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제2장 해결사(4)
이거 야단났구나.
무언가 터져서는 안 되는 일이 터져 버렸구나.
처치실에 들어가 수간호사 윤명희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하수진은 깨달았다.
심상치 않은 불행이 자신에게 닥쳐오리라는 것을.
윤명희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으며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안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윤명희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을 때만 보이는 태도였다.
하지만 윤명희가 왜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하수진은 알 수 없었다.
처치나 투약 실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환자나 보호자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후임 간호사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편이긴 했지만 윗사람 앞에선 별로 티를 내지 않았다.
윤명희가 화가 났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에 하수진은 불안해졌다.
간호사 경력이 쌓인 후 업무에서 통제권을 잃은 느낌은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하기도 했다.
“두말하면 입 아프니까 네 눈으로 직접 봐.”
윤명희가 휴대폰을 던졌다. 성의 없이 던진 휴대폰이 하수진의 명치를 때렸다.
“아악!”
명치가 묵직하게 아파 왔지만 하수진은 뭐라고 말도 못했다.
그저 윤명희가 시키는 대로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동영상을 재생했다.
“…….”
동영상을 확인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팔다리는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어제 근무 중 신환(병원에 처음 온 환자)을 학대했던 장면이 동영상에 고스란히 찍힌 것이다.
어린 환자의 팔뚝을 꼬집고, 뺨을 꼬집고, 환자의 어깨를 불량배처럼 툭툭 쳤던 장면 말이다.
동영상이 존재하는 한 하수진이 도망칠 곳은 없는 듯했다.
순간 시야가 노랗게 보였다.
이 끔찍한 불행과 불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 괘씸한 동영상을 촬영한 사람은 누구일까.
하수진은 몸과 마음과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
그것은 그녀가 앞으로 보내야 할 나날들이 지옥행이라는 점이었다.
“하수진, 그 잘난 입도 오늘은 쉬는 날인가 보구나.”
“…….”
“하긴, 이런 영상까지 찍혔으면 천하의 사기꾼이나 범죄자도 변명을 못하겠지.”
윤명희가 하수진을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윤명희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하수진의 가슴을 찢고 상처를 벌려 놓았다.
“잘못했습니다, 수간호사 선생님. 다 제 잘못입니다.”
하수진은 고개를 더 숙이며 사과부터 했다.
문제가 터졌을 때 그녀만의 해결법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1초라도 빨리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무조건 후자를 택해야 했다.
환자 학대 동영상이 그녀에겐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아이가 시끄럽게 울어서 다른 병실에 피해가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게좋게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는 바람에… 결국 손을 쓰게 되었습니다.”
“…….”
“물론 이건 다 제 핑계일 뿐이겠죠. 수간호사 선생님께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보호자분을 만나서 따로 사과의 말씀도 드리겠습니다.”
하수진은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낸 뒤 속으로 방긋 웃었다.
이번 학대 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나름 성의 있고 진실성 있는 답변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못에 대한 뉘우침.
환자를 학대했던 이유.
앞으로의 사죄 방향 등등.
그리 길지 않았던 해명에는 필요한 것들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이 정도면 윤명희도 모른 척 넘어가 줄 수 있지 않을까.
하수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런 희망을 가져 보았다.
“하수진.”
윤명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수진의 이름을 불렀다. 하수진은 앞으로의 추이를 예상하며 바짝 긴장했다.
“네, 수 선생님.”
“네가 방금 본 동영상을 내게 보여 준 사람 있잖아.”
“네.”
“그 사람이 말해 주더구나. 네가 진심으로 뉘우치는 척하면서 내 동정심을 자극할 거라고. 진짜 그 말대로 됐네?”
“…….”
“미리 언질을 안 들었으면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지 뭐니?”
윤명희가 전한 충격적인 소식에 하수진은 혼란스러워졌다.
윤명희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윤명희를 설득할 수도 있었다는 것 아닌가.
위기를 해쳐 나갈 기회가 코앞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하수진을 괴롭게 만들었다.
“또 그 사람이 말하더구나. 네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쳤는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
“그래서 판단의 몫은 학대를 당한 환자의 보호자가 내려야 한다고 말이야.”
“…….”
“지금 당장 병실로 가서 네 손으로 그 동영상을 보호자에게 보여드려. 보호자에게 용서를 받아 온다면 나도 이번 사건은 너그럽게 넘어가 줄 테니까.”
윤명희가 선심을 쓰듯 말했지만 이는 사실상 하수진을 단두대에 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기 자식을 학대한 간호사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여 줄 보호자는 없었다.
더군다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해 당시 동영상을 직접 보여 준다?
이건 드넓은 광장에서 돌팔매질을 당하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느낀 하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짭짤하고 비릿한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 * *
그 날 저녁, 오후 7시.
정규 수술 스케줄을 모두 소화한 나는 병동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이믿음, 오늘은 너답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같이 수술방에 들어갔던, 지금 내 곁에서 걷고 있는 3년 차 레지던트 오창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를 향한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말대로 오늘 내 어시스트 평소만큼 빠릿하지 못했다.
“혹시 컨디션이 안 좋아?”
“컨디션이야 매일 안 좋아서 특별할 것도 없는걸요.”
“그럼 혹시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디? 뭔가 시무룩해 보이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에요, 오늘은 커피를 안 마시고 들어와서 집중력이 조금 떨어졌나 봐요.”
나는 대충 둘러댔다.
사실 수술에 집중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하수진 때문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수간호사를 독대한 하수진이 앞으로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느냐였다.
