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제5장 40년 만의 귀환(4)
이믿음의 호언장담에 김요한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이믿음은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의료 지식과 응급 처치로 사람들을 구해 왔다.
심지어 김요한 자신마저 이믿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믿음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이믿음을 신뢰하기란 쉽지 않았다.
얼마 전 진찰 및 검사 결과를 본 강동욱 교수조차 김요한의 증상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다.
확실한 진단을 위해 입원 검사를 제안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턴인 이믿음이, 단지 육안으로 자신의 병명을 알아차린다고?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믿음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믿음의 진단은 믿을 수 없다고 김요한은 생각했다.
“으으으윽!”
불청객처럼 왼쪽 가슴에 찌르르 퍼지는 통증.
김요한은 신음을 흘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페이스메이커가 있어 급성 심장 마비를 막을 수는 있다고 해도 가슴이 아플 때마다 두려움이 밀려오는 김요한이었다.
국민학교 시절.
심장 마비로 쓰러진 경험은 김요한에게 지울 수 없는 그늘이 되었으니까.
“시간 괜찮지?”
“갑자기 왜 시간을?”
“우리 병원으로 가자. 약 처방받고 몸 관리만 잘하면 직장 눈치 보면서 병가 안 써도 되고, 검사비에 돈 안 써도 돼.”
이믿음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들쳐 올렸던 김요한의 상의를 내리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김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취했나?
안 보는 사이에 주사가 바뀌었나?
쉬이 꺾을 수 없는 이믿음의 패기에 김요한은 일단 백기를 들었다.
대신 이믿음의 뒤를 쫓아가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뭐야? 궁금하게만 하지 말고 어디가 아픈 건지 제대로 말을 해 줘야지.”
“네가 걸린 건 대상포진이야.”
“대상포진이 뭔데?”
“수두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다가 활성화되는 질환이야. 주로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사람에게 발병해.”
이믿음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바이러스가 활성화되면 극심한 신경통이 발생한다.
그로 인해 일부 의사들은 대상포진을 통증의 왕인 질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이믿음은 전했다.
“그럼 내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맞아, 공교롭게 왼쪽 가슴 쪽에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퍼져서 심장 질환하고 착각하게 된 거야.”
이믿음의 설명을 듣고서야 김요한은 한시름 덜었다.
대상포진도 분명 만만치 않은 질환이었지만 분과 초를 다투는 응급한 심장 질환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근데 내가 대상포진이라는 걸 너는 알고, 왜 강 교수님은 몰랐어?”
김요한은 아직 남은 의문을 제기했다.
인턴인 이믿음이 알고 있는 것을 노련한 강 교수가 몰랐다?
분명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대상포진은 원래 초반에 진단하기 힘들어. 딱히 검사할 수단이 없거든. 증상이 심해지고 피부에 붉은 반점 같은 게 나타나면 그때 진단이 가능해져.”
“아… 그럼 이게 여드름이 아니었구나.”
김요한은 상의를 들추고 왼쪽 가슴에 번져 있는 붉은 반점을 확인했다.
이 붉은 반점은 이틀 전부터 생겼는데, 차차 그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처음에는 좁쌀 여드름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오늘에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고 주말에 피부과를 들러 볼 생각이었다.
“여드름 아니야. 발적이 신경을 타고 겨드랑이 쪽까지 이어지고 있으니까.”
“너 기운 북돋아 주려고 만났는데 졸지에 그 반대가 되어 버렸네?”
김요한은 반전된 상황을 인식하고 쓰게 웃었다.
돌이켜 보면 술자리 2차 때부터 대화의 주제는 줄곧 김요한 본인의 흉통이었다.
인턴 생활로 지친 친구에게 자기 증세만 늘어놓다니…….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뭐 어때? 난 좋은데?”
“어떤 점이?”
“내 친구가 나랑 상담해서 몸이 좋아지면 나도 좋은 거 아닌가? 나중에 오늘 일을 들먹이면서 맛있는 것도 얻어먹을 수 있고.”
“너도 참.”
농담처럼 던진 이믿음의 말에는 김요한을 향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오늘 일을 너무 미안해할 필요 없다는…….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야겠고.”
흉통은 사실 심장 질환이 아닌 대상포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 번거롭게 한 번 더 병가를 쓸 필요도, 검사에 쓸데없는 비용을 쓸 필요도 없다.
이믿음 덕분에 김요한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다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말을 안 했네. 고마워, 믿음아.”
“나 요새 힘드니까 고마워 대신… 슈퍼 파워를 하는 건 어때?”
이믿음의 틈새 유머가 작렬하면서 김요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쌓여 온 감동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느낌이랄까.
병원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는 이런 어줍지 않은 유머를 안 했던 것 같은데…….
“믿음이, 너한테 필요한 건 진짜 슈퍼 파워일지도 모르겠다.”
김요한은 이믿음이 민망하지 않게 유머를 받아 주면서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병원 생활이 진짜 힘들긴 힘든 모양이다. 네가 이렇게 변한 걸 보면.”
* * *
김요한의 병명을 알아낸 뒤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나는 김요한을 데리고 우리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응급실 당직 근무자가 남초롱이었다.
남초롱은 사복을 입은 나를 의아하게 여겼고.
사복을 입은 채 응급실에 환자를 데리고 온 나를 환타 취급하며 깔깔 웃었다.
웃음거리가 됐다고 해도 반박할 만한 논리가 없었기에 나는 억울함을 삼켜야 했다.
돌이켜 보니 기껏 병원을 탈출했다가 몇 시간 만에 제 발로 돌아온 꼴이었으니까.
1년 차 레지던트의 감독하에 남초롱이 김요한을 진료했다.
