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94화 (94/257)
  • 94화 제4장 통쾌한 일격(4)

    “펠로우 선생님은 아직 도착 안 하셨습니까?”

    “오고 계신대. 우리끼리 조영술부터 진행하자.”

    “네, 치프.”

    나는 최호섭과 함께 환자를 조심스럽게 처치대로 옮겼다.

    혈관 조영실.

    흉부외과에 수술실이 있다면 순환기 내과에서는 혈관 조영실이 있었다.

    이곳에서 관상동맥 중재술, 성형술 등의 중요한 처치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환자가 누운 처치대 머리맡에는 C-arm이 설치되어 있었다.

    C-arm은 말 그대로 C자 형태를 띤 엑스레이인데.

    장치가 상하로 움직이며 환자의 전신을 실시간으로 x선 촬영할 수 있었다.

    처치대 옆에 놓인 것은 화면이 6분할 된 모니터였다.

    조영술과 중재술을 시행하면 환자의 부위별 혈관이 모니터에 떠오르게 될 것이다.

    전생에 순환기 내과 인턴을 돌지 않았으므로.

    혈관 조영실을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조영실 내부의 풍경이 낯설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선배님, 제가 대퇴동맥을 세팅해도 되겠습니까?”

    “할 수 있겠어? 조영실 어시스트는 안 해 봤잖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한다. 난 펠로우 선생님 오시면 바로 중재술 시작할 수 있게 준비할 테니까.”

    최호섭은 별 말없이 나를 믿어 주었다.

    그동안의 내 활약상을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누군가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은 나를 기쁘게 했다.

    전생의 나는, 이맘때쯤의 나는 폐급으로 낙인찍혀 괴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아마 회귀는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환자분, 중재술 이전에 조영술을 시작할 겁니다.”

    “네.”

    “단, 흉통이 심해지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참으시는 게 오히려 안 좋으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환자.

    나는 드레싱 카트를 처치대 옆으로 끌고 와 본격적인 처치에 나섰다.

    우선 베타딘(빨간 소독약)에 젖은 솜으로 대퇴동맥 부분을 넓게 소독했다.

    면도칼을 들고 대퇴동맥 인근의 털들을 깔끔하게 다듬었다.

    시술 후 발생할 수 있는 2차 감염을 막기 위한 처치였다.

    수술만큼 중요한 것이 수술 후 감염 관리였으니까.

    “오 선생님, 조영제 알레르기 테스트 했나요?”

    “아니요, 아직 못했어요.”

    “지금 바로 진행해 주세요.”

    내 오더에 따라 오지효 간호사가 환자의 손등에 조영제 주사를 놓았다.

    그 상태로 몇 분이 지났음에도 환자의 손등 주변에는 아무런 이상 반응이 없었다.

    피부에 빨갛게 발적이 올라온다거나.

    두드러기가 난다거나 등등.

    조영제 알레르기 반응이 없으니 조영술을 펼치는 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치프, 제 쪽은 준비 끝났습니다.”

    “나도 끝났다. 펠로우 선생님만 오시면 되겠네.”

    펠로우를 기다리며 나와 최호섭은 환자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다.

    약물 치료를 받았다고는 해도 환자는 전벽성 심근경색을 앓고 있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심장마비가 발생할지 몰랐다.

    그래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흉통이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환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순간 조영실의 온도가 몇 도는 더 내려간 것 같았다.

    펠로우가 도착하기 전에.

    중재술을 펼치기 전에 문제가 터지면 수습이 곤란했다.

    나는 다급하게 환자 감시 장치를 확인했다.

    체온, 맥박은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혈압이 골칫거리였다.

    혈압이 무려 70mmHg/30mmHg까지 떨어졌다.

    환자의 얼굴에 얼핏 푸른빛이 감도는 것 같기도 같았다.

    청색증.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서.

    혈액 속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서.

    피부 조직이 얇은 곳이 파란빛을 띠는 증상.

    그러고 보니 산소 포화도도 어느새 9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이 정도면 마지노선이었다.

    환자에겐 당장 중재술이 필요했다.

    “치프, 오더 내 주시죠. 펠로우 선생님께 다시 한번 연락도 해 주시고요.”

    초조와 긴장, 불안에서 가장 빨리 벗어난 내가 최호섭에게 한마디 했다.

    상태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머리와 심장이 차가워져야 하는 게 의사였다.

    “일단 놀핀, 몰핀, 프라그민 정맥 주사하자.”

    “산소 포화도도 너무 떨어졌는데 산소마스크를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 말이 맞다. 산소마스크도 추가해. 나는 펠로우 선생님께 전화할 테니까.”

    최호섭이 전화하는 동안 나는 환자의 기도를 확보한 뒤 기관을 삽관했다.

    삽관한 튜브에 산소마스크를 연결했다.

    후우우욱.

    후우우욱.

    산소마스크에서 뿜어지는 뿌연 숨결.

    기계적 환기가 시작되면서 환자의 산소 포화도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 간호사가 정맥 주사까지 놓자 환자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환자가 호전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처치는 전부 임시 변통책에 불과했고, 궁극적인 치료는 따로 있었다.

    환자를 구할 수 있는 건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뿐이었다.

    초조하게 벽시계를 바라보고 있는 도중 최호섭과 펠로우가 조영실로 들어왔다.

    “PCI 바로 시작하지. 마취했어?”

    펠로우는 허겁지겁 처치대 앞에 섰다.

    주차장에서 조영실까지 뛰어왔는지 호흡이 거칠었다.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도착이 늦은 펠로우가 원망스럽다기보다는 안쓰러운 나였다.

