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93화 (93/257)
  • 93화 제4장 통쾌한 일격(3)

    “환자분 몸은 좀 어떠세요?”

    나는 응급실 침상에 누운 손명환에게 말을 걸었다.

    손명환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딸로 보이는 20대 중반의 여성이 손명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처음보다는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근데 아까 저를 봤던 의사 선생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당직 선생님이 바쁘셔서 제가 대신 내려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대학 병원 의사 선생님들은 실력 말고 얼굴로도 뽑나 봅니다. 하나같이 다 잘생기셔서 말입니다.”

    “별말씀을…….”

    아픈 와중에도 농담을 건네는 손명환의 모습에 가슴이 저려 왔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전생에서 손명환은 죽는다.

    그의 죽음으로 한동안 병원은 메스컴에 오르내리기 바빴다.

    사인(死因)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폐 정지.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사인일 뿐.

    진짜 사인은 김슬기의 무성의하고 게으른 치료 때문이었다.

    손명환은 PCI(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를 받아야 하는 응급 환자였다.

    그런데 김슬기는 약물 치료로 PCI를 대신하려고 했다.

    -아, 글쎄. 그 미친놈이 심전도만 체크하면서 환자를 6시간이나 방치해 뒀다니까.

    -청색증이 나타나서야 윗 연차한테 보고를 하더라고. 인턴이 내가 봐도 좀 아니다 싶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당시 순환기 내과에서 인턴 생활을 했던 동기에게 전해 들은 말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비극이 일어나게 둘 순 없지.’

    나는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대학 병원 응급실을 찾아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아 사망한다니…….

    손명환의 죽음은 억울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런 비참한 사건은 다시는 벌어져선 안 됐다.

    “선생님, 치료받고 있으니까 저희 아버지 금방 좋아지시는 거 맞죠?”

    손명환의 딸이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모습이 꼭 전생의 내 모습 같았다.

    아버지의 OPCAB(무인공심폐기 관상동맥 중재술) 직전에 내가 보였던 모습과.

    그 때문에 손명환과 그의 딸에게 좀 더 감정이입을 하게 된 나였다.

    “글쎄요,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환자분, 지금 제일 불편하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아까랑 똑같습니다. 가슴이 제일 불편해요. 누가 칼로 가슴을 찢는 것 같습니다.”

    환자 C,C(Chef complaint, 주 호소)는 급성 심근경색의 전형적인 소견이었다.

    응급실에 내려와서 환자를 직접 봤으면서.

    검사 오더까지 내렸으면서.

    약물 치료를 고집하는 김슬기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슬기는 환자의 아픔에 공감을 할 줄 모르는 걸까.

    아니면 검사 결과를 분석할 실력이 안 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노티로 윗 연차 선배가 귀찮아질 수도 있다는 알량한 배려 의식 때문일까.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그 이유를 꼭 알고 싶었다.

    “그래도 아직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활력 징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환자에게 연결된 환자감시 장치를 확인했다.

    혈압은 80mmHg/50mmHg.

    체온은 36.5도.

    맥박은 분당 58회.

    모니터에 떠오른 심전도 그래프의 ST 분절은 여전히 모니터 천장을 뚫고 나올 듯했다.

    즉, 환자는 약물을 투여받으면서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러니까 전생에서 자정 너머에 그 사달이 났지.

    “지금 말씀을 드리기는 섣부를 수도 있지만, 환자분께서는 시술을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수술이요?”

    “아니요, 수술은 아니고 시술입니다. 환자분의 혈관에 풍선을 집어넣어 좁아진 혈관을 넓혀 주는 시술입니다.”

    나는 경피적 관상동맥 시술에 대해 운을 띄워 났다.

    환자는 놀란 듯했지만 내가 차분하게 설명하자 알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선배님, 아무래도 환자분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PCI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직실로 복귀한 나는 김슬기에게 환자 상태를 노티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가관이었다.

    “야, 네가 뭘 안다고 나대? 네가 순환기 레지던트 할래? 잠깐 바꿔 볼까?”

    “심전도상에 ST분절이 너무 높습니다. T파도 너무 뾰족하고요. 이거 전벽성 심근경색 아닙니까?”

    전벽성 심근경색이란 심근경색 중에서도 그 정도가 심한 것이었다.

    지속적인 경색.

    혈관의 완전 폐쇄.

    광범위한 경색.

    전벽성 심근경색은 이 세 가지를 특징으로 하며 진단이 되면 환자에게 조기 시술을 권하기도 한다.

