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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25화 (125/257)

125화 제5장 40년 만의 귀환(5)

병원 건물의 불빛이 꺼져 병원 외부는 어두에 잠겨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깊어진 밤, 광활한 병원에서는 사람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쌀쌀한 저녁 봄바람만이 병원을 휘젓고 다닐 따름이었다.

나는 본관 뒤편에 위치한 으쓱한 공터로 남초롱을 데리고 가는 중이었다.

남초롱은 왜 굳이 이런 데까지 와야 하냐며 불쾌한 기색을 들어냈지만 무시했다.

서로의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면 은밀한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기어코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본관 건물이 드리운 그늘 때문에 남초롱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반면 달빛이 비치는 내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초롱아,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나한테 너무 날카로운 것 같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생에서 내성적이었던 나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화법이었다.

하지만 1살부터 살아 본 이번 생의 결과.

경우에 따라서는 요점이나 핵심부터 찌르고 들어가는 편이 훨씬 좋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에둘러 표현할 말을 찾다가 소모하는 에너지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남초롱이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두 팔은 어느새 성벽처럼 단단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난 그저 초롱이 네가 외과에 가지 않았으면 하고 말했을 뿐이야. 네 능력을 폄하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힘들게 일하는 게 보기 싫어서였지.”

“…….”

“네가 갑자기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이유, 솔직히 난 모르겠다. 그래서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야심한 공터에서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남초롱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말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남초롱을 건드렸던 게 분명해 보였다.

“초롱아.”

나는 대답을 재촉하는 의미에서 남초롱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했기 때문일까.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버텼기 때문일까.

남초롱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 미안, 낮에 조금 기분 나쁜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괜히 너한테 전가했던 것 같아.”

“외과에 관련된 일이었어?”

“응.”

드디어 남초롱이 숨기고 있던 판도라의 상자의 문이 열렸다.

설명에 따르면 남초롱은 오늘 여러 선배를 만나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

‘선배 저 인턴 수련 끝나면 외과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돌아오는 답변은 다 험악했다고 한다.

학교 성적도 좋고 인턴 평가도 좋은데 뭣 하러 외과에 가냐는 이야기였다.

몇몇 선배는 성형외과라면 대찬성이라고 말했지만.

남초롱이 흉부외과라고 말했더니 진저리를 치며 평생 후회할 짓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초롱이도 흉부외과에 생각이 있었구나.’

남초롱의 말을 듣고 나는 크게 놀랐다.

남초롱이 내게 흉부외과행 의사를 내비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슨 이유로 흉부외과를 택하게 됐을까.

또 다른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그런 말만 듣다가 너랑 아까 그 화제로 이야기를 하게 된 거야.”

“…….”

“믿음이 너까지 외과에 가면 고생길이 훤하다고, 가지 말라고 하니까 거기서 폭발해 버렸어. 미안.”

하소연을 마친 남초롱의 표정이 스르륵 풀려 있었다.

단단하게 끼워졌던 팔짱도 어느새 풀어졌다.

남초롱은 어느새 내가 아는 차분하고 다정한 남초롱으로 돌아와 있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구나. 이해해.”

나는 남초롱의 어깨를 다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람에게 내 꿈을 밝혔는데 다들 안 된다고 하면 주눅이 들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짜증도 날 것이다.

이제 남초롱이 갑자기 공격적이었던 이유는 밝혀졌다.

나 역시 가슴에 진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그녀와 불편한 관계로 남아 있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아직 풀어야 할 새로운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근데 초롱이 너도 흉부외과 가게? 나나 철우한테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잖아.”

“맞아, 오늘 처음 이야기하는 거야. 근데…….”

남초롱이 추가적인 대답을 머뭇거렸다.

두 발을 가만히 두지도 못했다.

입 밖으로 내면 쑥스러운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야말로 나의 새로운 숙제였다.

마음 깊숙한 곳에 감췄던 쑥스러운 이야기.

그것을 나는 진심 또는 진실이라고 부르니까.

“편하게 말해. 흉부외과 지원하면 어차피 나랑 같이 일해야 하잖아.”

“그렇겠지?”

내 설득에 넘어온 남초롱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흉부외과를 지원하려는 이유는 믿음이, 너 때문이야.”

“나?”

“그래, 너.”

남초롱의 폭탄선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여기서 왜 내가 나온단 말인가. 손톱만큼도 예상을 못했던 답변이라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 * *

“믿음이 넌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너 자신을 희생하잖아.”

“…….”

“의대에 다닐 때부터 환자가 생기면 진짜 의사처럼 달려가서 치료를 했고.”

“…….”

“양 교수님 밑에서 수련을 받은 것도 나중에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였고.”

남초롱은 한참 동안 그녀가 지금까지 지켜본 나에 대해서 설명했다.

친구의 입으로 듣는 내 이야기는 내 기억보다 훨씬 파란만장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영화나 소설을 보는 걸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 이야기와 남초롱이 흉부외과를 택한 이유가 나인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

내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남초롱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날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음… 솔직히 모르겠어.”

“조금만 참아. 이제 결론에 다 왔으니까.”

남초롱이 차분하게 말을 계속했다.