신경절을 따라 이어진 발적.
왕 서방의 점만큼이나 명백한 임상 증상이 있었기에 대상포진 확진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항바이러스제와 진통제가 포함된 약이에요. 하루 세 번 식후에 챙겨 드시고, 약 드시는 동안 무리는 하지 마세요.”
“…….”
“약 다 드신 후에는 동네 피부과에서 경과를 보면 돼요.”
남초롱이 원내 처방된 약 봉투를 건네면서 진료는 마무리되었다.
더불어 남초롱이 잠깐 시간을 내 달라고 했기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후 병원을 나와 역 근처에서 요한이를 배웅하고 요한이와 이별의 악수를 나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즐거웠고.
친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더 뿌듯했다.
이런 경험들이 분명 내 고된 의사 생활을 지탱하는 활력소가 아닐까.
“다음에 또 보자. 그때까지 건강하고.”
“그래, 너도.”
멀어지는 요한이의 뒷모습에서 나는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다음에 또 보자고 했지만 솔직히 언제 또 요한이를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인턴과 레지던트 1년 차는 1년에 두세 번 연차를 쓰는 것도 버거웠다.
이 시대에서, 흉부외과 전공을 한다면 더더욱.
“심장 이식 수술 때문에 휴가 얻었구나. 맞지?”
병원으로 복귀하자 응급실 인근 휴게실에 서 있던 남초롱이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초롱이 건네는 음료수를 받았다.
“어? 근데 왜 네 거는 커피고 내 거는 왜 알로에 음료수야?”
나와 남초롱의 음료가 다르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순환기 내과에서 함께 근무할 때부터 우리는 항상 커피를 마셨다.
“너 오늘 오프잖아. 이 야밤에 굳이 커피를 마시고 각성할 필요가 있을까?”
“와. 나 감동했다, 초롱아.”
나는 반사적으로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그녀가 알로에 음료를 골라 준 데는 섬세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평소 먹던 음료를 뽑아 주었을 텐데 말이다.
“내가 화곡동의 똑순이 남초롱이라구. 잊으면 곤란해.”
본인이 너스레를 떨고도 웃겼는지 남초롱이 피식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어색하기 마련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알로에 음료수를 마시며 운을 뗐다.
“응급실 근무는 어때? 힘들지?”
“힘들긴 힘든데 힘든 정도가 조금 다른 것 같아.”
“…….”
“병동 근무가 사람을 끊임없이 다그치는 느낌이라면 응급실 근무는 밀물처럼 밀어닥쳤다가 썰물처럼 빠지는 느낌?”
화곡동의 똑순이답게 남초롱의 표현은 아주 정확했다.
응급실 근무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리듬 같은 것이 있었다.
힘들 때는 CPR 환자 또는 중증 외상환자가 사정없이 밀려 들어오고, 여유로울 때는 또 한없이 여유롭곤 했다.
하지만 병동과 응급실의 근무 강도를 굳이 나눠야 한다면 나는 병동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말이다.
응급실은 1차 진료를 본 후에 해당 과에 환자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즉, 입원시킨 환자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병동에서는 입원 전후, 처치 전후, 퇴원 전후까지 끊임없이 환자를 관리해야 한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을 말이다.
입원 환자가 없다는 점은 응급의학과의 큰 이점이었다.
그래서 응급의학과는 2010년 중반부터 꽤 각광받는 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소아 흉부외과는 어때? 나도 소아 관련 과에 가 보고 싶긴 했는데.”
남초롱은 본인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사람이 부족해서 힘들긴 한데, 스태프 분위기는 진짜 좋더라. 위, 아래로 끌어 주고 당겨 주는 기운 같은 게 있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근무하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말이다.
나는 주저 없이 지금 근무하는 소아 흉부외과를 꼽을 것이다.
소아 흉부외과의 분위기는 그만큼 화목했다.
레지던트 간의 사이도 좋았고.
교수진은 믿음직스러웠으며 과장 또한 환자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흉부외과에 남겨 둔 미련이나 원한 같은 것이 없었다면 나는 소아 흉부외과 전공을 선택했으리라.
이후로도 남초롱은 한동안 꼬치꼬치 소아 흉부외과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나는 넌지시 남초롱의 의견을 떠봤다.
“소아 흉부외과 전공할 생각 있어?”
“일단 지금은 제일 끌리긴 해. 평소에 아이를 좋아하고 외과 쪽에도 관심이 있긴 했거든.”
“난 네가 외과 쪽으로는 안 갔으면 좋겠어.”
나는 서슴없이 반대 의견을 내놨다.
성별이나 능력 때문에 남초롱의 외과행을 반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남초롱이 어중간한 마음으로 외과에 지원했다가 개고생을 하고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케이스를 주변에서 자주 접했다.
“왜?”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 없으니까.”
“그러는 믿음이 너는 왜 사서 고생하려고 해? 더군다나 외과 중에 흉부외과 전공이면 말 다 한 거 아니야?”
“…….”
“그리고 믿음이 네 말대로라면 외과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다 미련하게 사서 고생하는 분들이게?”
순식간에 남초롱의 혀가 날카로워졌다.
내 말의 무언가가 남초롱의 내면을 자극했던 걸까.
남초롱이 내게 독설을 날린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나도 퍽 놀랐다.
나는 단지 남초롱의 외과행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을 뿐인데…….
남초롱의 능력을 폄하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남초롱이 외과에서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인데…….
그녀의 갑작스런 독설과 감정 변화 속에는 분명 어떤 비밀이 존재할 것이므로
나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더욱더 서로를 믿게 될 테니까.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때마침 다른 과 스태프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자.”
나는 남초롱의 팔을 잡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