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99화 (99/257)
  • 99화 제5장 소아 다 됐어요(4)

    당직실로 복귀한 나는 수술 스케줄 표부터 출력했다.

    소아 흉부외과의 수술 스케줄은 그리 빡빡한 편이 아니었다.

    오전에 1건, 오후에 2건 정도로 흉부외과에 비하면 널널한 편이었다.

    환자가 소아.

    즉 24개월 이상부터 만12세 미만의 아이들로 한정되어서였다.

    소아 흉부외과는 흉부외과에 비해 응급 수술도 적은 편이었다.

    소아가 자동차를 모는 것도 아니고, 크게 외상을 당할 일도 적으니까.

    그렇다고 소아 흉부외과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됐다.

    다루기 힘든 선천성 심장 질환의 수술.

    성인보다 좀 더 섬세한 수술 스킬 등등.

    소아 흉부외과와는 그저 흉부외과와 다른 방식으로 괴로울 뿐이었다.

    ‘무시무시하네.’

    40분 뒤에 잡힌 수술을 확인하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시스트를 하는 첫 수술이 무려 5시간짜리였다.

    지금부터 커피는 물론이요, 물 한 모금도 먹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인턴이 수술방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욕을 한 바가지로 먹고 미운털까지 박힌다.

    “정말 후회 안 하겠어?”

    내 표정을 읽은 김준호가 말을 건넸다.

    “원하면 지금이라도 반반으로 나눠도 돼.”

    “아니, 나 혼자 해도 충분해. 수고해라.”

    나는 김준호의 배려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당직실을 나왔다.

    5시간의 어시스트, 확실히 질릴 만하긴 했다.

    하지만 회귀한 나는 무뇌 상태로 어시스트를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수동적인 자세를 능동적인 자세로 바꿔 줄 환상의 노하우를 알고 있었다.

    바로 입장 바꾸기와 질문 던지기였다.

    내가 주치의라면 환자를 어떻게 수술하고 어떻게 처치할까.

    주치의는 왜 저기서 저 봉합사를 쓰고 저 봉합술을 택했을까 등등.

    집도의의 수술을 넋 놓고 지켜보는 것.

    반대로 내가 집도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했다.

    나는 후자의 방법을 이용해 소아 흉부외과의 수술법을 흡수할 계획이었다.

    “안녕하세요.”

    401호 병실로 들어간 나는 이미란 보호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미란은 잠시 후 수술을 받을 환자의 어머니였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못 보던 선생님이시네요?”

    “오늘부터 근무하게 됐습니다. 미란이는 좀 어떤가요?”

    “숨 쉬는 걸 많이 답답해해요. 그 이외에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보호자가 미란이를 쳐다보았고, 나도 미란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2살 미란이는 기운 없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 활기차게 걸어 다니며 이 단어, 저 단어를 떠들고 다닐 아이는 무기력한 기운만 뿜어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내가 이렇게 안타까울 정도면 부모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갈까.

    “오늘 미란이 수술 있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선생님. 우리 미란이 별 탈 없겠죠?”

    “집도하는 교수님이 소아 심장 수술의 대가이십니다.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나는 교수의 권위를 이용해 보호자를 안심시켰다.

    궁색하지만 교수의 실력, 신원대학교 병원이 빅5병원 중 하나라는 것.

    아쉽게도 이것 외에는 보호자의 걱정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회귀를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온 나조차.

    -사장님, 이 과일 맛있어요?

    -그럼요, 맛있습니다. 믿고 사 가세요.

    나는 문득 나와 보호자가 방금 나눈 대화가 과일 가게에서 나누는 대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패턴이 정해진, 뻔하디뻔한 대화.

    그렇다고 아예 안 할 수도 없는 대화 말이다.

    “수술 전에 잠깐 처치를 하겠습니다.”

    나는 스테이션으로 이동해 간호사 한 명을 대동해 병실로 복귀했다.

    수술 전 미란이에게 중심정맥관을 삽입해야 했다.

    중심정맥관이란 큰 정맥에 카테터로 수액이나 약물을 주입하는 처치였다.

    중심정맥관 삽입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기에 미란이 같은 소아 환자의 수술에서 중심정맥관 삽입은 필수적이었다.

    “CVC(중심정맥관) 라인 선생님 혼자 잡으시게요?”

    동행한 하수진 간호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중심정맥관은 본래 인턴부터 하는 처치이긴 했지만 보통 레지던트 1년 차가 많이 소화했다.

    난이도가 어렵기 때문이다.

    “순환기 내과에서도 많이 했어요. CVC 라인 잡는 거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습니다.”

    “환자가 성인이 아니라 소아잖아요. 가뜩이나 혈관도 약한데 실패하면 어떻게 책임지시려고요?”

    “…….”

    “선생님 때문에 수술 딜레이 되면 감당할 수 있어요?

    하수진은 여전히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녀가 나를 걱정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하수진이 보호자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수진이 우려를 표한 뒤 보호자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졌다.

    “선생님, 잠깐 나오시죠.”

    나는 병실 바깥 복도에 서서 하수진과 대화를 이어 갔다.

    “보호자 앞에서 들으라는 듯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불안감을 조성하시는 겁니까?”

    나는 하수진의 예의 없는 태도를 지적했다.

    내 실력은 의심할 순 있지만 그걸 보호자 앞에서 티 내는 건 도를 넘은 행동이었다.

    이러면 나만 실력 없는 의사로 낙인찍히니까.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구구절절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하수진은 여전히 나를 깔보며 틱틱거리고 있었다.

    내가 인턴이라서 무시하는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병동에 처음 와서 인사했을 때 인사를 받지 않은 간호사도 하수진 같은데…….

