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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05화 (105/257)

105화 제1장 커튼 콜(5)

오전 11시 30분.

점심 식사를 1시간 앞둔 병동은 조용했다.

환자들은 대부분 맥없이 누워 있었고, 보호자들은 환자 곁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한가하고 평화로운 때라고 하수진은 생각했다.

“홍 선생님이 내린 오더 어떻게 됐어?”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후배 간호사에게 물었다.

“아직 처리 안 됐는데요?”

“아직? 오더를 내린 게 십 분 전인데 아직이라고? 이번 병동 인턴은 못 써 먹겠네.”

하수진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이번에 병동에 들어온 두 명의 인턴, 이믿음과 김준호.

그 둘 중에서 하수진은 이믿음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믿음의 잘생긴 외모와 듬직한 체구에 사심을 품었다기보다는 단순히 일을 잘해서였다.

얼마 전 이믿음이 CVC(중심정맥관) 삽입을 할 때 동행했는데 솜씨가 웬만한 레지던트 뺨을 때릴 정도였다.

인턴에게 제일 중요한 처치인 동맥혈 채혈도 뚝딱 해냈고.

이믿음에 비하면 김준호는 굼벵이나 다름없었다.

일 처리하는 속도나 꼬라지를 보면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근무한 지 이제 막 한 달이 지났잖아요. 이 정도면 잘하는 편 아닐까요?”

“너 지금 인턴 편드는 거니?”

하수진이 도끼눈을 뜬 채 언성을 높였다.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선배 눈에는 한참 부족해 보이겠지만 제 눈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아서요.”

하수진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자 후배가 속사포로 변명을 덧붙였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하수진은 생각했다.

후배나 아랫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자신을 떠받드는 것.

스스로 후배와 아랫사람을 휘어잡는 것 등등.

하수진은 주변 사람을 통제하고 휘두르는 걸 즐겼다.

그럴 때마다 짜릿한 우월감과 강렬한 존재감을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가 간호사를 택한 이유조차 간호사 특유의 태움 문화가 좋아서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태움.

배움이라는 이름 아래 후배 간호사를 잔인하게 괴롭히는 일.

이제는 관습처럼 자리 잡은 불합리한 처지와 대우.

하수진은 간호사가 되면서 합법적으로 후배 간호사를 부릴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했다.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문화처럼 받아들여 주니 감사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선생님! 어디 갔다가 지금 오셨어요? 홍 선생님이 내린 오더 처리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선생님 때문에 병동 일이 마비가 되겠어요. 빨리 좀 처리해 주세요.”

때마침 병동으로 복귀하는 인턴 김준호를 하수진은 쥐 잡듯이 잡았다.

“놀고 있었던 거 아닙니다. 몸은 하나인데 콜이 여러 개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김준호의 창의성 없는 핑계에 하수진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해내셔야죠. 그게 선생님의 일인데.”

“맞아요, 제 할 일이 맞기는 한데 간호사 선생님도 제 처지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거죠.”

“병원에 안 바쁘고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여간 일 처리 좀 빨리 해 주세요.”

하수진은 김준호를 닦달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김준호가 씩씩거리며 당직실로 들어갔지만 무서울 건 없었다.

병원 업무 경력은 고작 한 달이 겨우 지났고

한 달 후에 다른 과로 떠나며 업무 권한이 하나도 없는 게 인턴이었으니까.

인턴은 병원 생태계의 최하위층에 존재하는 초식 동물이었다.

“선생님, 저 라운딩 돌고 올게요.”

“아냐, 됐어. 넌 앉아서 쉬고 있어.”

하수진은 모처럼 좋은 선배인 척하며 솔선수범해서 병실을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후배를 부리는 방식 중 하나였다. 병실을 돌던 하수진은 모처럼 수호가 있는 병실을 찾았다.

보호자가 잠깐 화장실에 갔을까.

수호는 혼자서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수호야, 오늘도 조용히 놀 거지? 선생님이 수호 보러 안 와도 되지?”

수호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수진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병실을 나왔다.

* * *

“뒤를 부탁하지.”

박정렬 교수가 수술 도구를 손에서 놓고 자리를 떠났다.

5세 아이에게 실시한 폐동맥 판막 협착증 복원술의 중요한 부분이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나머지는 3년 차인 오창석과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단순하게 수술 부위를 도로 닫기만 하면 됐으니까.

“올라와.”

“네, 선배.”

오창석이 집도의 자리로, 내가 제1 보조의 자리로 이동했다.

오창석을 도우면서 나는 오늘 수술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최초 절개 부위를 어디로 선택했는지.

어떤 봉합사로 어떤 봉합법을 선택했는지.

돌발 상황이었던 판막 출혈을 막아 냈던 방법은 무엇인지 등등.

처치 하나하나에 이유를 더듬어 보고, 더 나은 처치는 없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 큰 공부가 되었다.

‘그때는 너무 자만했지. 배울 것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나는 전생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동시에 느꼈다.

전생의 나는 부교수가 된 후부터는 실력 발전에 큰 힘을 쏟지 않았다.

웬만한 수술을 할 만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을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회귀를 하고 대가들의 수술을 곁에서 지켜보니 180도 생각이 달라졌다.

내겐 아직 가야 할 길이 길고 넓고 많았다.

다기망양(多岐亡羊).

여러 갈래로 갈라진 학문의 길에서 학문의 끝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도 조금씩 감이 오고 있단 말이지.’

