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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102화 (102/257)
  • 102화 제1장 커튼 콜(2)

    수술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ASD(Atrial Septal Defect).

    승모판 역류를 동반한 심방중격결손에서 승모판을 성형하고 심방중격결손을 메워 준 뒤 수술은 거꾸로 가기 시작했다.

    열었던 절개창을 닫고.

    지혈을 위해 사용했던 거즈들을 제거하고 등등.

    수술 부위를 원상 복구하는 도중 모든 스태프가 마음을 졸였던 단 한 순간이 있었다.

    바로 인공 심폐기 연결을 해제하는 순간이었다.

    인공 심폐기가 떠나고 미란이의 심장이 다시 뛰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심폐기 오프. 환자 정상 환류 시작합니다.”

    인공 심폐기사의 한마디가 수술실에 울렸다.

    이윽고 기계 환기 중이던 체내 혈액들이 다시 미란이의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박동하며 신체 구석구석으로 피를 뿜어냈다.

    물론 수술에 직접 참여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나는 미란이의 심장이 전보다 더 강해진 것처럼 느꼈다.

    ASD 결손 치료는 완벽했으며

    승모판은 치환술이 아닌 성형술로 진행됐다.

    미란이는 평생 항응고제를 먹을 필요도 없었고, 식이 섭취에 고통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갖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수술은 무사히 끝난 것이었다.

    이제 미란이에게 남은 숙제는 딱 하나.

    그것은 미란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혈압은 129mmHg/84mmHg이고 다른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마취의의 보고에 박정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 같았던 그도 수술이 끝날 때가 되자 피곤해 보였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무리는 창석이 네게 맡기마.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콜 하고.”

    “네, 교수님.”

    “아, 그리고 이믿음.”

    박정렬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오늘 어시스트, 아주 훌륭했다. 인턴이 아니라 노련한 레지던트 같더군.”

    “…….”

    “앞으로 내 수술 어시스트 인턴은 웬만하면 네가 서라.”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박정렬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희소식이었다.

    더 나아가 그와 친분을 쌓는다면 박정렬의 다양한 수술 노하우와 인맥을 흡수하고 처치도 적극적으로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무작정 힘을 숨기는 것.

    적재적소에 힘을 드러내는 것.

    나 잘났다고 힘을 아무 때나 사용하고 다니는 것.

    그중의 으뜸은 아무래도 두 번째 것이었다.

    무작정 힘을 숨기면 사람들이 내 진가를 못 알아주고.

    나 잘났다고 설치고 다니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 마련이었다.

    회귀로 현명해진 나는 그 중간에서 탁월한 균형을 잡으며 활약하고 있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전생에서도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이믿음, 올라와.”

    “네, 선배.”

    3년 차 오창석이 집도의 자리로, 내가 오창석이 섰던 제1 보조의 위치로 이동했다.

    수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끝나면 집도의는 대개 자리를 떠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응급 수술 또는 다음 수술을 위한 체력 안배.

    레지던트에게 수련 기회 제공 등등.

    그러니 집도의가 수술을 직접 마무리 짓지 않는 것을 유령 수술과 비교하면 곤란했다.

    “아까 제2 보조 할 때 보니까 딱히 해 줄 말은 없을 것 같더라. 어시스트, 왜 이렇게 잘하냐?”

    오창석이 감탄하며 물었다.

    원래 흉부외과 부교수였는데 기적처럼 회귀를 했고 등등.

    하고 싶은 말도, 해 주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그 말들은 전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들이기도 했다.

    회귀.

    이 단어는 평생 내 가슴에만 묻혀 있어야 하는 단어였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집중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봅니다.”

    “그런 수준은 이미 넘어선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나머지도 잘해 보자고.”

    “네.”

    나와 오창석은 둘이서 오붓하게 수술 부위를 닫기 시작했다.

    * * *

    소아 흉부외과에서 처음 실시한 수술 어시스트는 대성공이었다.

    수술은 별 탈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고, 미란이는 건강했으며 나는 활약한 기회를 얻어 박정렬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만들어진 것이다.

    -박정렬의 수술 기술과 노하우를 모조리 흡수한다.

    -그것들을 성인 흉부외과 수술에 접목시키며 소아 흉부외과가 인력난으로 고생할 때는 내가 대신 수술을 맡기도 한다.

    내 야무진 꿈은 그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져지고 있었다.

    수술이 끝난 후 나는 오창석과 당직실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라면에 삼각 김밥, 단출한 메뉴였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수술 어시스트를 하는 동안 밀린 처방들과 처치들이 산더미였다.

    그것들을 해치우려면.

    그것들에게 깔려 죽지 않으려면 1분 1초라도 시간을 아껴야 했다.

    타다다닥.

    나는 내일 퇴원하는 환자들의 처방을 미리 내려놓았다.

    오늘 받아야 하는 검사 동의서를 출력하고 진단서를 필요로 하는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진료 의뢰서도 작성했다.

    숨 가쁘게 작업을 하는 40분 동안.

    짝궁 인턴 김준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스테이션 콜에 시달리며 병원 이곳저곳을, 병실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겠지.

    보통 회사는 직원이 자리에 보이지 않으면 농땡이를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곤 하는데 병원은 반대였다.

    자리를 비웠으면 고생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특히나 인턴은 말이다.

    “난 중환자실 처치하러 간다.”

    “다녀오세요, 선배.”

    오창석이 당직실을 떠나자 그 자리를 홍선아가 채웠다.

