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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98화 (98/257)
  • 98화 제5장 소아 다 됐어요(3)

    5분 정도를 걸어 어린이 병원 로비에 들어섰다.

    어린이 병원은 본관과는 인테리어부터 달랐다. 노랑색, 파랑색, 초록색 등등 밝고 화사한 톤의 색들이 많이 보였다.

    안내문과 입간판 같은 것에는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병원을 두려워할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서글퍼졌다.

    병원 인테리어는 이토록 밝고 쾌활한데 정작 진료를 보러 온 아이들의 몸과 마음은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밝은 인테리어와 우울한 어린이 환자들.

    그것의 대비는 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잠시 멈춰서 있던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어린이 병원 구조에 익숙해질 겸해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으로 이동했다.

    어린이 병원은 당연히 본관보다 규모가 작았다.

    동선이 길어서 생기는 시간 낭비는 줄어들 듯했다.

    “안녕하세요. 이번 달부터 소아 흉부외과에서 일하게 된 이믿음이라고 합니다.”

    스테이션 앞에 서서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

    “…….”

    돌아온 것은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박수갈채와 열렬한 환호를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일이 바쁘다고 해서 못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인사를 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선생님들, 새로 온 인턴입니다. 당직실이 어디 있죠?”

    “저기요.”

    한 번 더 묻자 가운데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턱짓으로 동쪽 복도 끝을 가리켰다.

    무성의한 대답과 제스처의 끝판왕이었다.

    아하, 그런 스타일?

    나는 단박에 소아 흉부외과 간호사들의 특징을 잡아냈다.

    자기 일에 열심이고 환자와 스태프를 배려하는 간호사가 있는 한편.

    무뚝뚝하고 환자나 스태프를 개똥으로 여기는 간호사도 있다.

    4층 간호사들은 후자인 듯 보였다.

    내가 고작 근무 두 달째인 인턴이라서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기 싸움?

    아니면 신경전을 일부러 유도한 것 같기도 했고.

    다만 싸가지 없는 태도(?)를 문제 삼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당분간은 스테이션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터벅. 터벅.

    나는 병동 복도를 가로지르며 좌우로 펼쳐진 병실을 훑었다.

    어린이 병원이었기에 환자들은 당연히 아이들이었다.

    24개월 이상부터 만 12세 미만의 아이들이었고, 보호자의 대부분은 20대에서 40대의 성인이었다.

    환자도, 보호자도 어리고 젊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병원 생활을 오래 한 나는 죽음의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이란 모질고 혹독해서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는 사실을.

    “선생님, 안녕하세요.”

    복도 중간에서 마주친 아이가 내게 인사했다.

    곁에 있던 보호자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 이름이… 허수현이구나. 반갑다.”

    “네, 선생님.”

    내게 첫 인사를 해 준 수현이의 이름을 나는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이따가 시간이 날 때 왜 입원했는지 알아보면 좋을 것이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당직실로 들어서자 레지던트 2년 차 홍선아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믿음이 네가 이번 달 인턴이었어?”

    “네, 선배. 오랜만에 뵙네요.”

    홍선아와 나는 의대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다.

    우리 둘 다 봉사 동아리 심봉사 출신인데, 봉사 도중에 짝으로 어울린 적이 많았다.

    2년 차가 홍선아라니, 나도 살짝 안심이었다.

    순환기 내과에서 김슬기와 갈등을 빚었던 것처럼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야, 반갑다. 안 그래도 너 일 잘한다고 소문났던데. 이번 달은 안심이겠네.”

    “벌써 그런 소문이 도나요? 일한 지 아직 한 달밖에 안 됐는데.”

    “태곤 선배한테 이야기 들었거든.”

    “아… 그랬군요.”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배태곤 역시 심봉사 출신으로 어제까지 근무했던 순환기 내과의 3년 차 레지던트였다.

    역시 동아리의 힘은, 인맥의 힘은 무섭다는 것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선배, 혼자 계세요?”

    “응, 다들 수술방 어시스트하고 응급실 가고 중환자실 라운딩 하느라 바빠.”

    “혹시… 선아 선배가 아직도 막내인가요?”

    그동안 밝은 모습만 보여 주던 홍선아가 처음으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맞았던 것이다.

    흉부외과 또는 소아 흉부외과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다.

    레지던트 1년 차가 없어서 레지던트 2년 차가 1년 차처럼 생활하는 경우 말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냐고?

    이유는 간단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인턴 중에서 그 누구도 흉부외과를 지원하지 않았으니까.

    흉부외과의 인력난은 이때부터 남달랐다.

    의대 시절 내가 기를 써 가면서 폐식도 파트를 공부하고 인턴인 지금은 소아 흉부외과의 지식을 탐하는 게 아니었다.

    흉부외과의 부족한 인력난을 메우기 위해서.

    인력난으로 인해 생기는 환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나는 만능이 되어야 했다.

    흉부외과 지원자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그건 좀 더 나중에 다뤄야 할 문제였다.

    일개 인턴 신분으로는 그만한 일을 벌일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었다.

    “뭐,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아. 선배들도 잘해 주고. 내가 도망간다고 하면 선배들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거 알아?”

    홍선아의 블랙 유머에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내 미래는 홍선아의 지금과 크게 다르지도, 달라질 것도 없었다.

    “제가 열심히 도와드릴게요. 근데 혹시 인수인계도 선배님이 하시나요?”

    “빙고, 우리 과에서 수련하던 인턴이 도망쳤거든. 한 명은 지금 수술방 어시스트 중이고.”

    홍선아는 오해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기가 지나치게 인턴을 갈궈서 인턴이 도망간 것은 아니라고.