오늘로써 나는 박정렬의 수술을 총 3번 들어왔다.

3번 정도 수술을 경험하자 박정렬이라는 대가가 수술에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박정렬은 속도의 달인이었다.

타 외과의와 비교해 수술 속도가 2배에서 3배 가까이 빨랐다.

물론 그렇다고 수술을 대충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가 수술 속도를 끌어 올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스태프를 믿는 것이었다.

‘저걸 레지던트가 해도 되나?’ 하고 내가 걱정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무려 심장 판막의 일부를 봉합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박정렬은 스태프를 믿고 중책을 맡겼다.

스태프는 믿음에 보답하듯 깔끔하게 봉합에 성공했고.

전생의 나라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박정렬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박정렬이 수술 속도를 높이는 두 번째 방법.

그것은 최적화였다.

환자별로, 수술 종류별로 박정렬이 가진 최적화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술 도구.

수술창 절개 방법 등등.

이것은 뭐라고 딱 꼬집을 수가 없었기에 내가 통째로 몇 가지 수술을 암기하는 게 최선으로 보였다.

암기한 수술을 모아 놓고 공통점을 찾으면 아마 최적화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까.

소아 흉부외과 수술의 대가와 고수들이 가진 비법을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지금.

나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아직 결정을 내린 건 아니지만 최소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소아 흉부외과에 눌러앉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즐거운 상념 속에 수술이 끝났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환자는 무사하고 건강하게 중환자실로 이동되었다.

“이믿음, 너 인턴 맞아? 인턴의 탈을 쓴 레지던트 같은데?”

휴게실에서 같이 쉬고 있던 3년 차 오창석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그의 농담은 내게 섭섭하고 끔찍하게만 들렸다.

고작 레지던트라고?

나는 전생의 흉부외과 부교수였던 데다가 이번 생에서는 폐·식도 파트 펠로우급 실력까지 갖췄는데?

“하하하, 그런가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동안 내가 본 인턴이 50명이 넘는데 그중에서 네가 독보적이다. 괜히 의대 다닐 때부터 날아다닌 게 아니네.”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캔 커피를 홀짝거리고서 화제를 돌렸다.

“선배는 어쩌다 소아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하셨어요?”

흉부외과보다 더 척박한 소아 흉부외과.

대체 무엇이 오창석을 소아 흉부외과로 이끌었는지 나는 궁금했다.

“그게 궁금해? 들려주면 소아 흉부외과 전공할래?”

“그건 좀…….”

“농담이고. 내가 소아 흉부외과에 온 건 진화 선배 때문이야.”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오창석은 짝사랑하는 한 기수 위의 여자 선배 때문에 소아 흉부외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부족한 인력과 숨 돌리기 힘들 만큼 자주 터지는 응급 상황.

마지막으로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로맨스 같은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지. 진화 선배는 레지던트 2년을 다 못 채우고 일을 그만뒀어.”

“…….”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실제로 하는 일이 많이 달라서 괴리감을 느꼈던 모양이야.”

떠난 김진화를 언급하는 오창석의 표정이 어딘지 쓸쓸하고 애달파 보였다.

흠모하는 여자 선배 때문에 험지인 소아 흉부외과를 선택했건만…….

그 선배가 과를 떠나 버리니 얼마나 황당하고 상실감이 컸을까.

전생의 내 주변에도 김진화 같은 인물은 꽤 있었다.

중간에 전공을 바꾼다거나 과감하게 의원을 개원한다거나 등등.

의사라고 해서 꼭 대학병원 한 과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나야 전생이나, 이번 생에서나 흉부외과밖에 모르는 특이한 바보일 뿐이고.

“연락을 안 한 지 오래돼서 잘살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여유 있을 때 전화해 보세요. 의외로 지금 더 대화가 잘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럴까?”

잡담을 좀 더 나눠 볼까 싶을 때마침 가운에 넣어 둔 콜폰이 울었다.

병동 콜이 아닌 당직실 콜이었다.

“네, 선배.”

-믿음아, 진짜 미안한데 응급실 한 번만 가 줄래? 외래에서 신환이 쏟아지는 바람에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

홍선아가 애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일단 네가 진료해 보고 네가 감당 못할 응급 환자면 바로 나한테 전화 줘. 그러면 괜찮겠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오창석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응급실에 찾아온 환자를 진찰하는 일은 본래 레지던트 1년 차의 몫이었다.

오늘처럼 특별히 일이 바쁘거나.

나처럼 윗 연차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경우에만 인턴이 내려가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오랜만이네.’

어쨌거나 모처럼 진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인턴의 업무가 단순 반복 노동이라면 진료는 좀 더 적극적인 의료 행위였으니까.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암기해 둔 환자 번호부터 검색했다.

진료에 앞서서 응급의학의가 기록해 놓은 의무기록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환자의 나이는 12세.

이름은 장태풍.

C.C(chef complain, 주 호소)는 흉통과 호흡 곤란.

불행인지 다행인지 흉부 엑스레이상에서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심전도상에서 빈맥이 측정되었으나 의미 있는 데이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병원이라는 낯선 환경 탓에 혈압이나 맥박이 평소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단 직접 봐야겠네.’

나는 간호사에게 환자의 위치를 물어본 뒤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향했다.

환자가 단순히 통증에 민감해서 응급실을 찾은 것인지.

지금까지 실시한 검사만으로 잡아낼 수 없는 질병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잠시 후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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