“널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을 하는데 너를 위해서는 과연 누가 희생해 줄까.”

“…….”

“그런 생각을 하니까 네가 갑자기 불쌍해지는 거야. 그래서 나라도 흉부외과에 가서 널 돕자는 생각이 들더라.”

남초롱의 긴 이야기가 드디어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니까 남초롱은 날 걱정해서 흉부외과에 오고 싶었다는 것이다.

진부하긴 하지만 남초롱의 마음씨는 비단결처럼 고 왔다.

그녀의 속 깊은 배려가 나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이제 완벽히 알겠네.”

“응, 뭐가?”

“네가 아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고생하는 내가 안쓰러워 흉부외과행을 고민 중인 남초롱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까 나는 이런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힘든 흉부외과를 무엇 하러 전공으로 택하냐고.

남초롱 입장에선 아마 황당했을 것이다.

어머? 얘 좀 봐?

나는 네게 힘이 되고 싶어서 흉부외과 지원하려는 건데 나보고 오히려 오지 말라고 하네?

이런 생각 때문에 내게 배신감이나 반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 대학 OT 때 너한테 신세 진 것도 아직 잊지 않고 있어. 그거에 연장선인 부분도 없지는 않아.”

“은혜 갚은 까치 같은 느낌?”

“응, 아주 조금은.”

서로의 가슴속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어낸 후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대화 분위기는 당연히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남초롱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나는 남초롱의 장래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다.

똑순이인 남초롱이 흉부외과에 합류하는 것은 물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그녀가 활약하면서 흉부외과의 분위기는 180도 바뀔 테니까.

하지만 남초롱의 전공이 나로 인해 강제되는 것이 옳은 걸까.

거기에 대해서는 거부감과 반감이 느껴졌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밤은 깊어졌고 달은 차올랐다.

나와 남초롱이 정답게 있자 심통 난 바람이 거칠게 불어왔다.

우리의 옷자락을 난폭하게 흔들어 댔다.

남초롱이 진심을 드러냈으니 이제는 내가 진심을 드러낼 차례였다.

길고 긴 방황과 번뇌 끝에 나는 내가 할 말을 정리했다.

“초롱아, 날 돕고 싶은 마음에 흉부외과를 고민 중이라고 했지?”

“맞아.”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초롱.

“그럼 흉부외과 말고 소아 흉부외과에 가 보는 건 어때?”

나는 남초롱에게 소아 흉부외과를 추천했다.

회귀한 내 능력이라면 흉부외과까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아 흉부외과는 설령 나라도 완벽히 관리할 수 없었다.

몸이 두 개가 아닌 이상 말이다.

남초롱이 소아 흉부외과에서 활약해 준다면 우리 병원의 흉부외과는 분명 별 탈 없이 잘 굴러가게 될 것이다.

“이제 흉부외과 가는 건 안 말려?”

남초롱이 웃으며 되물었다.

“안 말리는 게 아니라 못 말리지. 네 진심을 알았으니까.”

“기왕이면 믿음이 네 곁에서 너를 돕는 게 좋지만… 네 부탁이고 나도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전공은 소아 흉부외과로 할게.”

“고마워, 초롱아.”

“유어 웰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시원하게 웃었다.

* * *

모처럼 얻은 하루짜리 휴가를 나는 알차게 사용했다.

가족들과 인천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 바다를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부모님과 사랑이는 여전히 건강했으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네 가족이 타고 있는 인생의 함선은 튼튼했으며

그 경로는 한 번의 이탈 없이 올곧았다.

앞으로도 마냥 행복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설령 불행이라는 파도가 닥친다고 해도 우리가 똘똘 뭉친다면 못 이겨 낼 리 없었다.

휴가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나는 포로로 가방을 사 가지고 병동으로 복귀했다.

심장 이식을 받은 정화와 약속한 선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헤헤.”

포로로 가방을 받고 정화를 하루 종일 싱글벙글이었다. 벌써 퇴원해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생각에 들떠 보였다.

전생과 달리 정화는 무사히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결과는 훌륭했으며 면역 거부 반응 또한 심하지 않은 편이라 좋은 경과가 기대됐다.

나의 소아 흉부외과 생활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소아 흉부외과 레지던트들은 서로를 위할 줄 알았으며 교수진은 정치질에 무관심하여 환자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한 달, 두 달, 세 달.

봄은 여름이 되고 여름은 가을이 되었다.

그동안 수술방 인턴만 도맡아 하면서 소아 흉부외과 수술에 대한 내 식견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심장외과 부교수.

폐식도 외과 펠로우급의 능력을 갖춘 내가 소아 흉부외과 대가의 수술을 매일같이 지켜보면서 돕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수술이 끝난 후엔 복습까지 철저히 하지 않았던가.

실력이 수직 상승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었다.

메스만 잡지 않았을 뿐.

나는 어느새 소아 흉부외과에서도 펠로우 이상의 솜씨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실력에 한창 물이 오를 무렵.

12월이 찾아오면서 가을이 겨울에 바턴을 넘겨주었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보낸 장장 9개월의 수련을 마치고 나는 마침내 흉부외과로 가게 되었다.

전생의 내 희로애락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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