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27화 (127/257)

127화 제1장 리턴(2)

‘또또 설치고 다니네. 저 버릇은 고칠 줄 모르는 거야?’

콜을 받고 당직실을 나서는 이믿음을 지켜보며 손태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정의의 사도처럼 나서는 것.

이것은 의대 시절부터 쭉 이어진 이믿음의 습관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때 발생한 교통사고 환자를 처치한 사건.

주점에서 흉기에 찔린 환자에게 응급 처치를 한 사건 등등.

이믿음은 항상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고, 능숙하게 치료를 해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이믿음을 칭찬하고 대견하게 여겼지만 손태호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이믿음을 싫어했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러 사건을 해결하면서 이믿음의 인망이 두터워지는 것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저 새끼는 뭔데 손만 대면 환자가 다 살아나는 거지?

왜 건강을 회복한 환자들이 보상을 하고 매스컴은 사건을 다루지 못해 안달이지?

집안 환경이 평범한 이믿음의 활약은 이민호 패거리.

그리고 그 패거리에 속한 손태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밑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자신의 머리 위로 치고 올라올 때의 그 더럽고 불쾌한 기분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자신의 가치와 자존감이 절벽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이믿음이 치료에 실패해서 소송이나 당했으면 좋겠다.

손태호는 예전부터 이믿음이 곤란해지는 상상을 해 왔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놀랍게도 이믿음은 의대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위기를 해결해 왔다.

‘진짜 가는 건가?’

손태호는 당직실 바깥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믿음이 가운을 휘날리며 병동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매운 사건에 휘말리면 좋겠는데.

인턴 주제에 어디 나대냐고 레지던트에게 따끔하게 혼났으면 좋겠는데.

손태호는 속으로 이믿음의 불행을 빌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이믿음의 불행을 위해 마녀나 악마와 계약할 각오도 되어 있는 그였다.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리고 레지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수깡처럼 마르고 안경을 쓴 남자.

인수인계한 인턴의 말에 따르면 이 남자가 바로 2년 차 레지던트 황은우일 것이다.

황은우의 별명은 고슴도치.

누가 자기를 건드리면 대뜸 찌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저번 달 근무한 인턴의 말에 따르면 근무 중 황은우를 상대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새로 온 인턴?”

“네, 안녕하세요. 손태호라고 합니다.”

“계속 볼 사이니까 말 편하게 할게요. 그래도 되죠?”

“네, 선배님.”

“너 말고 다른 한 명은 또 어디 있어?”

“그게, 스테이션에서 병동 환자 노티를 했는데 자기가 확인해 보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손태호는 이믿음의 행적을 날름 일러바쳤다.

계획대로 황은우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하… 인턴이 주제도 모르고 깝죽거리네. 이제 말턴(레지던트를 앞둔 말년의 인턴)이라 이건가?”

“그 친구가 원래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성격이라서요. 아까는 워낙 급발진을 하는 바람에 제가 말리지를 못했습니다.”

“일단 넌 대기.”

황은우가 언짢은 표정으로 당직실을 떠났다.

황은우를 만나 호되게 당할 이믿음을 상상하자 손태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콜이 왔으면 메모를 해 두었다가 레지던트에게 알려 주면 그만인데.

병신에 머저리 같은 놈이 뭘 안다고 나선단 말인가.

‘뭐야? 이건?’

고소한 맛을 기다리고 있던 손태호는 곧 화들짝 놀랐다.

이믿음과 황은우가 뜻밖의 다정한 모습으로 당직실에 복귀했던 것이다.

심지어 한 손에는 보약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박스를 들고.

잠깐, 이러면 안 되는데?

* * *

병동 콜을 받고 병실에 도착한 나는 환자에게 질문부터 했다.

제일 불편한 증상은 무엇이냐.

그 증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냐 등등.

노티를 받은 대로 환자는 심계항진(심장 두근거림)과 호흡 곤란을 가장 크게 호소했다.

증상은 30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환자가 CABG(관상동맥 우회술)를 앞둔 상황이었기에 나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관상동맥 협착증이 급속도로 악화된 것이라면 말이다.

