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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08화 (108/257)
  • 108화 제2장 해결사(3)

    “이거 봐 봐. 진짜 미쳤다니까?”

    회의실에 도착하자 김준호가 호들갑을 떨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앞뒤 문맥이 다 잘려 있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김준호가 이렇게 흥분한 이유와 휴대폰을 건네는 이유까지도.

    아마 근무 중 하수진을 관찰하면서 건수를 잡았겠지.

    손꼽아 개봉을 기다렸던 영화를 보듯이 나는 액정 화면에 떠오른 동영상을 재생했다.

    현재는 2005년도라서 휴대폰으로 촬영된 동영상은 화질이 좋지 못했고 선명도 또한 떨어졌다.

    하지만 동영상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김준호의 촬영 거리와 각도가 훌륭했으니까.

    ‘하… 이런 예상은 좀 빗나가 줘도 괜찮은데.’

    동영상 속 하수진은 울고 있는 소아 환자의 팔뚝을 꼬집고 뺨을 때리는 중이었다.

    보호자와 병원 관계자가 목격했으면 기절초풍할 만행이었다.

    환자를 간호하는 것이 간호사의 일이거늘 반대로 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폭력이 환자 평생의 끔찍한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하수진의 폭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는 금방 겁먹은 표정으로 울음을 멈췄다.

    ‘너도 김슬기만큼 구제 불능이구나.’

    나는 차마 동영상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수진의 은밀한 손찌검이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만큼이나 많은 피해자가 존재했을 것이다.

    몸을 치료하러 병원에 왔다가 마음의 병을 얻어 집에 돌아갔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저렸다.

    동시에 하수진을 향해서는 강렬한 적개심과 분노를 느꼈다.

    간호사의 본분을 잊은 채 소아 환자를 폭행하고.

    폭행을 하고도 뻔뻔하게 자신의 죄를 숨기고.

    주변 스태프들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하수진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전부 뉘우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현시점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응징을 하기로 나는 마음먹었다.

    “나, 갑자기 하수진이랑 같은 인간이라는 게 부끄러워졌다.”

    나는 휴대폰을 김준호에게 돌려주며 한마디 했다.

    “동감이야. 나도 촬영하면서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으니까. 그나저나…….”

    김준호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증거는 간신히 확보했지만 그래도 당장 행동하기엔 껄끄러운 느낌인데?”

    김준호는 앞으로의 활동에 우려를 표했다.

    하수진의 폭행 동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수진을 단죄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수진이 의사가 아닌 간호사라는 점이 첫 번째 걸림돌이었다.

    두 번째 걸림돌은 내부 고발자를 곱게 보지 않는 병원 내 시선 때문이었다.

    병원은 워낙 폐쇄적인 조직이라 내부에서 문제가 터져도 바깥으로 잘 세어 나아가지 않았다.

    당연히 사건이 묻히듯 은폐될 가능성이 높았다.

    나 역시 김준호와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기껏 동영상까지 촬영해서 고발을 했더니 하수진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끝난다?

    월급 조금 깎이고 며칠 자숙했다가 다시 근무를 재개한다?

    그것만큼 맥 빠지고 억울한 일이 없었다.

    하수진은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더라도 합당한 죗값을 치러야 했다.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 테니까. 어쨌든 고생 많았다. 네가 한 건 해 준 덕분에 하수진도 보낼 수 있게 됐으니까.”

    나는 김준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 * *

    다음 날 오전.

    병동 복도에 모여 있던 소아흉부외과 스태프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교수들은 외래나 연구실, 또는 수술실로.

    레지던트들은 당직실이나 회의실이나 수술실이나 중환자실로.

    회진이 끝난 뒤 각자의 자리로 향하는 스태프들의 모습은 어쩐지 짠한 구석이 있었다.

    액션 영화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둔 주인공과 일행이 헤어지는 모습 같다고 해야 할까.

    불쑥 찾아온 낭만적인 감상을 물리치고 나는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전 근무자인 김빛나가 살갑게 아는 척을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조금 일찍 나오셨네요?”

    “인수인계 때문에요. 수진 선생님 인수인계는 오래 걸리는 걸로 유명하거든요.”

    김빛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하수진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은 하수진에게 폭행을 당한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김빛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소아 흉부외과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간호사의 이름은 김빛나였다.

    김빛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사람은 다름 아닌 하수진이었고.

    김빛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하수진의 처벌을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선생님, 아주 조금만 더 버티세요. 제가 수진 선생님을 박살 내 버릴 테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 과격한 발언에 놀란 김빛나의 눈이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졌다.

    “두고 보면 알 겁니다. 안에 수간호사 선생님 계시죠?”

    “네.”

    “수간호사 선생님을 잠깐 뵙고 싶어서 그런데, 이야기 좀 전해 주시겠어요?”

    김빛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내가 할 말을 정리해 두었다.

    하수진의 폭행 동영상을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고 소문이 날까.

    어제 밤새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한 결과 괜찮은 묘수가 떠올랐다.

    작전 A가 먹히지 않았을 때 작전 B로 넘어간다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선생님, 들어오세요.”

    “네.”

    처치실로 들어간 나는 수간호사인 윤명희와 독대를 하게 되었다.

