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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07화 (107/257)

107화 제2장 해결사(2)

흉관 삽관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빠른 속도로 끝났다.

“선생님, 벌써 끝났어요?”

처치가 끝난 뒤 오히려 태풍이가 놀랄 정도로.

약속한 300초보다 내 삽관이 더 빨랐더란다.

메스로 늑간 근육과 흉막을 차례대로 절개한 뒤 나는 흉관을 삽입했다.

흉관과 피부가 맞닿은 부분은 봉합사로 봉합하고, 그 위에 고정 드레싱을 펼쳤다.

국소 마취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을 뿐.

처치만 놓고 보면 모든 과정이 2분 안에 끝난 셈이었다.

곁에서 조마조마해하던 보호자는 흉관 삽관이 끝나자 한시름 덜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간호사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 자리에서 태연하고 담담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내 실력을 알고 믿어 주는 사람 역시 나 하나뿐이었다.

회귀는 분명 기적 같은 축복이었지만 오늘처럼 가끔 나를 외롭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전생의 흉부외과 교수였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태풍이의 기흉을 밝혀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지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어드미션(입원) 오더 낼 테니까 처리 좀 부탁해요.”

“네, 선생님. 바로 처리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간호사와 보호자의 인사가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태풍이를 쳐다보았다. 태풍이는 넋 나간 표정으로 흉관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아픈 건 좀 어떠니?”

“이게 답답한데요, 그래도 숨 쉬는 건 많이 편해졌어요.”

태풍이가 흉관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기흉이란 흉강으로 빠져나온 공기가 폐를 짓누르는 질환인데, 그 공기는 이제 흉관을 따라 배액통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공기가 빠지면서 줄어드는 폐의 압력.

시간이 갈수록 태풍이의 통증은 줄어들 것이다.

“선생님이 덜 아프게 진통제 처방해 줄 거야. 6시간 정도 지나면 통증은 거의 다 사라질 거고. 그때까지 잘 참을 수 있지?”

“네.”

태풍이의 우렁찬 대답을 듣고서 나는 응급실 스테이션을 찾았다.

입원 오더와 가장 기본적인 입원 처방 오더를 내리고 당직실로 돌아갔다.

태풍이 이야기를 하자 홍선아는 깜짝 놀랐다.

엑스레이, 심전도, 피 검사, 청진에서도 별 이상이 없었는데 어떻게 기흉을 확진했냐는 거였다.

“운 좋게 태풍이 가슴 쪽에 침 자국을 발견했어요. 보호자가 한의원 이야기했던 것도 기억했고요. 운이 잘 맞아떨어졌죠.”

나는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홍선아에게 설명하면서 다시 느낀 것이지만 태풍이는 보통 환자가 아니었다.

진단이 무척 까다로운 환자였다.

이번 생에서야 내가 진단을 봐서 간신히 흉관 삽관을 했다만…….

전생의 태풍이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진료는 아마 홍선아가 봤을 텐데, 홍선아가 기흉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나는 힘들 거라고 봤다.

그렇다면 전생의 태풍이가 겪었을 불행을 그려 보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또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돌고 돌아서 결국은 실력인 건가?’

나는 이번에도 단 한 가지의 결론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전생에 내가 놓친 수많은 사람과 인생과 인연들.

태풍이처럼 이번에 새롭게 마주하게 되는 인연들.

그들을 살리는 길은 오로지 의사로서의 내 실력을 키우는 것뿐이라는 것을.

1살부터 갈고닦아 온 연기력과 정치력.

차근차근 다져 놓고 있는 인맥.

이 두 가지 모두 중요하긴 했지만 어차피 모든 것은 의술로 귀결되었다.

정치와 연기력과 인맥은 다른 직업에서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직접적으로 살리는 일만큼은 오로지 의사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브루가다 증후군의 김요한도.

긴장성 기흉으로 쓰러진 김지원의 오빠도.

의대 OT 때 마주친 교통사고 환자들도.

돌이켜 보면 예전부터 나는 내 의술로 주변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져 냈다.

태풍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귀를 통해 얻은 노련한 감별진단으로 기흉을 확진하고 적절한 처치를 했다.

결국 언제 어디에 있든지 내 의술을 갈고닦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인 것이다.

“어쨌든 잘했어. 나였으면 그냥 돌려보냈을 텐데, 네가 꼼꼼하게 봐준 덕분에 살았네?”

홍선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그러니까 선배가 한턱 쏘셔야 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빵야!”

내가 넉살을 부리자 홍선아가 질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총 쏘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서로의 장단을 맞춰 준 뒤 우리는 한바탕 깔깔깔 웃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일할 때 나올 수 있는 시너지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힘들 때 서로 배려하고

힘든 와중에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 것 말이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사람을 낫게 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어느 책에서 주워들었던 말은 진리였다.

“이따가 간식 사 줄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해 둬.”

“네.”

“그나저나 한의원에서 침 놓다가 기흉이 생겼다는 케이스는 처음이네.”

“저도 이번이 처음이에요.”

“너야 당연히 처음이어야지. 고작 인턴 2달째인데.”

홍선아의 지적에 머쓱해진 나는 한의원을 화제로 그녀와 제법 긴 대화를 나눴다.

태풍이와 비슷한 사례를 병원에서는 의외로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잘못된 부항 치료로 인한 화상, 더 나아가서는 패혈증을 앓았던 케이스.

한약과 병원약을 섞어 먹다가 환자가 간 독성으로 쓰러진 케이스 등등.

병원에서 한의원과 관련된 환자들은 대부분 전개가 좋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 역시 한의원에 호의적인 편은 아니었다.

