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제4장 남겨진 것(5)
“하아아암.”
나는 하품하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컨디션이 더 가라앉으면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인턴 생활이 2개월을 꽉 채워 가는 시점.
수면 부족과 살인적인 근무 시간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무 생각과 걱정 없이 침대에 누워서 잠만 자고 싶다.
그런 욕망이 샘솟았다.
나는 당직실에 딸린 욕실로 이동해서 찬물로 씻었다. 찬물의 도움을 받아 몽롱했던 의식을 깨웠다.
벽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오전 4시.
“…….”
“…….”
당직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오늘은 치프가 코 고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당직 근무자인 홍선아는 처방을 입력하다 고개를 숙인 채 잠이 들어 버렸다.
깨어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다시 책상에 앉은 나는 소리를 죽여 가며 공부를 시작했다.
순환기내과에서 끝내지 못한 심전도 공부와 소아 흉부외과 수술방에서 직접 확인한 대가들의 수술법을 복기하는 것이었다.
막 정신이 깬 탓에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뇌에 방탄유리 같은 것이 씌어져서 공부하는 내용들을 족족 반사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악착같이 반사된 내용이 다시 뇌 속으로 들어갈 데까지 내용을 보고 또 보았다.
전생에서 놓쳐 버린 인연들을 이번에도 또 놓쳐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인연들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또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지난 과오를 다잡고 새로운 길을 걷기 위해 40년 전에서 돌아왔으니까.
스스로를 다그쳐 가며 공부하다 보니 집중력이 되살아났다.
오늘 공부해야 할 심전도 판독지의 목표량을 채웠다.
일주일 전 박정렬이 정화에게 실시한 심장 이식 수술까지 3차로 복습할 수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지.’
나는 컴퓨터로 정화의 수술 기록지를 보던 중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생의 나 역시 심장 이식 수술을 해 봤다.
부교수 3년 차에 최초로 심장 이식 수술을 하고, 그 후부터 2년에 한 번꼴로 심장 이식 수술을 했던 걸로 기억했다.
나는 우리 과에서 심장 이식 수술을 꽤 잘하는 편이었거늘…….
박정렬 교수와 비교하면 과거의 내 이식 수술 실력은 초라한 수준이었다.
일단 수술 속도와 수술 정확도에서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제일 중요한 것은 수술 난이도였는데, 성인 심장 이식보다 소아 심장 이식이 몇 배는 더 고난이도였다.
소아는 심장이 작은 데다가 심장 혈관까지 덜 발달했다.
섬세하게 다루지 않으면 출혈이 밥 먹듯이 발생하고 혈관이 아예 망가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박정률은 정화의 심장 이식 수술을 깔끔하게 끝마쳤다.
탁월한 실력의 박정률이 내게 자극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 역시 박정률처럼 힘들고 어려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싶었으니까.
‘왼손에 좀 더 신경을 써 볼까?’
수술 기록지를 보던 나는 활짝 펼친 내 왼손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정률은 오른손잡이임에도 왼손을 오른손처럼 능숙하게 사용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식사를 할 때 왼손으로 젓가락질까지 가능했던 걸로 기억했다.
나 역시 양손잡이의 기틀을 마련해 두기는 했다.
6살 때부터 집안 경제를 돕기 위해 인형 눈을 꿰매곤 했는데.
그때 틈틈이 왼손으로 바느질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박정률만큼 왼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수련하는 남은 기간 동안 왼손 훈련에 집중한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나보다 앞서간 사람이 있다는 건 실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서 빠르게 성장하고, 거기에 나만의 개성을 입혀 새로운 길을 창조하면 되니까.
왼손을 수련한 뒤에 나는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나는 문득 미래의 내가 궁금했다.
* * *
오전 5시 30분, 루틴 잡이 시작되었다.
나와 김준호는 각각 병실을 반으로 나눠 동맥혈 채혈, 드레싱, 검사 동의서 받기 등등의 업무를 처리했다.
내 처치 보조로는 간호사 김빛나가 붙었는데, 우리는 최근 잘 어울리는 단짝이 되었다.
악의 축 하수진이 있을 때는 미처 몰랐다.
김빛나가 병동의 비타민처럼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하수진의 태움 때문에 전생의 김빛나가 안타까운 선택을 했던 데는 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좋은 소식 하나 들려 드릴까요?”
병실 한 곳에서 처치를 마치고 다음 병실로 이동하는 도중 김빛나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슨 좋은 소식이요?”
“뭘까요? 맞춰 보세요.”
“저랑 관련된 거예요?”
“이 선생님하고도 관련되어 있고, 저랑도 관련되어 있어요.”
“저희 둘이 관련된 좋은 소식이라…….”
머리를 굴려 봤지만 옳다구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김빛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좋은 소식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2주 전에 퇴사한 하수진 선생님이요, 환자 폭행한 것 때문에 경찰서 다녀왔나 봐요. 미니 홈피에 글을 적어 놨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거 깨소금 맛이네요.”
나는 속 시원하게 웃었다.
소아 환자를 꼬집고 때린 동영상이 촬영된 덕분에 하수진은 보호자에게 고소를 당했다.
사직서를 썼지만 사직 처리가 되지 않고 강제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나는 소송을 돕기 위해 보호자에게 곽도안 아버지를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다음 소식은 잘 몰랐다.
그런데 김빛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 처리가 아주 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슬기도 그렇고.
하수진도 그렇고.
전생에서는 뻔뻔하게 병원 생활을 했을 인간들이 다 병원에서 쫓겨나고 소정의 죗값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나 통쾌했다.
이제 남은 건 동기 이민호와 불구대천의 원수 강태섭 정도일까.
남은 적수들이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충분히 본때를 보여 줄 것이다.
