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103화 (103/257)

103화 제1장 커튼 콜(3)

김빛나.

흔하게 접할 수 없는 이름을 통해 나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시점은 지금처럼 딱 인턴을 할 때쯤으로.

아마 정형외과에서 수련 도중이었을 것이다.

짝궁 인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가 태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나는 창창한 청춘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동시에 간호사의 극단적인 선택을 순순히 납득하기도 했다.

간호사의 군기는 군대만큼이나 살벌하고, 간호사의 가혹 행위 역시 군대만큼이나 살벌했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다른 직업에 비해 이직률과 퇴사율이 높은 것도 다 태움에서 비롯되었다.

짝궁 인턴에게 들었던,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간호사의 이름이 나는 빛나였던 걸로 기억했다.

-딱하게도 결국 이름대로 빛나지는 못했구나.

그래서 이런 말을 짝궁 인턴에게 건넸던 기억도 났다.

전생의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그 빛나가 이 빛나라고 한다면 말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빛나의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닥쳐올 비극을 내가 막아 주고 싶었다.

김빛나가 전생의 남초롱처럼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지 않고.

현생의 남초롱처럼 세상에서 제 몫을 다하며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어쩌면 회귀를 통해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사람들의 숨겨진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그 환자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수술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 사람의 부탁을 거절했으면 어땠을까 등등.

이번에는 김빛나의 숨은 사연을 확인할 차례였다.

“선생님,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닙니다. 선생님 미모가 너무 눈부셔서 그만…….”

나는 너스레를 떨며 농담도 던졌다.

내 행동이 재미있었는지 김빛나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녀의 반응에서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웃을 수 있다는 건 아직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김빛나 구제에 필요한 시간이 당장 처리해야 할 만큼 촉박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선생님, 아침 일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아침 일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오늘 오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었다.

“선생님이 첫 출근해서 스테이션에 인사했을 때 다 무시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아, 이제 기억나네요. 맞습니다.”

그때를 떠올리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 인사를 대놓고 무시하는 오전 근무 간호사들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때 말이다.

어쩜 그렇게 짠 듯이 나를 무시하고 냉대할 수 있었을까.

나는 첫 출근이라 그들에게 밉보일 행동은 할 수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설마 내가 전생의 원수라도 된단 말인가.

“그런데 그걸 왜 김 선생님이 사과하죠?”

“어쨌거나 스테이션에서 간호사들이 벌인 행동이니까요.”

김빛나는 나만 알고 있으라며 비밀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우울해 보이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줬더니 그 관심이 고마웠던 모양이었다.

“그거 다 하 선생님이 시킨 거예요.”

“하 선생님이요? 성깔이 고약한 건 아는데, 설마 그 정도예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수진이 상대라면 나도 맺힌 원한이 있긴 했다.

오늘 오전 미란이에게 CVC(중심정맥관) 라인을 잡을 때 옆에서 깐족거렸기 때문이다.

-1년 차 선생님 모니터링 없이 선생님 혼자 할 수 있어요?

-실패해서 수술 시간 딜레이 되면 책임지실 거예요?

보호자 앞에서 나를 실력 없는 의사로 깎아내리는 바람에 진땀을 뺐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싸가지 없는 인성이 설마 거기에까지 미쳤다고?

“인턴들은 처음 볼 때부터 기를 죽여 놔야 된다는 게 하 선생님의 지론이에요.”

“…….”

“그래야 병동 콜도 편하게 할 수 있고 부려 먹기도 편하다고요.”

김빛나가 전해 준 정보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러니까 인턴의 기강을 잡겠다고 일부러 아침에 인사를 씹었다는 소리 아닌가.

이렇게 창의적으로 쓰레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니…….

이제는 하수진의 악행에 분노하기보단 감탄이 먼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면 다 말이 되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수진은 인성이 바닥인 간호사다.

하수진의 태움으로 인해 김빛나는 전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런 느낌이 될 것이다.

“김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하 선생님, 오전 근무 아닌가요? 왜 저녁 근무를 또 서고 있죠?”

나는 합리적인 질문을 던졌다.

오전에 근무였던 하수진이 밤 근무를 또 하고 있으니 이상했던 것이다

“책임 간호사님이 중요한 모임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대신 근무를 서겠다고 했어요.”

“…….”

“막상 그래 놓고 자기가 일은 하기 싫었는지 퇴근해야 하는 저를 붙잡고 있네요.

말을 마친 김빛나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하수진 때문에 고통받는 게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아차렸다.

“만화나 영화 속 슈퍼 히어로는 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 선생님 같은 악당 안 잡아가고.”

내 농담에 입을 가리며 웃는 김빛나.

그녀의 환한 웃음은 그녀의 이름만큼 빛이 났다.

나는 그녀의 이름과 웃음을 다 지켜 주고 싶었다.

“앞으로도 종종 저랑 하 선생님 뒷담화나 하죠. 비밀은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약속.”

김빛나와 대화를 마친 나는 병동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순환기 내과에서 레지던트 1년 차 김슬기를 물리쳤다면 소아 흉부외과에서는 간호사 하수진을 물리쳐야 할 모양이었다.

상대가 간호사라면 어떤 방법이 효과적일까.

* * *

소아 흉부외과 당직실.

모처럼 찾아온 여유 시간을 나는 만끽하고 있었다.