    나는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원래 인턴 근무 중 이탈자가 제일 많은 시기가 근무 첫 달부터 두 달째 되는 사이였다.

    고된 일에 몸과 마음이 갈려서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믿음이 너, 예전부터 흉부외과 지원한다고 했었지?”

    “물론이죠.”

    “흉부외과에서 살짝 방향을 틀어서 소아 흉부외과는 어때?”

    홍선아가 나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소아 흉부외과라…….

    유독 어린 환자에게 감정이입을 잘하는 나이기에 괜찮은 선택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아 흉부외과에서는 강태섭을 응징할 수 없었다.

    강태섭.

    나를 가스라이팅(심리조작)하고 내 열정과 신수술법만 쪽쪽 빨아먹은 뒤 토사구팽한 악당.

    강태섭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소아 흉부외과를 택할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선배. 저는 이미 흉부외과 쪽으로 마음을 굳혀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이믿음 고집을 누가 꺾겠어.”

    홍선아는 의외로 쉽게 나를 놔주었다.

    그만큼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나저나 다른 애는 왜 아직도 안 오지? 빨리 인수인계하고 업무 시작해야 하는데.”

    똑. 똑. 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나와 함께할 짝궁은 아무래도 양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당직실에서 홍선아가 진행한 인수인계는 10분 만에 끝났다.

    어느 과에 가더라도 인턴의 루틴 잡은 비슷비슷하며 이미 인턴 생활을 한 달 동안 해 본 나와 내 짝궁이었다.

    딱히 긴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소아 흉부외과가 다른 과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환자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아무래도 환자가 소아다 보니 감정 기복이 심하고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됐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 편할 거야. 아이를 설득할 생각을 하지 말고 구슬릴 생각을 해. 주머니에 간식도 좀 넣어서 다니고.

    인수인계가 끝나고 주어진 짧은 휴식 시간.

    “담배 펴?”

    김준호가 내게 물어 왔다.

    동갑내기 김준호는 신원대학교가 모교가 아닌 다른 의대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도 김준호를 잘 알지 못했다.

    “안 피우긴 하는데 바람도 쐴 겸 옥상으로 가자.”

    “너도 지독한 독종이다. 담배도 안 피우면서 스트레스는 무슨 수로 푸냐?”

    “국자로?”

    “국자? 갑자기 웬 국자? 아… 푸냐고 해서?”

    내 고급 유머를 이해한 김준호가 깔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개그 코드가 통하는 동료를 만나다니…….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이었지만 나는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유머러스한 의사가 되자.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겠다는 원대한 목표 뒤에 숨어 있던 소박한 목표.

    그것을 달성하는 일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이동했다.

    푸른 하늘 아래 먼저 도착해서 담배를 물고 있는 의사들이 몇몇 보였다.

    딸칵.

    김준호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맛깔나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나는 비흡연자였지만 의사들의 흡연을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아까 김준호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담배가 아니면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외과의의 경우 술도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편히 쉬지도 못한다.

    교수들조차 항상 응급 대기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병원 밥은 생존식이었고, 배달 음식은 한계가 있었으니까.

    담배라는 사소하고도 짧은 일탈마저 할 수 없다면 의사 생활은 더욱 괴로울 것이다.

    “이전에 무슨 과에 있었어?”

    “정형외과. 수술방 어시스트 했는데 죽을 맛이었다. 의사가 아니라 목수 일을 하는 줄 알았다니까.”

    “…….”

    “해머로 뼈를 두드리고 톱으로 썰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김준호가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정형외과 수술도 흉부외과 수술만큼 힘들기로 유명했다.

    힘들다는 의미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넌 어디 있었는데?”

    “순환기 내과.”

    “순화기 내과면 ABGA는 기똥차게 하겠네? 부럽다.”

    “하다 보면 너도 금방 익숙해질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천천히 운을 뗐다.

    소아 흉부외과에서 근무하는 동안 내 목표는 단 하나뿐이었다.

    소아흉부외과 특유의 섬세한 수술법.

    성인과 다른 소아환자에게만 적용되는 수술법 등을 눈으로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수술방 인턴이 되어야 했다.

    수술방 인턴이 되어야 수술을 직접 볼 수 있으니까.

    “내가 수술방 근무를 하고 네가 병동 근무를 하는 건 어때?”

    “반반 나누지 말고 통으로?”

    “바로 그 말이지.”

    내 제안에 김준호는 즉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 뻐금뻐금 담배 연기만 내뱉었다.

    김준호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내 귀에 다 들리는 듯했다.

    “너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냐?”

    김준호의 첫 마디였다.

    “수술방 어시스트 개빡세. 적게는 2시간, 길게는 6시간 동안 수술방에 서 있어야 한다고.”

    “…….”

    “졸면 교수님하고 레지던트들한테 쌍욕 듣고. 어시스트 똑바로 못하면 뒤통수 얻어맞고. 인턴은 화장실도 못 간단 말이지.”

    김준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됐다 싶었다.

    김준호는 정형외과 수술 어시스트에서 크게 덴 것처럼 보였으니까.

    “난 어차피 흉부외과 지원할 거라서 어차피 경험해야 할 일이다. 매는 미리 맞아 두는 게 좋겠지.”

    “알고 보니 마조히스트였네.”

    김준호가 농담을 하곤 키득거렸다.

    “좋아, 계약 성립. 난 병동을 책임질 테니까 수술방은 네가 맡아라.”

    “이거 꼭 한석봉하고 한석봉 어머니의 대화 같은데?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라는 느낌이다?”

    “듣고 보니 그러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우리는 계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끈끈한 악수를 나누었다.

    자, 그럼 고대하던 수술방 어시스트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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