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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95화 (95/257)
  • 95화 제4장 통쾌한 일격(5)

    그 날 새벽, 당직실은 고요했다.

    당직 근무 중인 나와 김슬기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김슬기는 입을 다문 채 묵묵하게 처방 오더만 입력했다.

    나 역시 스테이션 콜을 대기하며 심전도 공부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쯧쯧쯧,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나는 김슬기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보며 깨소금 맛을 느꼈다.

    치프가 김슬기의 악행을 폭로한 지 벌써 3시간 전.

    그때부터 방금 전까지 김슬기는 윗 연차 레지던트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렸다.

    씨발 조팔은 기본이었고, 정강이도 몇 번 까였다.

    지은 죄가 워낙 많고 컸던 데다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김슬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런 김슬기에게 나는 손톱만큼의 연민과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했으니까.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가게 한다는 교화.

    나는 개인적으로 교화를 믿지 않았다.

    실수는 고칠 수 있지만 인성은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김슬기가 빚어낸 침묵은 갈수록 깊어졌다.

    이따금 잠에 빠진 윗 연차 레지던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올 따름이었다.

    지이이잉.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확인해 보니 스테이션 콜이었다.

    새벽 콜은 대부분 응급 또는 위독한 환자와 관련될 확률이 높았다.

    느슨했던 긴장감을 깨우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테이션 콜이라 잠깐 나가 보겠습니다.”

    무반응인 김슬기를 두고 복도를 통과해 스테이션을 찾았다.

    “선생님,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게요?”

    나이트 근무인 양소연이 씽긋 웃으며 되물었다.

    “혹시 명탐정 김전일인가요?”

    양소연의 표정을 보아하니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말장난을 했다. 그러자 양소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휴, 이 선생님. 썰렁해 죽겠어요. 여기가 시베리아인 줄 알았잖아요.”

    “…….”

    “외모, 실력, 인성까지. 선생님은 모든 걸 다 가졌지만 유머 감각은 없는 것 같아요.”

    양소연의 일침에 가슴이 뜨끔 아파 왔다.

    이번 생에서는 나름 유쾌한 외과의가 되고 싶었는데…….

    내 유머만큼은 좀처럼 성장할 줄 몰랐다.

    회귀를 했다고 해도 모든 걸 잘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처치실에서 후딱 간식 드시고 가세요. 한참 출출할 시간대인데.”

    “그럼 야식 때문에 콜 하신 거예요?”

    “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든든하게 잘 먹어야죠. 김 선생님 눈치 보여서 당직 중에 뭐 먹기도 힘들 텐데.”

    양소연의 배려에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처치실로 들어갔다.

    이런 일상적이고 사소한 재미 때문에 고된 의사 생활을 버텨 나갈 수 있는 것이니까.

    먼저 자리를 잡은 간호사 두 명과 함께 족발로 배를 채웠다.

    오늘 자정 무렵부터 지금까지 김슬기가 선배들에게 쥐 잡듯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했다.

    “와,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아무리 망나니라도 더 이상 못된 짓은 못하겠죠?”

    김슬기 퇴치 소식에 간호사들은 쌍수를 들고 기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상 환자는 아무리 패악질을 부려도 언젠가는 퇴원한다.

    하지만 진상인 선배와 동료, 후배는 사정이 달랐다.

    퇴사를 하지 않는 한.

    특별한 부서 이동이 있지 않은 한, 계속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한다.

    즉, 진상 환자보다 진상 동료가 몇 배나 더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진상 중의 진상인 김슬기가 된통 당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이거 조희태 보호자에게 오히려 감사해야겠는데요?”

    나는 며칠 전 새벽 술 마시고 난동을 부렸던 보호자를 언급했다.

    “그 사람은 왜요?”

    “그 사람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간호사 선생님들하고 친해졌고, 선생님들이 김슬기한테 몹쓸 짓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요.”

    사실 음주만으로 김슬기를 퇴치하기에는 화력이 부족했다.

    그 상황에서 기름이 되어 준 것은 간호사들의 폭로 덕분이었다.