    수 간호란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중 직급이 가장 높은 간호사인데, 대부분 경력이 출중해서 의사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인턴 선생님이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윤명희가 깍쟁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실제로 윤명희는 꾀돌이처럼 생겼으며 일 처리도 꼼꼼하게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소아 흉부외과라는 만만치 않은 병동을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능력은 어느 정도 입증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명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삐딱했으나 나는 딱히 긴장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았다.

    전생의 나는 윗사람 대하는 것을 불편해했으나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분위기와 장단만 맞춰 줄 줄 알면 대화를 풀어 가는 건 오히려 윗사람이 더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생각해 보니까 제대로 인사를 드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요.”

    “…….”

    “정식으로 얼굴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말과는 반대로 윤명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 꿀 발린 말을 아주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수술실에서 쓰는 메스만큼이나 위력적인 것이 혀로 사용하는 메스라는 것을 나는 새삼 느꼈다.

    대략 10분 정도 나는 윤명희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눴다.

    물론 하수진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포석이었다.

    단도직입.

    그러니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방식은 그리 좋지 못했다.

    문제 이전에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사람과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는 게 더 중요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든 일은 결국 사람과 엮여 있으니까.

    “선생님, 만약에 말입니다. 어떤 간호사가 아이들이 시끄럽다고 폭행을 가한다면 어떤 기분이 드실까요?”

    나는 드디어 하수진에 대한 밑밥을 깔았다.

    “그런 쓰레기 같은 간호사는 당장 잘라야죠. 병원에 다시는 발을 못 디디게 만들고.”

    대화 내내 침착한 모습을 하던 윤명희가 처음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그 반응은 나와 김준호가 하수진의 폭행 동영상을 봤을 때와 비슷했다.

    이대로라면 굳이 작전 B로 갈 것도 없이 작전 A에서 끝날지도 모르겠다.

    “역시 수간호사님은 저랑 잘 맞으시네요. 저도 수간호사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 정도면 거의 인간 말종이죠.”

    “…….”

    “그런 의미에서 이거 한번 봐주시겠어요?”

    최후의 작전 개시, 나는 휴대폰을 슬며시 윤명희에게 내밀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를 대신해 동영상을 재생해서 그녀 손에 휴대폰을 쥐어 주었다.

    윤명희의 눈이 커지고, 두 손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서 소아 환자에게 폭행을 가하고 있는 하수진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나와 물고 뜯고 씹었던 간호사가 하수진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이 선생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윤명희의 표정이 180도 변했다.

    소녀처럼 재잘거리던 윤명희는 사라지고 몇십 년 동안 병원에서 살아남은 억척스러운 간호사 윤명희로 돌아왔다.

    그녀의 변신이 나는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됐으니까.

    “제가 그동안 지켜보고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차분하고 또박또박 설명에 나섰다.

    내가 소아 흉부외과 인턴 생활을 하면서 하수진에 대해서 느낀 불편한 점에 대해서.

    첫째로는 인턴 길들이기가 있었고

    둘째로는 동료 간호사 태움이 있었고

    셋째로는 소아 환자 학대에 관한 것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하수진을 음해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관찰한 바를 말해 준다는 느낌을 살리려고 애썼다.

    관점에 따라서는 내가 내부 고발자가 아닌 단순한 고자질쟁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이야기를 듣는 내내 윤명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내 말을 어디까지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표정과 태도를 지켜봤을 때는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동영상도 평소 수진이 행실이 의심스러워서 찍었던 거죠?”

    윤명희가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수진 선생님이 다가가면 유독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으니까요.”

    “아무도 몰랐던 걸 용케 관찰했네요, 이 선생님은.”

    “평소 눈썰미가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거든요. 본의 아니게 수 선생님을 아침부터 심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일이 더 커지기 전해 말해 줘서 고마워요. 수진이 건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

    “이 선생님 직접 저를 찾아오고 동영상까지 찍은 보람을 느낄 정도로. 그 정도면 되겠죠?”

    역시 수간호사는 수간호사였다.

    나와 장단을 맞추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음에도, 내가 그녀를 찾은 이유를 잊지 않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좀 더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욕심인 듯했다.

    하수진의 일은 어디까지나 간호부의 일이었다.

    의사인 내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수간호사의 심기를 자극하는 것도 올바른 선택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작전 B로 넘어가면 될 것이고.

    그때는 정말 이판사판 공사판이 되기는 하겠지만.

    나는 작전 B로 인해 병동 분위기가 진흙탕이 되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수간호사에게 한 가지 당부를 더했다.

    수간호사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수술실 들어가 봐야 하지 않나요? 이야기 잘 나눴고, 그만 가셔도 좋아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아참, 가시는 길에 수진이만 처치실로 들어오라고 해 주세요.”

    내가 처치실을 나오자 스테이션에 있던 간호사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인턴인 내가 수간호사와 대체 무슨 대화를 그렇게 길게 나눴나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들도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병동 간호부에 도사리고 있던 뇌관의 스위치를 내가 과감하게 눌러 버렸다는 것을.

    “수진 선생님, 수간호사 선생님이 선생님을 찾네요.”

    “저를요? 왜요?”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하수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소식 같네요. 빨리 들어가 봐요.”

    하수진을 끝까지 엿 먹이며 나는 병동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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