지금 당장 정규 수술을 응급 수술로 바꾸어서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심전도 검사부터 실시하겠습니다.”

나는 간호사가 병실에 갖다 놓은 심전도 기계로 환자의 심전도부터 확인했다.

환자의 상의를 올리고.

발목과 손목과 가슴에 전극을 부착하고.

결과지가 나오는 시간이 당겨진 고무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심전도 결과에 따라 환자의 증상이 관상동맥 증후군에 의해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급성 심근경색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분별이 가능할 것이다.

지이이잉.

막 뽑혀 나온 심전도 결과지는 막 뽑은 가래떡처럼 따끈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판독에 집중했다.

‘뭐지? 별 이상은 없는데?’

한 번 보고 두 번 보아도 판독지상에 비이상적인 반응은 없었다.

급성 심근경색은 완벽하게 배제할 수 있었으며.

관상동맥 증후군을 진단하기에는 ST분절의 상승 폭 또한 정상 범위였다.

머릿속에 암기해 둔 김용 교수의 심전도 데이터와 손에 쥔 심전도를 비교도 해 봤는데.

그럼에도 특별한 징후를 찾아낼 순 없었다.

수술 예정 환자라 걱정했던 것치고는 심전도가 너무 멀쩡했던 것이다.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환자는 응급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란 게 있으니까 레지던트에게 말해서 혈관 조영술을 유도해야 하나.

고민과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나는 판독지를 심전도 기계 위에 올려놓았다.

판독지로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기에 환자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갑작스런 증상이 나타나거나.

예상치 못한 증상 악화가 있을 경우 의외로 환자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침상 주변을 관찰하던 도중.

나는 쓰레기통 입구에 묻은 갈색 흔적을 발견했다.

후각에 집중해 보니 코끝을 스치는 묘한 향이 있었다.

간신히 주운 퍼즐 조각이 머릿속을 떠돌기 시작했다.

나는 진상에 한층 가까워졌음을 확신했다.

“환자분, 혹시… 한약 드셨나요?”

“네, 제가 어제 지어 왔어요. 이틀 뒤에 수술이 있잖아요? 그때까지 보약 먹고 튼튼해지라고 한 채 지워 왔어요.

내 질문에 환자 대신 보호자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혹시 한약은 언제쯤 드셨나요?”

“1시간 전쯤 됐을걸요?”

공교롭게도 환자는 1시간 전에 보약을 먹고, 30분 전에 가슴 두근거림과 호흡 곤란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환자의 증상은 심장 질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듯했다.

보약을 섭취하면서 신체가 과민 반응을 보인 것으로 예상되었다.

보약 또는 건강식의 경우 섭취하는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 가슴 두근거림이나 약간의 호흡 곤란을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속단은 일렀다.

환자를 경과 관찰하면서 이상 증후가 있다면 바로 혈관 조영술에 들어가야 한다.

“제 생각에는 드신 보약 때문에 일시적으로 항진증, 그러니까 신체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증상이 심해지면 바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보호자를 설득해 환자가 더 이상 보약을 먹지 못하도록 했다.

“수술 잘 받으려면 보약 먹고 건강해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보호자인 중년의 아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물론 그녀는 충분히 억울할 만했다.

그녀의 행동은 단지 남편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환자를 위한 마음이 오히려 환자를 잡는 경우를 나는 많이 지켜봐 왔다.

굿판을 벌이는 미신적인 치료.

신묘한 기 치료.

외국에서 들여온 이상한 식재료를 이용한 대증 요법 등등.

사이비 치료에 현혹되는 가족이나 보호자의 절박한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럴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마음은 너무 곱고 아름다우셨는데, 방법이 조금 잘못됐습니다.”

“…….”

“수술 전과 후에는 병원 식사를 하면서 평소처럼 지내는 게 가장 좋습니다.”

나는 보호자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잘 구슬렸다.

다행히 보호자는 금방 내 말을 받아들여 주었다.

