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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19화 (119/257)

119화 제4장 남겨진 것(4)

-오후 3시 3분 서울역으로 향하는 KTX 노선을 탑승하는 승객분들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해당 노선은 오후 3시 3분에서 5분 뒤로 연장된 3시 8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연장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피커를 따라 역무청장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평소와는 다른 안내 방송 멘트에 사람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중에는 대구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서울로 올라가려는 정하람과 서해나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열차 출발이 5분 밀린다는데? 무슨 일이 있나?”

“일단 들어 보자.”

정해람과 서해나는 간식으로 먹고 있던 바나나마저 삼키지 못한 채 방송을 들었다.

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인근 병원에서 심장 적출을 했다.

본래라면 의료진이 헬기를 타고 복귀를 해야 하는데 기상 악화로 헬기 운행이 취소되었다.

의료진은 부득이하게 KTX를 타고 서울로 복귀할 계획이며 의료진이 3시 8분경 역에 도착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열차 운행이 지연된다는 것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다 있네? 그 의사 선생님들 엄청 마음 졸이고 있겠다.”

“그러게, 3시 8분이 되면 더 안 기다리고 그냥 가 버린다잖아.”

서해나의 시선이 철도 전광판에 머물렀다.

현재시간은 오후 2시 50분.

감수성이 풍부한 그녀는 구급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는 의사들을 머리로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들이 부디 무사히 도착하기를.

서울로 복귀해서 수술을 잘 마치고 한 아이의 소중한 목숨을 살릴 수 있기를.

서해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빌었다.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면 5분이 아니라 더 긴 시간도 기다릴 수 있는데.”

“응, 나도.”

서해나는 간식으로 먹던 바나나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주변을 살폈다.

3시 3분에 출발, 아니 3시 8분에 출발하게 될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출발 지연에 투덜거리는 사람도.

철도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5분은 다들 참을 만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열차 지연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것이 서해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가 너무 급한 일이 있다며 정시 출발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

역에서 해당 고객의 권리 주장을 막을 권한이 있을까.

서해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즉, 의료진이 3시 8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KTX에 탑승하는 1,000명의 승객이 한마음 한뜻으로 의료진의 건승을 빌어야 했다.

“그 의사 선생님들 별 탈 없이 잘 도착했으면 좋겠다. 설마 빨리 오다가 교통사고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말이 씨가 된다? 그런 험한 소리 하면 안 돼.”

“젊은 사람들이 속 편한 소리를 하는구먼.”

두 사람 근처에 서 있던, 양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두 사람의 대화에 껴들었다.

“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속 편한 소리요?”

정해람이 중년 사내의 말에 먼저 반응했다.

사내의 말속에 담긴 비아냥이 신경을 긁어 댔기 때문이다.

“자기 시간이 소중한 줄 알면 남의 시간도 소중한 줄 알아야지. 그냥 심장 이송 때문에 열차 지연한다고 설명만 하면 끝인가?”

“…….”

“사람을 기다리게 했으면 무언가 보상이라도 있어야지 말이야.”

중년 사내는 철도 공무원에게 해야 할 불평을 정해람에게 토해 냈다.

“저기요, 아저씨. 아저씨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5분을 내 주는 것도 아까우세요?”

“왜, 아까우면 안 되나? 그리고 자네 같은 청춘들의 5분하고 나 같은 중년의 5분은 전혀 다르단 말이야. 그 점도 감안해야지.”

“이상한 아저씨야. 그냥 가자, 해람아.”

정해람이 불같이 화낼 것을 알고 서해나는 미리 정해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과연 서해나의 예상대로 정해람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른 어른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왜 그쪽만 유독 불평불만이 많습니까?”

“…….”

“당신 인생이 꼬였다고 해서 남의 인생까지 꼬이게 만들지 마세요.”

“뭐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버르장머리 없이…….”

중년 사내가 도끼눈을 뜨고 정해람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분위기가 격해졌다간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았다.

“씨발, 두고 봐. 내가 반드시 열차 정시에 출발하게 만들 테니까.”

중년 사내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현장을 떠났다.

순간 승강장 주변이 싸늘한 침묵에 휩싸였다.

“저 아저씨가 항의해서 열차 진짜 정시에 출발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안 되는데…….”

멀어지는 중년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서해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정해람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적개심을 거두고 낭패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자신이 괜히 사내와 시비가 붙은 탓에 의료진이 피해를 볼까 봐.

“일단 내가 가서 사과하고 올게. 잠깐 기다려 봐.”

정해람은 중년 사내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3시 3분에서 3시 8분으로 출발 시간이 지연된 서울역 방향 KTX행 열차에 대한 추가 안내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구급차를 통해 해당 역에 접근 중인 심장 이식 팀이 승객 여러분께 전달하는 메시지입니다.

* * *

“너 진짜 미쳤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

고정민의 칭찬에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지금 돌이켜 봐도 ‘그 발상’은 탁월한 데가 있었다.

여기서 ‘그 발상’이란 내가 현재 스태프들이 처한 상황을 요약해서 녹음한 것이었다.

그 녹음 파일을 역무청장에게 보내 역내 방송으로 내보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승객 입장에서 말이다.

역무청장의 목소리를 통해 심장 이식 수술 상황을 대략적으로 듣는 것과

의사인 내 입을 통해 상황을 전달받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현장감 측면에서나 전문성 측면에서나 후자가 압도적으로 효과적이었다.