    원래 성격이 삐뚤어진 사람인가?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맞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걱정이 됐으면 지금처럼 복도에 나와서 따로 이야기를 하던가요.”

    “…….”

    “앞으로는 조심해 주세요.”

    “알았어요. 근데 정말 선생님 혼자 CVC 잡는 거죠? 책임도 선생님이 지시는 거죠?”

    끝까지 깐족거리는 하수진을 무시하고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

    대답은 결과로 할 것이다.

    * * *

    중심정맥관 삽관은 고작 5분 만에 끝났다.

    인턴이 했다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정확도와 속도로.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껍데기만 인턴이었고, 알맹이는 흉부외과 부교수였으니까.

    도관은 미란이의 쇄골 하 정맥에 삽입되었으며 관 주변의 봉합 및 드레싱도 말끔하게 완료되었다.

    미란이의 보호자는 그제야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서 처치를 돕던 하수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하수진은 내심 내 처치가 실패하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심보가 얼마나 고약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처치가 실패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건 환자가 아닌가.

    환자의 고통보다 내가 골탕 먹는 걸 더 바랐다는 점에서 하수진의 인성은 이미 실격이었다.

    이런 성질머리라면 주변의 간호사들이나 환자, 보호자들도 많이 피곤할 텐데…….

    하수진이라는 사람을 좀 더 파헤쳐 보자

    기회를 잡아서 따끔하게 혼내 주자.

    나는 속으로 그런 각오를 굳혔다.

    전생의 나는 갈등을 회피하고 모른 척하기 바빴지만 현생의 나는 그렇게 물렁물렁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냅다 들이받는 황소와 같았다.

    순환기 내과의 김슬기도 한 방에 훅 가지 않았던가.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병실을 나오는데 하수진이 영혼 없는 목소리로 나를 칭찬했다.

    듣고 나서도 불쾌한 기분이 드는 칭찬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자신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1년 차 선배를 불렀을 테니까요.”

    나는 내 할 말만 한 뒤 미란이가 누운 침상을 끌고 병동을 벗어나 엑스레이실로 이동했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도관은 쇄골 하 정맥에 잘 삽입되어 있었다.

    아무렴 당연한 일, 삽관을 누가 했는데.

    그 길로 찾아간 곳은 수술방이었다.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고 수술 가운과 모자와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후 수술실로 입장했다.

    “미란아, 이름이 이미란 맞지?”

    “네.”

    미란이의 대답을 듣고서 나는 미란이의 손목에 채워진 입원 팔찌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수술 전 펼치는 타임아웃.

    이것은 수술과 수술을 받는 환자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아주 드물지만 환자가 바뀌어 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무… 무서워요.”

    미란이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미란이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가를 톡 건드리면 눈물이 이슬처럼 떨어져 내릴 것처럼.

    졸지에 어머니와 떨어진데다가 삭막한 수술실에 모르는 사람과 있으니 두려운 게 당연했다.

    나는 환자 감시 장치 연결을 잠시 중단했다.

    안 그래도 이런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비장의 무기가 있지.

    나는 에어샤워로 소독한 휴대폰을 가운에서 꺼낸 뒤 음악 파일을 재생했다.

    -뛰는 게 제일 좋아. 친구들 달려라~ 언제든 행복해~ 말썽쟁이 포로로.

    아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포로로의 주제가를 재생한 것이다.

    음악 파일은 어제저녁 당직을 설 때 미리 받아 두었다.

    “미란아, 이제 기분이 좀 어때?”

    “많이 좋아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힘들지? 나중에 건강해지면 간식도 많이 먹자?”

    “네.”

    수술실에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흘러나오고, 간식으로 유인을 하자 미란이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아마 이게 미란이의 본래 표정일 것이다.

    미란이가 기운을 차리자 나도 기운이 났다.

    나는 환자 감시 장치를 마저 연결하고 순환 간호사와 함께 수술을 준비했다.

    그러고 보니 회귀하고 제대로 된 수술 어시스트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양순재 교수와 실전과 같은 연습을 하긴 했지만 그때는 대상이 카데바였으니까.

    수술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긴장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펼쳐질 수술이 기대가 돼서 그랬다.

    미란이의 집도의는 박정렬 교수.

    선천성 심질 질환 수술의 대가로 불리는 인물로, 전생에서 컨퍼런스 때 몇 번 얼굴을 보고 인사도 나누었다.

    아마 지금은 기억 속의 모습보다 앳된 모습일 것이다.

    성격이야 여전히 괄괄하고 실력도 흠잡을 데 없겠지만.

    박정렬 교수의 집도를 지켜보면서 적극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배울 게 많을 것이다.

    “뭐야? 수술실에 웬 동요?”

    두 명의 레지던트가 수술실에 들어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가 큰 선배가 오창석 선배야, 레지던트 3년 차고. 배가 볼록 튀어나온 게 내 동기 하상태. 상태는 너도 알지?

    나는 인수인계 받을 때 홍선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수술방 어시스트를 맡게 된 이믿음이라고 합니다.”

    “오, 믿음이냐?”

    “네, 상태 선배.”

    “믿음이라면 믿음이 가지.”

    하상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이?”

    “선배가 본과 있을 때 들어온 친구라 선배는 잘 모르시겠지만 꽤 유명한 얘예요. 물론 좋은 쪽으로요.”

    “그러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동요는 뭔데?”

    오창석의 눈빛이 내게 해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미란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동요를 틀었다고 대답했다.

    “인턴인데도 이렇게 세심하다니… 믿음아, 너 소아 흉부외과에 와야 하는 거 아니냐?”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그놈의 생각은.”

    짧은 잡담을 나누면서 전신 마취를 비롯한 수술 준비가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수술실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40대의 의사.

    드디어 집도의 박정렬 교수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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