나는 하수진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뒤 평소처럼 근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건 하수진에게 최고의 엔딩이고 내겐 최악의 엔딩이었으니까.
‘뜻대로 풀렸으면 좋을 텐데…….’
혹시나 모를 끔찍한 미래를 대비해 나는 하나의 장치를 마련해 두기는 했다.
오전에 수간호사와 대화를 나누던 당시.
하수진이 어떤 인간인지, 어떤 방식으로 수간호사를 구워삶아 먹을 것인지 미리 언질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마련한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했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랜만에 식당에서 저녁 먹고 올라갈까?”
“네, 좋습니다.”
나는 오창석과 함께 오랜만에 지하 2층 직원 식당을 찾았다.
늘 라면 빵, 삼각김밥, 초코바 따위로 배를 채우다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니 위장이 감격했다.
음식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세상 모든 일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던데, 왜 우린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지 모르겠다.”
먼저 식사를 마친 오창석이 신세 한탄을 했다.
나는 무슨 말이든 위로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흉부외과와 소아 흉부외과.
두 과의 사정은 앞으로 나빠지면 나빠지지 좋아질 일은 없었다.
전생을 살고 과거로 돌아온 내 경험담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거짓 위로와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때로는 희망도 사람을 다치게 하는 법이니까.
이런 때는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 유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지금 삼겹살이 제일 먹고 싶어요.”
“나는 곱창에 소주. 내가 단골인 곱창집 있는데 안 가 본 지가, 아니 못 가 본 지가 3년째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소아 흉부외과 생활의 고충을 토로하며 병동으로 복귀했다.
원래 흉부외과 생활의 8할은 신세 한탄과 넋두리, 푸념으로 이루어지는 법이었다.
오창석이 케이스 발표 준비를 하겠다며 회의실을 찾았고, 나는 스테이션을 향했다.
마침 김빛나가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선생님, 출근하셨네요?”
“아,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건네자 김빛나가 화색을 띤 채 말했다. 그녀의 밝은 표정에서 나는 희망적인 징조를 읽어 냈다.
“제가 오전에 간호사실에 폭탄을 떨어트렸거든요? 결과를 좀 듣고 싶은데요.”
“저도 인수인계할 때 다 들었어요. 선생님이 수진 선생님한테 크게 한 방 먹였다고.”
김빛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간호사에게 불려 간 하수진은 무려 1시간 동안 갈굼을 당했다고 한다.
처치실을 나올 때는 얼굴이 도화지처럼 하얗게 질렸대나 뭐래나.
하지만 메인 이벤트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수진은 학대를 가한 소아 환자의 보호자를 찾아가 본인의 학대 동영상을 직접 틀어 주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물론 그 과정이 쉽고 간단할 리 없었다.
보호자에게 용서를 구하던 하수진은 보호자에게 머리끄덩이를 붙잡히고 뺨도 얻어맞았단다.
하수진이 소아 환자를 육체적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인과응보였다.
그래서일까.
하수진이 당한 수모가 안쓰럽기보다는 깨소금 맛이었다.
“수간호사 선생님도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호자에게 학대 동영상을 직접 보여 주라는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보호자에게 가해 영상을 보여 주고 용서를 구하라는 것은 내 아이디어였다.
하수진을 엿 먹이기 위해 고민한 인생의 역작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보호자를 찾아간 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당연히 용서는 못 받았고요. 보호자는 하 선생님 고소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죠. 간신히 보호자 진정시키고 시간 때우다가 퇴근했어요.”
“…….”
“이거 한 장 남기고.”
김빛나가 서랍장에서 꺼낸 봉투는 사직서였다.
결국 하수진은 굴욕을 견디지 못해 병원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앞으로 밉상 하수진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나는 속이 후련했다.
그러고 보니 회귀를 한 나는 병원 내 악당들을 물리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순환기 내과에서는 김슬기를 쫓아내고, 소아 흉부외과에서는 하수진을 쫓아냈으니까.
이 감각과 노하우를 살려서 강태섭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 선생님 얼굴이 환해 보이네요. 이제 좀 살겠죠?”
“네, 하 선생님이 사직서를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벌써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에요.”
“원래 천국과 지옥은 따로 있는 게 아니래요. 좋아하고 편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고, 미워하고 꼴 보기 싫은 사람하고 있으면 그곳이 지옥이라죠.”
“그거 멋있는 표현인데요? 나중에 써먹어 봐야겠다.”
생기발랄한 기운을 뿜어내는 김빛나와 대화를 나누며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간호사들을 태우던 하수진이 스스로를 태우며 장렬하게 병원을 떠났다.
그러니 김빛나는 전생처럼 태움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이유가 없었다.
김빛나와 대화를 마친 나는 당직실이 아닌 병실을 찾았다.
오늘 하루 병동의 뜨거운 감자였던 병실로 찾아갔다.
하수진이 환자를 학대하고, 당시 상황이 동영상에 찍히고, 보호자가 하수진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던 병실로.
“하루 종일 심란하셨을 것 같습니다. 병동의 스태프 중 한 명으로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는 보호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보호자가 토로하는 분노와 배신감을 공감하며 들어 주었다.
내 자식이 병원 간호사에게 육체적인 학대를 당했다면 나 역시 참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 보호자와 충분한 라포를 쌓은 뒤 나는 보호자에게 한 장의 명함을 내밀었다.
고교 동창 곽도안의 아버지이자 동시에 변호사인 곽준호의 명함이었다.
하수진이 단순히 병원을 퇴사하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 몹쓸 간호사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시겠다고 하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