    나도 흉부외과 조·부교수 시절 응급 콜을 받으면 미친 듯이 수술실로 뛰어왔으니까.

    응급 수술이나 응급 시술이 있는 과의 의사들은 휴식이 없다.

    단지 응급 대기를 하고 있는 것일 뿐.

    “국소마취,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미리 재어 놓은 리도카인(국소마취제)을 환자의 대퇴동맥 근처에 주사했다.

    부분 마취가 진행되는 동안 펠로우는 최호섭에게 노티를 받았다.

    “너희 둘 다 잘했다. 이 정도면 정말 선방한 거야. 어수룩한 놈이 환자한테 붙었으면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다.”

    “감사합니다.”

    “마취는 끝난 것 같은데… 10번 블레이드.”

    “여기 있습니다.”

    나는 scalpel(칼대)에 10번 칼날을 끼워 펠로우에게 건넸다.

    펠로우는 거침없이 대퇴동맥이 위치한 피부에 2, 3센티 크기의 개방창을 생성했다.

    최호섭은 모니터 앞에서 영상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든든한 펠로우의 등장으로 조영술과 중재술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대퇴동맥에 가이드 와이어가 삽입되고.

    도관이 심장에 위치하고.

    조영제가 투입되면서 환자의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부풀어 오른 풍선이 비좁아진 환자의 관상동맥을 넓히고 등등.

    관상동맥 조영술과 중재술은 단 30분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다.

    단 30분이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환자.

    그런 환자가 김슬기 때문에 무려 서너 시간 동안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환자에겐 연민과 죄송함을 느꼈으며 김슬기에겐 분노를 느꼈다.

    “이제 산소마스크는 제거해도 되겠다. 병실 여유 있지?”

    “네, 곧바로 어드미션(입원) 진행하겠습니다.”

    “인턴은 마무리 좀 해 주고, 호섭이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네, 선생님.”

    최호섭과 펠로우가 조영실을 떠난 뒤 나는 환자의 산소마스크를 제거했다.

    그리고 환자의 대퇴동맥 위에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얹었다.

    출혈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불편하시더라도 3시간 정도는 천장을 보고 누워 계세요. 피가 완전히 멎어야 하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요.”

    “별말씀을요. 다 환자분께서 잘 견뎌 주신 덕분이죠.”

    상태가 호전된 환자가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끈끈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전쟁을 함께 이겨 낸 전우였다.

    전생에서는 허탈하게 목숨을 잃었던 환자를 구해 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뭐래도 내 회귀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아버지는 무사하신가요?”

    침상을 끌고 처치실을 나오자 환자의 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입원실에서 안정을 취하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버지, 몸은 좀 괜찮아요?”

    “우리 딸이 걱정해 준 덕분에 멀쩡하지.”

    도란도란 이어지는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병동으로 향했다.

    날개가 달린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하… 씨발 좆 됐네.’

    김슬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의국장 최호섭의 지시에 따라 순환기 내과에 근무하는 스태프들이 전원 회의실에 모였다.

    스태프들은 벽을 따라 가로로 늘어서 있었으며 맞은편에 도끼눈을 뜬 최호섭이 서 있었다.

    사실 의국장은 의국 일에 크게 간섭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4년 차는 전공의 시험과 논문 준비로 바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의국장 자체가 레지던트들을 방임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야밤에 레지던트와 인턴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의국을 진흙탕으로 만든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있다.”

    “…….”

    “김슬기.”

    “네, 치프.”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것에 김슬기는 공포마저 느꼈다.

    전벽성 심근경색 환자 건으로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한마디 할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다.

    하마터면 자신 때문에 환자가 죽을 뻔했으니까.

    “너 생각보다 악질이더라. 새파란 놈이 야간에 소주를 홀짝거리고 간호사나 희롱하고 말이야.”

    “네?”

    치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정보에 김슬기가 화들짝 놀랐다.

    음주를 알고 있는 건 동기 오현준.

    성희롱을 알고 있는 건 성희롱을 당한 간호사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치프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심근경색 환자 건으로만 혼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는 김슬기였다.

    “치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3년 차 배태곤이 놀라서 물었다.

    “너도 까맣게 몰랐을 것 같았다. 하긴, 김슬기가 얼마나 요물인지 나도 최근에 알았으니까.”

    “…….”

    “자, 너희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의국장은 소주가 든 사이다 병을 3년 차에게 건넸다.

    그리고 스테이션에서 김슬기가 간호사에게 성희롱을 하고 있는 CCTV 장면까지 돌려서 보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악행의 증거들.

    제아무리 영악한 김슬기라도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선배들을 누구보다 잘 구워삶았다고 자신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야, 김슬기! 미쳤나? 잘해 주니까 돌아이 같은 짓만 하고 다녔네?”

    “이 새끼가 사람 새끼인가?”

    “고개 좀 들어 봐, 어디 뻔뻔한 낯짝 좀 보게.”

    2, 3년 차 레지던트들의 험악한 눈빛이, 말들이 김슬기를 향해 쏟아졌다.

    덕분에 김슬기는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너희들도 잘한 거 없어. 너희들이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김슬기가 저 지랄을 하고 다닌 거니까.”

    의국장의 묵직한 한마디에 회의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김슬기.”

    “네, 치프.”

    “오늘 심근경색 환자 건, 간호사를 희롱하고 보복성 오더를 낸 건, 근무 중에 음주를 한 건. 전부 과장님께 보고드릴 거다.”

    “…….”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단 하나도 쉽게 넘어갈 건이 아니니까.”

    “…….”

    “2, 3년 차들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의국장이 일갈을 내지르고 회의실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김슬기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2, 3년 차들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오늘 밤은 한숨도 못 잘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