치료의 근거가 아직 불분명하고 모호하며 연구도 덜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양의학이 완벽하고 절대적이냐고 물으면 똑 부러지게 ‘네.’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나였다.

병원에서도 각종 감염 및 치료 부작용이 생기곤 하니까.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문제의 내용이 한의원과는 퍽 다르긴 할지라도 말이다.

드르르륵.

홍선아와 대화 중 당직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김준호가 나를 응시했다.

“이믿음, 잠깐 나 좀 보자.”

* * *

김준호는 병동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회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시간 전 무척 놀라운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오전 12시.

김준호는 하수진과 함께 한 병실을 들어갔다.

오늘 오후에 수술에 들어가는 환자로 폴리(도뇨관)을 꼽아야 하는 환자였다.

전신마취하에 긴 시간이 소요되는 수술을 할 경우.

소변량을 조절하고 소변 양을 체크하기 위해 환자들에게 도뇨관을 꼽곤 했다.

“선생님, 환자분 아파하시는 거 안 보여요? 좀 살살하세요.”

하수진은 대놓고 김준호에게 핀잔을 주고 꾸짖었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이 다 듣게 금.

이에 자존심이 상했던 김준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젤이 묻은 도뇨관을 내던지고 커튼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오, 솔직히 내가 못하는 건 아니잖아.’

김준호는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인턴 2개월 차가 폴리를 얼마나 많이 꼽아 봤다고 잘 꼽겠는가.

더군다나 지금 처치를 하는 소아 환자는 긴장한 나머지 아랫배와 골반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젤을 듬뿍 발랐음에도 폴리가 요도구까지 들어가지를 못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처치도 익숙하지 않은데 반갑지 않은 변수까지 겹쳐 버렸으니…….

“천천히 심호흡 해 보세요. 손바닥 펴시고 발바닥에 힘 빼시고.”

김준호는 갓난아이를 다루듯이 소아 환자를 어르고 달래서 긴장을 풀어 주었다.

진땀을 흘려 가며.

무려 3번의 시도 끝에 20분의 처치 끝에 환자에게 도뇨관을 삽입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하수진의 잔소리는 끊어질 줄 몰랐다.

오죽하면 처치가 끝나고 나서 귀가 따가웠을까.

“하 선생님,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김준호는 병실을 나오기 무섭게 하수진에게 따졌다.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죄인도 아닌데 죄인처럼 지내는 건 사양이었다.

“뭐가요?”

눈을 똑바로 뜯고 묻는 하수진을 보며 김준호는 단단히 마음의 칼날을 벼렸다.

“다른 환자와 보호자 앞에서 그렇게 저를 면박 주시면 안 되죠. 그럼 제가 뭐가 됩니까?”

“…….”

“선생님이 옆에서 계속 뭐라고 하니까 신경 쓰이고 긴장이 돼서 저도 처치를 잘 못하잖아요.”

가슴속에 묻어 둔 말을 김준호는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간호사 경력 6년 차의 하수진은 생각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제 핑계를 대시는 거예요?”

“네? 핑계요?”

“네, 핑계요. 김 선생님 그렇게 안 봤는데 자기가 처치 못하는 걸 제 탓으로 돌리시네요. 실망입니다.”

김준호가 뭐라고 반격하기도 전에 하수진이 고개를 획 돌리며 스테이션으로 달아났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를 붙잡고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하수진의 뒷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씨발, 뭐 저런 게 다 있지?’

김준호는 씩씩거리며 당직실을 찾았다. 근무 중인 2년 차 레지던트에게 간신히 양해를 구한 뒤 병원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후우우우…….

까맣게 타들어 가는 연기만큼 그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 갔다.

김준호는 하수진이 자신을 병신으로 만들려고 작정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왜, 그런 타입 있지 않는가.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 남을 깎아내리는 타입 말이다.

그렇게 남을 자기 발밑에 둔 뒤 이리저리 휘두르는 타입.

차마 레지던트를 건드릴 순 없으니 하수진은 아마 인턴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녀석 말대로 지금부터라도 건수를 잡아 볼까?’

김준호는 이믿음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믿음은 하수진이 병동 내 말썽꾸러기 환자들을 학대했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김준호는 이믿음의 극단적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수진의 성격이 아무리 더러워도 설마 병동에 있는 소아 환자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그 정도면 인간 실격 사유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근무 내내 하수진에게 탈탈 털리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드라마, 영화, 소설, 만화 등등.

그 어떤 영역에서의 상상력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참혹하고 끔찍한 사건을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구에는 악마가 없다.

왜냐면 지구가 지옥이고, 인간이 악마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런 농담 같은 명언이 다 있을까.

그런 관점까지 생각해 본다면 이믿음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앵앵거리는 게 싫어서 하수진이 아이들을 학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귀찮더라도 어쩔 수 없지.’

각오를 굳힌 김준호는 옥상 입구에 놓인 방향제를 가운에 뿌린 뒤 병동으로 복귀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콜폰과 사투를 벌였다.

동시에 근무 중인 하수진의 동태를 집중적으로 감시했다.

소득 없이 허망하게 흘러가는 시간들.

오늘은 날이 아니라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

김준호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발견했다.

1인실 병동에 입원한 6살 신환 환자가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 보호자가 잠깐 화장실로 가서 자리를 비운 틈에.

하수진은 1인실로 직진하더니 쓱 하고 주변 눈치를 살폈다.

첩보 영화 속 스파이처럼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김준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동영상 촬영 기능 버튼을 눌렀다.

쿵. 쿵. 쿵.

결정적인 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예감에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병원이 너 우는 데야? 조용히 못해? 맞고 싶어?”

동영상으로 촬영하며 목격한 광경은 놀라웠다.

하수진은 아이의 팔뚝을 꼬집고 뺨을 때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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