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제5장 소아 다 됐어요(2)
현재시간은 오후 9시.
장소는 당직실.
‘어휴, 죽겠다.’
모니터로 심전도 그래프를 보고 있던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모처럼 여유 시간이 생겨서 심전도 공부에 심취했더니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어지럽고 속도 울렁거렸다.
심전도 판독 대가 김용 교수의 심전도 판독 비결은 의외로 암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공부법은 암기다. 암기는 무식하지만 동시에 무식할 만큼 빠르고 강하다.]
김용 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글자도 아니고 그래프를 암기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심전도 그래프를 한 열 개 정도 암기하고 나면 지금처럼 꼭 후유증이 뒤따랐다.
그렇다면 김용 교수는 대체 얼마나 독하게 심전도를 공부한 걸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김용 교수의 집념에 감탄을 하게 되는 나였다.
‘그래도 실력은 많이 늘었지.’
나는 기존에 공부했던 파일을 불러와 심전도를 복습했다.
김용 교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프를 통째로 암기하자 그래프를 해석하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아니, 해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프를 보자마자 ‘아, 이건 좌심실 비대’, ‘아, 이건 심방 조기 박동’ 등등.
심전도 그래프에 대한 해석이 자판기의 음료수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거기에 재미있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암기를 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해석 솜씨도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처음 보는 심전도를 판독하게 됐다고 치자.
이 경우 앞서 암기한 심전도들의 특징들을 통해 새로운 심전도를 분석할 줄 아는 눈을 갖게 되었다.
실로 경이로운 성장 속도였다.
김용 교수의 밑에서 심전도 공부를 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 정도 경지라니…….
-빠르고 올바르게 성장하고 싶다면 좋은 스승을 만나라.
언제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드르르륵.
때마침 당직실 문이 열렸다.
당직실에 혼자 있던 나는 심전도 파일을 끄고 OCS(처방 전달 프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내가 짜투리 시간에 심전도 공부를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인턴 생활 편한가 보다?
-혼자서 공부할 시간도 있고?
공부가 들키면 이런 핀잔이나 빈정을 들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뭐해?”
“퇴원 처방 입력 중이었습니다.”
“안 바쁘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치프께서 부르시면 바빠도 시간을 내야죠.”
내가 너스레를 떨자 최호섭이 피식 웃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최호섭과 내가 독대하는 장면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인턴은 4년 차 레지던트의 그림자도 못 밟을 정도로 어려운 상대였으니까.
“시간 참 빠르다. 벌써 한 달이 휙 지나갔네. 네가 순환기 내과에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최호섭이 달력을 바라보며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김슬기를 물리치고 소아 호흡기 내과에서 ABGA를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오늘은 내 마지막 순환기 내과 근무일이었다.
병원의 나그네이자 방랑자이자 인턴인 나는 내일부터 다른 과에 출근하게 된다.
“혹시 순환기 내과 레지던트 지원할 생각 없어?”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미 흉부외과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너 정도면 원하는 과는 아무 데나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흉부외과를?”
최호섭이 의문을 제기했다.
아마 최호섭이 했던 질문을 나는 앞으로 인턴 생활을 하는 과에서 지겹도록 들을 것이다.
굳이 왜 흉부외과를?
인간의 핵심 장기인 심장을 다룬다는 점.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흉부외과의 급박하면서도 처절한 모습이 방영되었다는 점.
이 두 가지 때문에 흉부외과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좋았다.
하지만 의사들 사이에서 흉부외과는 무덤이었다.
사서 고생을 하러 가는 곳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고, 의사가 된다면 흉부외과가 되고 싶었습니다.”
“…….”
“약간 느끼하게 말하면 운명적인 끌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운명적인 끌림이라… 약간 느끼한 건 아니고 많이 느끼한 말 같은데?”
최호섭이 농담을 던졌다.
그러고는 별다른 설득 없이 내가 흉부외과에서 잘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다독여 주었다.
“치프,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
“김슬기 선배는 어떻게 됐나요?”
음주, 간호사를 향한 보복성, 간호사 희롱, 환자 처치 미흡 등으로 선배들에게 밉보여 도망친 쓰레기 인턴.
나는 문득 쓰레기 인턴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 새끼? 앞으로 의사 생활하기 힘들 거다. 교수님들도 이야기를 듣고 단단히 화가 나셨거든.”
최호섭의 설명은 이랬다.
김슬기는 신원대학교 병원에 블랙 리스트 의사로 올랐다.
신원대학교 본원과 분원은 물론이요 협력 병원에도 발을 못 붙이게 되었다.
성희롱 건은 간호사가 직접 고소를 진행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실로 통쾌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내 손으로 처단했다는 사실에 뿌듯함도 느껴졌다.
‘전생에서는 아마 어물쩍 넘어갔겠지. 별 탈 없이 의사 생활을 했겠지.’
나는 전생의 최호섭은 잘 먹고 잘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손명환 환자 케이스 때문에 매스컴의 질타를 받기는 하겠지만 의국에서 그의 편을 들어줄 선배는 많았다.
여차저차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혔을 테고…….
그렇게 시간으로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세탁한 뒤.
최호섭은 멀쩡하게 순환기 내과에서 근무를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와 엮여서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 2호가 바로 김슬기였다.
1호는 물론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을 주도했던 심병수였다.
회귀를 통해 나는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한편.
심성이 악한 인간들을 처단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
회귀를 통해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은 나 자신이지.
“네 인턴 성적은 걱정 마. 다 만점을 줬으니까. 교수님께도 잘 말씀드렸고.”
“감사합니다, 치프.”
“나야말로 고맙다. 네 덕분에 손명환 환자도 무사히 구했고, 쓰레기도 하나 처리했으니까.”
최호섭이 내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당직실을 떠났다.