    “듣고 보니 그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약간 이이제이 같은 느낌도 있고.”

    “그 사람은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요새는 순한 양처럼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몰라요.”

    간호사들과 15분 정도 잡담을 나누고 야식을 맛본 나는 처치실을 빠져나왔다.

    환자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당직실 문이 열리더니 반대편 복도에서 김슬기가 걸어왔다.

    “이믿음,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저는 선배랑 할 이야기 없습니다.”

    나는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대꾸했다.

    “윗 연차한테 밉보이니까 이제 내가 선배로 안 보이냐?”

    “저는 그보다 훨씬 예전부터 당신을 선배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

    김슬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나는 김슬기에게 저자세로 나갈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김슬기의 평판은 이미 나락까지 떨어졌다.

    1년 차 선배라는 보기 좋은 허물만 있을 뿐, 의국 내 서열을 따지면 나보다 못할 것이다.

    “그럼 딱 한 가지만 묻자.”

    “뭐죠?”

    “혹시 날 이 꼴로 만든 게 네 작품이냐?”

    나를 바라보는 김슬기의 눈빛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눈치 하나는 빠른데?

    하긴, 이 정도 눈치는 있어야 선배들에게 사랑받고 아랫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종할 수 있겠지.

    “왜 제가 선배를 공격했다고 생각하시죠?”

    “근거는 없어. 단지 내 감이야. 내 감은 모든 사건의 원흉이 너라고 말하고 있어.”

    “…….”

    “네가 순환기 내과에 오면서 내 생활이 꼬이기 시작했단 말이지.”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치미를 뗐다.

    김슬기가 조금이라도 더 괴로워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발뺌할 줄 알았지. 넌 곰인 척하는 불여우였어. 실수라면 네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내 잘못이다.”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요. 선배의 실수는 제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게 아닙니다.”

    “그럼?”

    “선배의 성격이 놀부만큼 못되었기 때문이죠. 못된 짓을 해서 벌을 받은 거고요.”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졸라 깐죽거리네?”

    김슬기가 와락 내 멱살을 붙잡으려 했으나 나는 손쉽게 그의 손을 쳐 냈다.

    내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에 놀랐는지 김슬기가 입을 떡 벌렸다.

    “제가 유일하게 안 좋은 게 손버릇입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복싱을 배웠거든요.”

    “…….”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갈 수도 있습니다.”

    나는 김슬기에게 서슬 퍼런 눈빛을 쏘아 내며 경고했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자리를 벗어나는 김슬기.

    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당직실로 돌아갔다.

    당직실에서 심전도 공부를 30분 정도 한 뒤쯤이었다.

    나는 찜찜하고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화장실에 갔다고 했던 김슬기가 함흥차사였다. 당직실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다.

    세면대 위에 의사 가운과 콜폰이 놓여 있었다.

    “양 선생님, 김 선생님 지나가는 거 봤죠?”

    나는 스테이션을 찾아가 양소연에게 물었다.

    “네, 급한 일이 있는지 가운을 벗고 어디로 가시던데요? 알고 계신 거 아니셨어요?”

    “반은 알고 반은 모르고 있었죠. 수고하세요.”

    나는 화장실에서 김슬기의 가운과 콜폰을 회수한 뒤 당직실로 돌아왔다.

    비상 연락망을 사용해 김슬기의 개인 휴대폰에 전화를 해 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어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랬다.

    김슬기는 도망쳤다.

    * * *

    새 아침이 밝았다.

    선배들에게 찍혀도 단단히 찍힌 김슬기가 도망쳤으므로 나는 밤새 김슬기의 업무를 대신했다.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다.

    전생에서 내가 이뤄 낸 것들 생각하면 말이다.

    김슬기의 아이디로 수술 기록지를 작성하고, 입·퇴원 기록지를 작성하고 처방 오더를 내리고 등등.

    김슬기라면 밤새 끙끙 앓으며 해낼 것들을 나는 2시간에 처치했다.

    남는 시간에 심전도 공부를 하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차라리 잘됐지.’

