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96화 (96/257)
  • 96화 제5장 소아 다 됐어요(1)

    내 루틴 잡을 끝내고 남초롱이 루틴 잡을 하고 있는 병실로 향했다.

    남초롱은 마침 동맥혈 채혈을 준비 중이었다.

    환자는 60대 노인으로 팔뚝이 가늘고 혈관은 얇았다.

    바늘 삽입이 조금만 삐뚤어져도 혈관이 터질 염려가 높았다.

    쉽게 말해 인턴들이 ABGA를 가장 피하고 싶은 유형.

    만약 남초롱이 ABGA 실패한다면 환자의 짜증과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남초롱의 몫이 되겠지.

    “도와줄까?”

    “아니, 내 힘으로 해 볼게.”

    남초롱은 내 도움을 거절하고 주사기를 손에 쥐었다.

    고난이도 수술을 앞둔 집도의처럼 남초롱의 표정이 비장했다.

    내 표정은 아마 어린 자식을 물가에 내버려 둔 부모의 표정쯤 됐을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나는 후배들이 처치나 수술을 하게 되면 괜히 내가 더 긴장하고 초조해했다.

    “따끔합니다.”

    푹!

    남초롱이 손에 쥔 주삿바늘이 환자의 피부를 꿰뚫었다. 통증을 느낀 환자가 몸을 들썩거렸다.

    아쉽게도 바늘 끝에 피가 맺히지 않았다.

    혈관을 제대로 찌르지 못한 것이다.

    야심 차게 나섰음에도 처치가 실패하자 남초롱은 당황한 듯 보였다.

    물론 남초롱이 잘못한 건 없었다.

    ABGA를 하기에 환자의 혈관이 너무 강적이었을 뿐.

    “이번에만 내가 할게.”

    “어? 응, 근데 바늘을 뽑아야 하지 않아?”

    “안 뽑고도 할 수 있어. 환자분, 조금 아프실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환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얼마나 더 아파야 하냐며 원망하는 눈빛이었다.

    “새로 주사를 놓는 것보다는 덜 아프게 해 드릴게요.”

    환자를 안심시키고 남초롱이 서 있던 자리로 이동한 나는 바늘 끝을 서서히 뒤로 당겼다.

    그 상태에서 혈관을 찾아 바늘을 찔러 넣었다.

    주차로 따지면 후면 주차를 하는 느낌이랄까.

    주사기가 혈관에서 빗나갔다고 해서 무조건 새로 주사를 놔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향과 깊이를 재조절해서 혈관을 찾을 수도 있었다.

    단, 초보는 힘들고 숙련자만 가능한 스킬이었다.

    톡.

    손끝에서 고무줄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늘이 혈관 길을 제대로 찾았다는 신호였다.

    그 상태에서 밀대를 뒤로 살짝 후퇴하자 주사기 통으로 피가 딸려 들어왔다.

    나는 적당한 힘을 주어 충분한 혈액 샘플을 채취했다.

    “아프신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5분에서 10분 정도 꾹 누르고 계세요.”

    “흠흠, 아까 째려봤던 건 미안했습니다. 괜히 주책을 부려서.”

    환자가 쑥스러워하며 사과를 건넸다.

    물론 나는 환자를 탓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환자라며 누구나 육체적 통증을 치료 또는 완화하기 위해 병원을 찾지 않는가.

    그런데 병원에서 도리어 아파 버리면 비록 치료 도중이라도,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러웠다.

    이 이치를 알고 있으면 환자가 독설을 하거나 미운 짓을 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이미 병원 짬밥을 먹을 대로 먹은 내 요령이랄까.

    “아닙니다. 아프신데 그럴 수도 있죠. 푹 쉬세요.”

    환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남초롱과 병실을 나왔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실패하면 항상 새 바늘을 꼽았는데 믿음이 너는 있는 바늘로 해결해 버리네?”

    남초롱이 내 ABGA 스킬에 감탄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라면 인턴 3, 4개월 차는 되어야 시도해 볼 만한 스킬이었으니까.

    “주삿바늘을 피하 근처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혈관을 찾는 방법이야. 익숙해지면 너도 할 수 있어.”

    “그럼 지금부터 미리미리 연습해 둬야지.”

    ABGA 실패로 풀 죽을 거라 예상했던 남초롱이 의외로 투지를 불태웠다.

    잠깐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평소 남초롱은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병원에서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그녀는 이 시기의 다른 인턴들보다 ABGA 성공률이 높은 편이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

    번호를 확인해 보니 우리 병동 콜이 아닌 다른 병동 콜이었다.

    왜 다른 병동에서 콜이 왔지?

    그쪽 병동에 인턴들이 잠깐 모자란 상황이 펼쳐졌나?

    나는 호기심을 느끼며 통화를 연결했다.

    “순환기 내과 이믿음입니다.”

    * * *

    오전 컨퍼런스를 1시간 앞둔 시점.

    나는 오준현의 허락을 맡고 스카이 브릿지를 건너 소아과 병동으로 이동 중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간호사가 아닌 동기 녀석이었다.

    -믿음아, 네가 ABGA를 그렇게 잘한다며? 우리 병동에 3살짜리 남자아이가 있는데 혈관을 더럽게 못 찾겠어.

    .

    .

    -실패만 벌써 다섯 번째고 보호자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본다.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야. 네가 와서 한 번만 도와주라. 응?

    조별 활동을 하며 친분을 쌓은 친구였기에 나는 선뜻 친구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ABGA 품앗이(?)는 의외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때는 동기의 도움을 받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또한 타 병동에 ABGA를 하러 간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ABGA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니까.