우선 김용 교수가 새롭게 보내 준 심전도 그래프와 판독지를 살폈다. 이어서 오늘 어시스트를 들어갔던 수술들을 복기하고 질문을 던져 보고 관련된 논문을 뒤져 보았다.

전생에 괜찮은 흉부외과 부교수였기 때문일까.

양순재 교수님 덕분에 폐·식도 파트에 대한 이해도까지 높아졌기 때문일까.

소아 수술을 이해하고 흡수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용을 부린다면 지금 당장 내 손으로 같은 수술을 집도해도 충분히 소화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공부를 마친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시간은 자정.

1시간 전부터 병동 콜은 뚝 끊긴 상태였다.

아무래도 소아 병동은 성인 병동보다는 입원 환자가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숨을 돌릴 여유가 가끔씩 존재했다.

“선배님, 바쁘세요? 제가 뭣 좀 도와드릴까요?”

나는 옆자리에서 타이핑 중인 홍선아에게 물었다.

2년 차 레지던트임에도 막내에 1년 차처럼 업무 중인 그녀가 딱하게 보였다.

“마음만 받을게. 믿음이 너까지 힘들다고 도망쳐 버리면 진짜 곤란해진단 말이지.”

“도망이요? 제가요?”

“…….”

“제가 좋아하는 건 희망이고요, 건망증이 조금 있긴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고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피망이죠.”

나는 망자로 끝나는 단어를 나열하며 문장을 만들어 냈다.

비록 순환기 내과에서는 내 언변과 유머가 멸시받았지만 소아 흉부외과에서는 꽤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아까 대화를 나눴던 김빛나도 그랬고.

그래서 유머러스한 외과의가 되자는 목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와우, 뭐야 방금 그거? 혹시 힙합 좋아하니?”

“힙합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즉흥적으로 해 봤습니다.”

“느낌 있네. 나중에 행사 있을 때 장기자랑에 나가 봐.”

홍선아가 적극적으로 나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내 유머를 좋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홍선아는 호시탐탐 나를 소아 흉부외과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드르르륵.

홍선아와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김준호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오늘 당직 근무는 내가 아닌 김준호였다.

나는 그저 심전도와 수술 공부를 하기 위해 당직실에서 머물렀던 것뿐이었다.

“라운딩 끝났어?”

“네, 선배. 영환이 체온이 살짝 높은 거 빼면 문제없습니다.”

홍선아의 질문에 김준호가 대답했다.

“이믿음, 넌 안 자고 뭐 해?”

“네가 무사하고 건강하게 돌아오길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지.”

“뭐래? 내가 무슨 전쟁터라도 나갔다 온 줄 알아?”

“병원이 전쟁터가 아니면 어디가 전쟁터인데? 병원만큼 사람이 죽고 다치는 곳이 또 있나?”

“그건 인정.”

내 촌철살인에 김준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 정말 죄송한데 믿음이 데리고 옥상 한 번만 올라가도 될까요?”

“담배 피우게?”

“…네.”

“편하게 갔다 와. 오는 길에 간식거리도 좀 사 오고.”

홍선아가 의국 회비를 걷어서 만든 카드를 내밀었다.

김준호가 카드를 챙겨서 옥상으로 향했고 나는 김준호의 뒤를 따랐다.

자정이 넘은 시각, 병원 옥상.

새벽 봄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뺨을 때리고 의사 가운을 펄럭거리며 희롱했다.

하지만 그 얄궂은 바람마저 나는 반가울 지경이었다.

인턴으로 지내다 보면 바깥바람을 쐬는 것조차 희귀한 일이 되어 버리니까.

나는 언제부터인가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굴이 둥그런 보름달이 떠 있었다.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풍경이 보기에 좋았다.

찰칵.

“후우우우, 근데 하수진이라는 간호사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김준호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운을 뗐다.

“사람 알기를 완전 개똥으로 알던데? 병동 콜도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조금이라도 처치나 검사가 늦으면 막 선배한테 이르더라?”

“너도 당했구나. 그 간호사 보통내기가 아니긴 하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내가 하수진에게 당한 것은 새 발의 피였다.

나는 수술방 어시스트라서 하수진과 부딪칠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동 어시스트인 김준호는 나와 사정이 달랐다.

김준호는 적어도 하수진이 근무하는 시간 동안에는 하수진을 피할 수 없었다.

신데렐라가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듯 모진 구박을 견뎌 내야 했다.

“너 설마 여기까지 계산하고 병동 어시스트 한다고 한 거 아니야? 이거…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데?”

가자미처럼 가늘어지는 김준호의 두 눈.

“그럼 원래대로 반반씩 하던가. 난 상관없어.”

“에이, 그냥 농담 삼아 해 본 말인데 왜 또 그러실까.”

내가 강하게 나가자 김준호는 금방 설설 기었다.

수술방 어시스트는 2시간에서 길게는 8시간까지 꼼짝없이 서 있어야 했다.

수술 중인 교수와 레지던트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 앉을 수도, 잘 수도, 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수술방 어시스트보다 병동 어시스트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미칠 듯이 바쁘긴 하지만 나름 시간이 잘 가고 최소한 앉아 있을 수는 있으니까.

수술방 어시스트를 좋아하는 나 같은 별종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쨌거나 하수진한테 당하기만 하니까 억울해 죽겠다. 그 인간 골탕 먹일 방법,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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