    김슬기가 도망친 것을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녀석이 순환기 내과 병동에 남아 있었다면 언제 또 나쁜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적당히 짬을 먹고 난 뒤 다시 본색을 드러낼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당장은 힘들더라도 김슬기의 빈자리를 새로운 인물이 채우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 누가 와도 설마 김슬기보다 못하겠는가.

    “하아아암. 슬기는 어디 갔어? 화장실.”

    레지던트 1년 차이자 김슬기의 동기인 오현준이 하품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일과가 시작되기 직전, 새벽 4시 30분경이었다.

    “가운하고 콜폰 내팽개치고 도망쳤습니다. 휴대폰으로 연락해 봤는데 전원이 꺼져 있더라고요.”

    “아 씨…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 뭔가에 막 쫓기는 꿈을 꿨는데.”

    오현준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동기라서 그런지 김슬기가 도망칠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모양이었다.

    오현준이 김슬기에게 다시 전화를 했으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현준 역시 김슬기와 통화를 하지 못했다.

    “믿음아, 뭐 하나만 묻자.”

    “네, 선배.”

    “슬기… 안 돌아올 것 같지?”

    “그럴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선배들한테 이미 미운털이 잔뜩 박혔잖아요. 그럴 바엔 다른 병원에서 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나는 소신껏 대답했다.

    김슬기는 약아 빠진 인간이었다.

    선배들의 환심을 살 줄 알고 후배들을 떡 주무르듯 주무를 줄 아는 인간이었다.

    주무를 떡이 없는 신원대학교 병원 순환기 내과에 더 이상 볼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다. 인턴 때부터 불안 불안하더니 결국 똥을 싸고 나가는구나.”

    “…….”

    “그나저나 일 났네. 오더가 잔뜩 밀려 있을 텐데…….”

    “그건 제가 끝내 놨습니다.”

    “엉? 믿음이 네가?”

    “슬기 선배가 직접 해야 할 일을 저한테 떠넘기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저도 실력이 늘었거든요.”

    “그래? 일단 확인 좀 해 보자.”

    컴퓨터 의자에 앉은 오현준이 김슬기의 환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곧 입을 떡 벌린 채 감탄했다.

    “진짜네? 야, 밤새 고생 많았다. 어제 신환(병원에 새로 온 환자)도 많고 응급실 환자도 많았는데.”

    “고생 좀 했습니다.”

    나는 하지도 않은 고생을 한 척했다.

    “역시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네. 슬기가 도망칠 걸 알고 하늘이 너를 보냈나 보다.”

    “…….”

    “잠깐이라도 눈 붙였다가 루틴 시작해. 컨퍼런스 준비는 내가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선배.”

    오현준의 배려에 나는 감사를 전했다.

    김슬기가 쓰레기라면 오현준은 인성 좋은 선배의 전형이었다.

    후배의 고생을 알아주고 잠시라도 후배가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으니까.

    오현준이 있어서 순환기 내과의 미래는 밝았다.

    나는 타이머를 맞춰 놓은 뒤 30분 정도 명상을 했다.

    푹 잔 것만큼은 못했지만 그래도 머리가 꽤 맑아졌다.

    명상을 마친 나는 남초롱과 함께 루틴 잡을 실시했다.

    ABGA(동맥혈 채혈)를 하고 드레싱(소독)을 하고 각종 검사 동의서도 받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병실을 돌던 중 만난 손명환 환자를 나는 특별히 더 살갑게 대했다.

    손명환은 김슬기의 게으른 처치 때문에 경피적 관상동맥이 늦어졌던 환자였다.

    전생이었다면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 환자였다.

    “선생님 덕분에 멀쩡합니다. 흉통도 거의 사라졌고, 마음 같아서는 바로 퇴원하고 싶을 정도인데요?”

    “아무리 호전되셨다고 해도 벌써 퇴원은 안 되죠. 지혈은 완벽하게 잘됐네요.”

    나는 PCI를 했던 손명환의 대퇴부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아야 할 사람은 결국 살아남았고.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갔다.

    그래서 그런지 몸은 피곤했어도 마음만큼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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