    조금 더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ABGA가 아닌 집도의로서의 수술로 인정을 받고 싶다.

    내 마음은 벌써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해 주는 스카이 브릿지를 통과하면서 나는 주변을 살폈다.

    투명한 창밖으로 병원 건물과 번화가의 풍경이 선명하게 펼쳐졌다.

    오전 6시, 3월의 아침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태양도, 사람도 아직 다 깨어나지 않았다.

    인턴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건만 나는 벌써부터 세상과 분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병원 밖의 세상이 이상한 나라로 보일 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이 느낌은 아마 갈수록 더 심해지면 심해지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칠 때까지는 바깥바람을 쐬는 것조차 어려운 테니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

    그 누구도 모든 걸 가질 순 없어.

    나는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며 포기해야 하는 것까지.

    알고 있으므로 먼 훗날 내 인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

    소아 호흡기 내과 병동에 도착한 나는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바로 이민호였다.

    이 시기에 이민호가 소아 내과 병동을 돌고 있었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못 알아볼 수 없는 거리까지 접근했지만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처음 본 사람인 것처럼 냉랭한 기운을 뿜어내며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민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전혀 없었다.

    아마 이민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믿음아, 진짜 고맙다. 안 그래도 루틴 잡 하느라 바쁜 시간인데.”

    병실로 들어가자 동기 양호열이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색했다.

    그런 양호열의 마음을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양호열처럼 ABGA를 동기에게 부탁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ABGA할 환자분이 저 환자분?”

    “응.”

    나는 창가 쪽에 누운 환자와 보호자를 확인하고 침상 옆에 섰다.

    아이는 울음을 그쳤지만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보호자인 어머니는 속상한 얼굴로 아이를 달래는 중이었고.

    “선생님, 이제 그만할래요. 그깟 피 검사 하루 정도 안 한다고 문제 될 거 없잖아요?”

    “…….”

    “아이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보호자가 먼저 ABGA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아이가 아파서 속상한 마음은 백번 이해했지만 검사를 미룰 수는 없었다.

    환자는 급성 폐렴을 앓고 있었다.

    경과 및 치료 호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 ABGA는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간신히 보호자를 달래고 ABGA를 실시했다.

    노인 환자만큼 채혈이 힘든 환자가 소아 환자였다.

    아직 혈관이 제대로 발달을 하지 못했으니까.

    보호자가 장난감으로 관심을 끄는 동안 나는 아이의 좌우 양팔부터 살폈다.

    양호열이 고군분투한 흔적이, 아이가 고통스러워했을 흔적이 팔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팔 쪽은 포기하는 편이 훨씬 나아 보였다.

    나는 발목에서 그나마 괜찮은 혈관을 찾아 채혈을 시작했다.

    통증을 느낀 아이가 발을 버둥거리려 했지만 양호열이 꽉 잡아 준 덕에 별 탈 없이 채혈을 끝냈다.

    “휴, 너까지 실패했으면 진짜 나락으로 가는 거였는데. 덕분에 살았다.”

    처치를 끝나고 병실을 나오는 양호열의 표정이 상쾌해 보였다.

    도움이 됐다고 하니 나도 기분은 좋았다.

    전생의 나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었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앞으로도 부담 갖지 말고 콜해. 혼자 끙끙거리면 너만 손해야.”

    “역시 이믿음. 믿음이 간다. 휴게실 가자, 커피라도 한잔 살게.”

    우리는 곧바로 스태프 휴게실로 이동했다.

    의사하게 허용된 유일한 도핑 약물인 캔 커피를 뽑아 마셨다.

    당류의 하루 권장 섭취량의 30퍼센트를 함유한.

    90mg의 고카페인을 함유한 커피를 마시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고 정신이 번쩍 깼다.

    “이민호랑 같이 근무하는 것 같은데, 이민호는 좀 어때?”

    나는 넌지시 이민호에 대해 물었다.

    전생의 나는 이민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민호가 먼 미래에 저지를 악행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이민호는 신원대학교 병원 성형외과 펠로우를 마친 뒤 부유한 집안의 도움을 받아 강남에 성형외과를 차린다.

    거기까지는 하등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성형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이 죄도 아니고.

    집안이 부유한 것도 죄가 아니니까 말이다.

    문제는 이민호가 차린 성형외과에서 끔찍한 사고들이 잇달아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수술 중 환자 사망.

    수술 부작용 발생 등등.

    성형외과에서 발생할 수 있는 안 좋은 일이란 안 좋은 일은 전부 녀석의 성형외과에서 터지게 된다.

    녀석이 사이코패스일 확률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먼 미래에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할 수만 있다면 이민호를 미리 손봐 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민호에 대한 정보를 미리 수집해 두는 것이 필수였다.

    “이민호? 걔는 말도 마라.”

    양호열이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인턴인지 상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라니까. 레지던트들도 개만 보며 벌벌 기어 다녀.”

    “…….”

    “병동 콜도 거의 나한테만 쏟아지고. 나도 그 새끼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아버지 후광 때문인가?”

    나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민호의 아버지는 신원대학교 병원의 진료부 원장이었다.

    진료부 원장이라면 병원장과 부병원장, 그다음의 직위로 거의 병원 내 3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원의 3인자쯤 되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겠지.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지. 하여간 너도 제발 이민호랑 마주치지 않기를 기도해. 이민호랑 일하면 너 혼자 독박 쓰니까.”

    “네가 고생이 많다. 수고하고 힘내고.”

    “너도 와 줘서 고마워.”

    양호열과 헤어져 순환기 내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생각이 많았다.

    뚜껑은 열어 봐야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강태섭을 손봐 주는 것보다 이민호를 손보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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