보약을 먹여야 하네, 말아야 하네, 로 싸웠으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졌을 텐데 말이다.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근데 저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우리 남편이 보약 먹고 이렇게 됐으면… 이 보약은 남편한테 안 맞는 거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고생하는 선생님이 이거 드세요.”

내가 한사코 거절했음에도 보호자는 보약이 든 상자를 들이밀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약 상자를 손에 든 채 병실을 나오게 되었다.

“오늘 새로 들어온 인턴 맞죠? 말 좀 편하게 할게요.”

레지던트 2년 차 황은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황은우.

전생의 내 사수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수룩하고 일을 못하는 나 때문에 황은우는 무척 고생했다. 본인 일도 바쁘거늘, 내 뒤치다꺼리까지 하느라 등골이 휘었다.

급기야 황은우는 3년 차 중반에 탈주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공백은 지방 분원에서 온 파견 나온 레지던트가 메웠고.

“네, 편하게 하세요.”

“이믿음,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네가 뭔데 환자를 진료한다고 설쳐?”

황은우는 호되게 나를 야단쳤다.

전생에서 황은우가 나를 혼낼 때 나는 황은우를 악당 취급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모자란 건 그때의 나였다.

세월을 거슬러 돌아오니 보이는 풍경이 달라졌다.

“그러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다 내 탓이 되는 거 몰라?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

계속되는 꾸지람.

높아지는 언성.

분위기는 퍽 살벌했지만 나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황은우에게 꼬투리가 잡히게 되어 있었다.

왜냐고?

말년 인턴이라고 긴장을 풀었다가 사고 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황은우는 일부러 군기를 잡고 있었으니까.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해 보셔.”

“아까 병동 콜을 받고 환자의 간호 기록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도 환자에게 비슷한 증상이 있었습니다. 심전도 검사도 진행했고요.”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배가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진료를 볼 것 같아서 따라 했습니다.”

“…….”

“선배님이 안 계시는 시간을 공백으로 두면 너무 아까우니까요. 혹시라도 그사이 응급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고요.”

내 똑 부러지는 대답에 황은우는 말문을 잃었다.

말을 제대로 못했으면 기강을 확 잡았을 텐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 논리는 탄탄하고 정교했다.

또한 흉부외과 진료의 정석에 속했다.

더 갈구고 싶어도 갈굴 거리가 없을 수밖에…….

“심계항진하고 호흡 곤란은 이 보약 때문입니다. 간호사하고 저희 스태프 몰래 보호자가 환자에게 챙겨 줬던 모양입니다.”

“뭐야? 환자가 보약 먹고 있었어?”

황은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두 눈은 보약 상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네.”

“어쩐지 꼭 식후 1시간 이후부터 증상이 나타나더라. 안 그래도 교수님한테 노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해결됐네.”

“…….”

“이믿음, 짬을 허투루 먹은 건 아닌 모양이다? 제법인데?”

“감사합니다. 근데 저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뭔데?”

“저 흉부외과 전공할 생각입니다.”

내 폭탄선언에 놀란 황은우가 눈을 깜빡거렸다.

드디어 막내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부사수로 들어온 내가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기뻤을 것이다.

‘이거 완전히 딴판이잖아?’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전생의 내가 흉부외과 전공을 택한다고 했을 때 황은우는 심드렁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행동은 같았건만 전생과 현생의 온도 차이는 냉탕과 온탕만큼 극심했다.

“흉부외과 픽스하겠다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진심입니다. 어디 놀릴 사람이 없어서 선배를 놀리겠어요.”

“내가 웬만해서는 눈물이 안 나는데, 오늘은 눈물이 나네?”

황은우가 장난스럽게 눈가를 훔쳤다.

“우리 소중한 후배, 빨리 당직실로 모시고 가야지.”

황은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걷기 시작했다.

비록 전생의 나는 고문관이었지만 현생의 나는 당장 교수직을 맡아도 문제가 없는 실력자였다.

그러니 내 덕을 보는 건 황은우가 될 것이다.

특별 서비스로 모실 테니 이번에는 몰래 도망치지 맙시다.

선배, 알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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