그렇게 순환기 내과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 * *
나는 레지던트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복도로 나왔다.
덤으로 인턴으로 보내는 첫 달과 순환기 내과에도 안녕을 고했다.
이별은 아쉽지만 이젠 받아들여야 했다.
인생이란 어쩌면 만남이 아니라 이별을 반복하는 과정이 아닐까.
인간의 마지막조차 삶과 이별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아쉬워요. 이 선생님이 벌써 떠난다니… 이제 막 정들기 시작했는데.”
스테이션 앞에서 대기하는데 양소연이 말을 걸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느낌이에요.”
“그래도 이 선생님은 실력이 좋으니까 어디를 가서든 잘 적응하실 거예요.”
“그렇겠죠?”
양소연과 잡담을 나누면서 나는 남초롱을 기다렸다.
오늘부터 근무를 하게 될 새로운 과를 떠올렸다.
다음 행선지는 바로 소아 흉부외과였다.
소아 흉부외과는 흉부외과보다 더 근무 환경이 척박한 곳이었다.
전국에 있는 소아 흉부외과의를 합쳐도 그 숫자가 50명이 넘지 않을 정도였다.
소아 흉부외과가 거의 빅 5병원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다루기 힘든 장기가 심장이거늘…….
만 6세 미만인 소아의 덜 성숙한 심장을 수술한다?
그 일이 어렵고 고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내가 소아 흉부외과를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소아 흉부외과 인턴 생활이 내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전생의 기억과 솜씨를 이어받아 나는 성인 심장 쪽에서는 이미 탁월한 실력을 갖추었다.
양순재 교수와 의대 시절부터 수련한 덕분에 폐식도 파트에서도 펠로우급 실력을 얻었다.
또한 김용 교수를 통해 심전도에 빠삭해지고 있었으니…….
이제 내가 정복할 과목은 소아 흉부외과뿐이었다.
소아 흉부외과 특유의 세밀하고 섬세한 수술법마저 체득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흉부외과의 완전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꿈을 향해 착실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이었다.
참고로 내가 소아 흉부외과를 다음 행선지로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면접 때 응급 의학과 교수의 아버지를 구해 준 일 덕분이었다.
전생의 나는 소아 흉부외과에서 인턴 생활을 하지 않았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짐을 챙긴 남초롱이 허겁지겁 내 쪽으로 뛰어왔다.
“오래 기다린 정도가 아니야. 육래, 아니 칠래 기다렸다고.”
나는 야무지게 농담을 던져 봤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남초롱은 물론이요, 양소연까지 가자미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만큼은 회심의 유머를 펼쳤다고 생각했건만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유머 감각이 있는 의사가 되자.’는 꿈은 정녕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남 선생님, 이 선생님 어드미션(입원) 시켜야 할 것 같아요. 어드미션 오더 좀 내 주세요.”
“병실만 넉넉했으면 곧바로 입원시켰을 텐데, 아쉽네요.”
나를 쏙 빼놓고 두 사람만 농담을 주고받았다.
문득 소외감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양소연과 작별 인사를 한 뒤 나는 남초롱과 함께 병동을 떠났다.
남초롱의 다음 근무지는 응급 의학과였고, 나는 소아 흉부외과였다.
가는 길이 겹쳐서 이동하는 동안 대화를 나눴다.
“나 얼마 전에 철우 마주쳤어.”
“철우? 아마 신경외과에 있었지?”
남초롱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의대를 다니는 내내 죽마고우로 지냈던 신철우였지만 인턴 생활을 시작하고서 따로 연락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섭섭해할 이유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인턴이란 본래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법이니까.
“응, 근데 만나자마자 폭탄선언을 하더라.”
“폭탄선언?”
“신경외과에 픽스를 박는대. 픽스 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아?”
“빠르긴 하지. 첫 달에 픽스 박는 인턴은 전국을 뒤져도 철우밖에 없을걸?”
역시 신철우다운 판단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인턴이란 본래 여러 과를 돌며 병원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그 경험 중에 자신이 전공하고 싶은 과목을 찾는 사람이었다.
픽스턴이란 그 반대였다.
난 이미 전공을 정했어.
그러니까 다른 과를 돌지 않고 한 과에만 계속 머무를 거야.
…라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픽스턴이었다.
예과 1학년 때부터 뇌 타령을 했던 신철우가 공교롭게 첫 턴을 신경외과에서 했으니, 그 결말은 어찌 보면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흉부외과에 미친놈이라면 신철우는 신경외과에 미친놈이랄까.
우리 둘은 제법 잘 어울리는 짝꿍이었다.
“신경외과 선생님들은 좋아하시겠네. 픽스가 들어오면 일 가르치기도 쉽고.”
“그렇긴 하겠지. 그래도 난 첫 달부터 픽스하는 건 별로라고 생각해. 인턴이 왜 인턴이겠어? 지금 아니면 여러 과를 다 돌아다닐 기회가 없는데.”
남초롱은 신철우의 선택이 마땅한 모양이었다.
의외로 실리를 중요시하는 남초롱이었다.
하긴,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남초롱은 똑순이였다.
이제는 버젓하게 ABGA도 잘하고 인턴의 루틴 잡도 빠르게 처리했다.
전생의 나보다는 남초롱이 몇 배는 더 나았다.
이런 인재가 OT 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
“고생하고 한 번 더 같이 근무했으면 좋겠다.”
“나도. 수고해.”
남초롱과 응급실에서 헤어진 뒤 나는 본관 건물을 나왔다.
화려한 아침 햇살이 나를 감쌌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아침 햇살에 시간이 이대로 멈추기를 기도해 보기도 했다.
위 건강을 책임질 양배추즙을 쭉쭉 빨아 마시며 나는 어린이 병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