나는 전생의 내가 아니었으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간호사들이 다 이 선생님한테 감사하고 있어요. 알고 계시죠?”
“병원 생활 뭐 있나요? 서로 돕고 기대고 하는 거죠, 뭐.”
“근무한 지 두 달도 안 됐으면서 벌써 병원 생활에 통달한 듯한 말투네요?”
“통달 말고 통닭 하면 안 되나요?”
“으… 썰렁해요.”
내 농담에 김빛나가 본인의 팔뚝을 쓸어내리곤 다음 병실로 휙 먼저 가 버렸다.
이번 말장난은 조금 별로였나?
상급은 아니어도 최소한 중급은 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김 선생님, 저한테 감사하고 있다면서요. 농담하면 그냥 재밌다고 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나는 김빛나를 쫓아가며 따져 물었다.
“재미없는 농담을 듣고도 재미있는 척하면 재미없는 농담을 계속할 거 아니에요.”
“…….”
“그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제 고막과 이 선생님의 유머 실력 상승에도 전혀 도움이 안 돼요. 아시겠어요?”
김빛나가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 위원처럼 냉정하게 한마디 했다.
한낱 참가자에 불과한 나는 한마디의 핑계도 할 수 없었다.
* * *
타다다다닥.
병동의 루틴 잡을 마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소아 중환자실을 찾았다.
홍선아가 정화의 상태를 확인해서 알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도 고생 많으시네요.”
나는 중환자실 앞에 마련된 대기실에 앉은 정화의 보호자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심장 이식 수술이 끝난 뒤 보호자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수술 경과가 좋았으므로 정화의 미래 또한 희망적이었다.
정화 가족은 곧 병원이 아닌 따뜻한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
지이이잉.
중환자실에 들어서자 복도와는 냄새부터 달랐다.
독한 소독약 냄새에 살이 짓물러서 생기는 냄새, 고약한 대소변 냄새 등이 섞인 기묘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나는 이 냄새를 혼자서 죽음에 가까운 냄새라고 표현하곤 했다.
오늘의 중환자실은 유독 평화로운 편이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 중인 것도 아니었고, 다른 응급 처치가 필요한 환자도 없어 보였다.
스테이션에서는 간호사 한 명이 처방을 확인 중이었고, 나머지 간호사들은 처치실 쪽에서 근무 인수인계를 하고 있었다.
“정화야, 몸은 좀 어때?”
나는 정화에게 다가가 물었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째, 정화는 아직 중환자실에서 관리 중이었다.
상태를 봐서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일반 병실로 옮길 거라고 들었다.
“팔다리에 힘이 없어요. 숨 쉬는 것도 불편한 것 같고, 가슴도 아파요.”
기다렸다는 듯 불편한 증상을 토로하는 정화.
하지만 나는 정화의 증상을 마냥 심각하게 듣지만은 않았다.
정화가 말하는 증상은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들이 흔하게 호소하는 것들이었다.
즉, 지금 말한 증상만으로 섣불리 수술 후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우리 정화 많이 불편하겠구나. 선생님이 확인했으니까 진통제라고, 정화 덜 아프게 하는 약을 써 줄 거야.”
“네.”
“또 다른 불편한 건 없고?”
“엄마가 없어서 무섭고 불편해요.”
정화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하긴, 중환자실의 무거운 분위기를 6세 아이가 혼자 버티기엔 무리가 있었다.
시시때때로 다급한 응급 처치가 실시되며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하니까.
정화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묻고 정화의 마음을 안정시킨 뒤 나는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지난밤 간호사가 작성한 간호 기록지와 각종 검사 결과지를 확인했다.
면역 거부 반응.
그러니까 육체가 기증받은 심장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인식하는 반응은 현재까지는 없어 보였다.
원래 6개월까지는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해서 벌써부터 마음을 놓아선 안 되겠지만.
나는 곧바로 콜폰으로 홍선아에게 노티를 시작했다.
끝에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선배, 정화가 의식을 차리면서 혼자 있는 걸 많이 불안해해요. 상태도 많이 좋아졌는데, 일반 병실로 보내는 건 어떨까요?”
-이식 수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안전하게 열흘 정도는 중환자실에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홍선아는 내 의견을 에둘러 반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환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나와 다른 것뿐.
홍선아는 매뉴얼을 따르는 중이었고, 나는 정화의 상태를 봐 가며 유동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통화 도중 잠깐 정화를 훔쳐보니 정화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매뉴얼을 만든 것이지, 매뉴얼을 지키기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일까.
나는 매뉴얼과 사람의 역전 현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오전 컨퍼런스 때 선배가 박 교수님한테 여쭤봐 주시면 안 돼요? 일반 병실로 전실해도 되는지?”
-그래, 이야기는 드려 볼게.
“고맙습니다, 선배.”
나는 교묘한 화술로 원하는 것을 이뤄 냈다. 아마 내가 전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정화는 중환자실에서 열흘을 꽉 채웠을 것이다.
보호자 없이 두려움에 떨었겠지.
홍선아가 박 교수에게 전실 이야기만 꺼낸다면 박 교수는 아마 정화의 전실을 허락하리라.
나는 정화의 병상으로 돌아가 정화를 안심시켜 주었다.
간호사에겐 정화가 불안해하면 정화를 안심시켜 주고, 그래도 안 되면 내게 노티를 해 달라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항불안제를 투여할 수도 있으니까.
수술 후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는 정화를 직접 보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지이이잉.
서둘러 복귀하는 도중 가운에 넣어 둔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했더니 소아 흉부외과 병동 콜이 아니었다.
순환기 내과도 아니고, 다른 병동도 아니고, 대체 어디 전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