    그런데 홍선아가 평소 같지 않았다. 밝고 쾌활한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우울해 보였다.

    눈가는 부었고, 눈동자는 충혈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심경 변화를 일으킨 이유를 나는 알 것도 같았다.

    “선배, 괜찮아요?”

    “응? 뭐가?”

    홍선아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뗐으나 내 노련한 관찰을 피할 순 없었다.

    “사망 선고 하고 오신 거 아니에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부엉이처럼 휘둥그레지는 홍선아의 눈동자.

    “선배가 갑자기 서글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사망 선고란 의사가 환자의 공식적인 사망을 선언하는 일로, 몸이 아닌 마음이 가장 아픈 작업 중 하나였다.

    전생에서 나는 흉부외과 1년 차에 첫 사망 선고를 하게 되었다.

    마음이 여렸던 내가 차마 첫 사망 선고를 하지 못하자 2년 차 선배가 대신해 주었던 기억이 있었다.

    “선고, 이번이 처음이셨어요?”

    “아니, 이번이 3번째였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돼.”

    홍선아는 마치 자신의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그 애달픈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지 못했다는 무력감.

    보호자를 향한 죄책감.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등등.

    사망 선고란 군 입대와 비슷해서, 피할 수 있다면 피할 수 있을 때까지 미뤄 두고 싶은 것이었다.

    “한잔하세요.”

    나는 냉장고에서 꺼낸 커피를 홍선아에게 내밀었다.

    전생이었다면 어설프거나 섣부른 위로를 건넸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도 그만인 말이 있고, 안 해도 그만인 말이 있다.

    경험상 그런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마워.”

    “이번에 나온 신제품이래요. 많이 달긴 한데 선배 입에는 오히려 잘 맞을 거예요.”

    “우와, 커피가 아니라 설탕물인 줄 알았네. 그래서 내 스타일이지만.”

    “그럴 줄 알았어요.”

    캔 커피를 홀짝거리는 홍선아는 다소 진정이 된 것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아서 바쁘게 오더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기운을 차려 볼까?’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둔 가족사진을 꺼내서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인턴으로 병원에 출근하기 전날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 아래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원.

    사랑하는 가족들이 V 자를 그리며 방긋 웃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 역시 미소가 떠올랐다.

    가족사진을 영양제로 삼아 나는 없던 힘을 냈다.

    “선배, 저 다음 수술 어시스트 들어갈게요.”

    “고생해.”

    홍선아의 인사를 받으며 수술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오후 수술의 집도의는 임흥국 교수였다.

    앞선 박정렬 교수가 심장 질환 수술의 대가였다면 임흥국 교수는 폐 질환 수술의 대가였다.

    환자는 생후 5주의 그야말로 핏덩어리였는데, 선천성 낭종 유선종 기형을 앓고 있었다.

    임흥국 교수는 흉강경을 사용한 섬세한 처치로 낭종을 제거해 냈다.

    수술 시간도 3시간 정도로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소아 흉부외과에서 근무한 지 첫날밖에 안 됐지만 나는 흉부외과와 소아 흉부외과 사이에 놓인 의외로 큰 간격을 발견했다.

    소아 흉부외과는 무엇보다 환자 관리와 수술이 꼼꼼하고 까다로웠다.

    환자가 어리다 보니 수술에 변수가 많이 존재하고.

    그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공을 더 많이 들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스태프가 갈려야 하는 상황.

    이러니 흉부외과보다 소아 흉부외과의 지원자가 더 적을 수밖에…….

    어쨌거나 오후 수술은 흉강경이라서 내가 크게 도울 일이 없었다.

    내 역할은 거의 병풍에 가까웠다. 아니, 병풍보다 못했을지도?

    오전과는 달리 없다시피 한 존재감 속에서 나는 열심히 수술을 지켜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따분해 보일지 몰라도 내겐 피와 살이 되는 시간이었다.

    나는 단순히 넋 놓은 채 수술을 지켜보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 몸은 가만히 있었을지언정.

    내 머릿속은 이미 수술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수술의 순서를 암기했으며 수술의 과정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고 내가 스스로 수술을 하고 있다는 상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이미지 트레이닝은 나를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흉강경을 이용한 선천성 낭종 유선종 기형 제거술이 끝난 뒤.

    나는 곧바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정규 수술 스케줄이 끝났다고 해서 마냥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나도 김준호와 함께 병동 일을 처리해야 했다.

    인턴에게 휴식은 사치이자 죄악이었으니까.

    ‘벌써 이렇게 됐나?’

    문득 시간을 확인하니 현재 시간은 오후 10시 30분이었다.

    창밖에서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병원 주변 건물이 밝은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오늘도 시간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선생님, 아직까지 뭐 하세요?”

    스테이션에 도착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후 근무 간호사가 아직까지 퇴근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스테이션 앞에 앉아 열심히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다른 간호사들은 처치실에서 다른 업무를 하는 것 같았고.

    “퇴근 안 하세요? 퇴근 시간, 벌써 1시간이나 지났잖아요.”

    “그게… 할 일이 남아서요.”

    그녀가 억지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병원 짬밥을 먹을 대로 먹은 내가 그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녀가 추가 근무를 하는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비록 근무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동안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유도신문을 던졌다.

    “하수진 선생님이 또 무슨 일 시켰죠? 안 봐도 비디오네.”

    “어…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귀신 눈은 속여도 제 눈은 못 속입니다.”

    나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근무 중인 간호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김빛나.

    독특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잠깐?

    설마 이 빛나가 그 빛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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