 유착), 승모판 면적 1.1~1.5센티(중증)
-수술 및 처치
mitral Replacemen(승모판 치환술) by mechanical valve(기계 판막)
-퇴원 시 환자 상태: 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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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침없이 퇴원 요약지를 작성한 뒤 황은우를 쳐다보았다.
황은우는 가자미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모니터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믿음.”
“네.
“하… 너무 잘하잖아? 나보다 더 빠르고 꼼꼼한 것 같은데?”
예상대로 황은우는 감탄을 터뜨렸다.
사실 차트 작성은 시간을 잡아먹는 하마였다.
작성 중인 차트에 필요한 정보는 다른 차트에 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차트를 뒤지고 그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쏙쏙 뽑아내야 하는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흉부외과 생활에 닳고 닳은 내게 차트 작성은 일도 아니었다.
차트를 대충 훑으면 필요한 내용을 숨 쉬듯 편하게 건져 낼 수 있었다.
영어 타자야 전생에서부터 잘 치던 것이었고.
“근데 넌 좀 쉬고 있어라.”
“왜요?”
“아무리 흉부외과 전공 예정이라고 해도 벌써부터 부려 먹을 순 없지. 그러다가 전공 그만둔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황은우는 내가 도망칠 것이 두려워 차마 일을 시키지도 못했다.
황은우가 도망칠 것이 두려워 내가 황은우의 일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서로를 위하는 우리 둘 사이는 무척 오묘했다.
“괜찮습니다. 선배가 시킨 게 아니고 제가 하겠다고 한 거잖아요.”
“그래도…….”
“콜이 오기 전까지만 할게요.”
내가 어중간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자 황은우도 못 이긴 척 작성해야 할 차트를 알려 주었다.
당직 근무를 서면서 작성하기에는 양이 엄청났다.
내가 입·퇴원 기록지와 경과 기록지를 대신 작성하기로 해서 그나마 다행이지.
제일 난이도가 높은 수술 기록지도 꽤 많이 밀려 있었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봤다.
황은우가 도망쳤다는 사실보다 이런 식으로 1년을 더 버텼다는 사실이 더 대단한 것이라고.
불쌍하고 가엾은 황 선배.
이번 레지던트 수련 때는 조금이라도 웃고 지내요.
황은우가 딱한 마음에 나는 차트 작성 속도를 최고치로 끌어 올렸다.
자정 전에 모든 것을 끝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