그럼 굳이 왜 녹음 파일을 보내서 역내 방송을 하게 만들었느냐.

당연히 승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승객들이 불평불만 없이 열차의 지연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효과가 있을 거야, 분명히.’

1살부터 길러 온 연기력을 이번 녹음에 전부 떼려 박았다. 녹음을 듣기만 한다면 눈물이 메마른 사람도 눈물을 터뜨릴 거라고 나는 장담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단 하나 시간뿐이었다.

“구조사님, 역 도착 시간은 어떻게 될까요?”

“약속한 대로 3시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도착이 더 늦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8분 안에 승강장까지 달려갈 수 있겠어요? 전력질주를 해도 힘들 것 같은데요?”

“구조사님이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단축해 주셨잖아요. 저도 어떻게 해서든 해내야죠.”

나는 아이스박스를 끌어안고 있는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부터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내 팔과 내 다리, 즉 내 육체였다.

갖은 잡일에 수면 부족으로 컨디션이 예전만큼은 못했지만 그럼에도 다른 인턴들에 비해 몸 관리는 충실히 해 온 편이었다.

죽기 살기로 뛴다면 시간을 충분히 맞출 만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

“저희 쪽에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고정민이 역 공무원과 통화를 나누고 끊었다.

역 도착까지 고작 3분이 남은 시점, 과연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을지 궁금했다.

“선배, 어떻게 됐대요?”

“아직까지 열차 지연으로 컴플레인 들어온 건 없다고 하더라. 우리만 제시간에 도착하면 될 것 같대.”

“…….”

“역 앞에 안내하는 직원이 대기 중이니까 그 직원 따라서 승강장으로 가라고 하더라. 그쪽에서 표도 미리 뽑아 놨대.”

“수술 무사히 끝나면 여기 공무원분들께 뭐라도 한턱 쏴야겠네요.”

나는 진심으로 역 공무원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이번 심장 수술이 성공한다면 그 공로의 절반은 공무원들에게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 공무원들이 우리의 사정을 무시했다면 심장을 제시간에 맞춰서 이송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창밖 너머에서 순식간에 바뀌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우리의 여정에 곧 마침표가 찍힐 거라고.

“슬슬 준비하세요. 역 다 왔습니다.”

“네.”

만반의 각오를 한 지 얼마 안 된 시점.

마침내 구급차 후방 문이 열리고 싸늘한 봄바람이 덮쳐 왔다.

손목시계로 확인한 현재 시간은 정확히 오후 3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8분뿐이었다. 그리고 이 8분에 정화의 밝은 미래가 달려 있었다.

“자일리 병원에서 온 스태프들이죠?”

“네.”

“이쪽으로.”

마중 나온 공무원과 함께 나는 미친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아이스박스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박스를 품에 안고 계단 서너 개를 훌쩍 뛰어넘었다.

내가 워낙 의욕적으로 달리고 있었기에 고정민과 박원필은 맨 손임에도 나보다 훨씬 뒤에 처져 있었다.

“저기 화장실 보이시죠? 거기서 왼쪽으로 보이는 통로를 따라 달릴 겁니다.”

“…네.”

공무원과 나는 짧은 문답을 나눈 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4번 승강장 근처에 도착할 때쯤이었을까.

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앞머리는 젖은 미역 줄기처럼 늘어졌고,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고, 침이 바짝 말라 버린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내 인생에 이렇게 치열하고 필사적으로 뛰어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잊으면 안 돼. 달리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야.’

전속력으로 달리는 도중에도 나는 중간중간 아이스박스를 체크했다.

자칫 넘어지거나 박스를 떨어트려서 심장이 훼손된다면 우리가 쓰고 있는 드라마는 희극에서 비극으로 바뀔 테니까.

‘드디어…….’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질 때쯤, 나는 승강장에 도착했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KTX 열차가 늠름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도 전광판으로 확인한 현재 시간은 오후 3시 7분.

딱 1분이 남은 시점에서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것이다.

공무원에게 표를 받아 KTX에 탑승한 뒤 나는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도저히 자리를 찾아갈 기운이 없었다.

한발 늦게 도착한 고정민과 박원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 * *

KTX에 무사히 탑승한 우리는 곧 체력을 회복하고 열차 맨 앞 칸으로 이동했다.

매 칸을 돌면서 열차 지연을 위해 기다려 준 승객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역 공무원들과 더불어 승객들 역시 이번 이송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승객들의 너그러운 이해가 없었다면 아마 열차는 벌써 떠나고 없었을 테니까.

짝. 짝. 짝. 짝.

승객들은 박수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음식과 물을 건네며 수술이 성공하길 기원한다는 응원도 건넸다.

세상은 삭막했지만 그래도 아직 살 만한 곳이었다.

중간에 우리를 마땅하게 여기는 중년 사내가 빈정거리는 사건이 발생하긴 했으나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모든 칸에 인사를 한 후 우리는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야 마음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기증자의 심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본원에 연락을 하기도 했다.

심장은 허혈 없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운명을 거슬러 정화를 살리고 싶었던 내 마음과 노력이 결국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심장이 무사히 이동하는 데 도움을 준 많은 사람의 염원 덕분일까.

아이스박스는 결국 멀쩡하게 본원에 전달되었다.

기증자의 심장은 소아 심장 수술의 대가인 박정률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나 정화의 가슴속에 새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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