    “뭐? 전벽성 심근경색? 당돌한 새끼를 봤나. 일 잘한다고 오냐오냐했더니 나를 가르치려고 드네.”

    “…….”

    “치프가 널 좋게 보니까 이제 무서운 게 없나 보다?”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을까.

    김슬기가 붉게 물든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자기가 환자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김슬기는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실로 답답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뺨을 한 대 시원하게 후려갈기고 싶을 정도였다.

    “선배랑 저랑 고작 1년 차이 아닙니까? 왕 노릇 하는 건 그만두시죠.”

    “뭐? 왕 노릇?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뭘 잘못 처먹은 건 선배입니다. 선배는 나이를 잘못 처먹었어요.”

    나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치프에게 이미 김슬기의 악행을 모두 고발한 상황.

    거기에 손명환 환자의 치료를 태만하게 한 일까지 더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김슬기는 이미 끈 떨어진 뒤웅박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내가 김슬기에게 벌벌 길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너 잠깐 이리 와 봐.”

    “싫습니다. 절 부르고 싶으면 선배가 오세요.”

    나는 거만하게 말하고 콜폰을 손에 쥐었다.

    치프 최호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짝!

    당직실에서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믿음의 콜을 받고 달려온 최호섭이 김슬기의 뺨을 냅다 후려갈겼던 것이다.

    “김슬기, 너 제정신이야?”

    최호섭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김슬기를 노려보았다.

    -정말 죄송하지만 환자 한 분을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슬기 선배는 괜찮다고 하는데… 제 눈에는 영 위태로워 보여서…….

    당직실에 도착한 최호섭은 이믿음이 띄워 놓은 환자의 전자의무기록을 살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환자는 전벽성 심근경색으로 당장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직 근무자인 김슬기는 환자에게 혈전 용해제만 냅다 투여해 놓았다.

    한마디로 환자를 말려 죽이겠다는 뜻인 것이다.

    너무나 어이가 없고

    너무나 화가 나서 최호섭은 다짜고짜 김슬기의 뺨부터 때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러고도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믿음이 눈치 빠르게 노티를 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환자는 자정도 넘기지 못해 사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순환기 내과에는 피 바람이 불어닥쳤겠지.

    “치… 치프.”

    갑작스럽게 뺨을 얻어맞은 김슬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슬기는 한 손을 뺨에 갖다 댄 채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이 미친놈아! 환자 이대로 방치하면 백 퍼센트 죽었어. 넌 의사 면허가 살인 면허인 줄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저는… 약물로 충분히 치료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해!”

    최호섭은 언성을 높이며 말을 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전벽성 심근경색이었단 건 모를 수 있다고 치자. 그래도 심근경색인 건 알았을 거 아니야.”

    “…네.”

    “심근경색 환자가 들어왔으면 윗 연차한테 노티부터 했어야지. 네가 뭐가 잘났다고 약물 치료랑 PCI의 선을 그어?”

    “죄… 죄송합니다.”

    김슬기가 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제야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한 모습이었다.

    “지금 당장 혈관 조영실에 연락해서 PCI 처치실 잡아 놔.”

    “네, 치프.”

    “믿음이 넌 환자 데리고 조영실로 올라와. 전임의 선생님하고 나를 도와서 PCI 어시스트 좀 해라.”

    “알겠습니다.”

    상황을 바로잡은 최호섭은 마지막으로 김슬기에게 한마디 더 했다.

    “PCI 끝나면 김슬기 넌 죽었어. 각오 단단히 해 둬라.”

    이믿음에게 보고받은 정보들로 인해 최호섭은 이미 김슬기를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충격적인 사건까지 터지고 나니 김슬기를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일을 키울 수 있을 만큼 키워서 김슬기의 가운을 벗길 생각이었다.

    그것만이 순환기 내과가 살길이었다.

    “잘했다. 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당직실을 나오면서 최호섭은 이믿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름 그대로 이믿음은 정말 믿음직한 녀석이었다.

    인턴 생활 이틀 만에 김슬기의 악행을 밝혀내질 않나.

    응급 시술이 필요한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질 않나.

    이믿음과 같은 괴물 인턴을 최호섭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믿음에게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기 때문일까.

    최호섭은 이믿음의 겸손마저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운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네 입으로 환자가 전벽성 심근경색이라고 말했잖아. 그건 네가 그만큼 심전도를 볼 줄 안다는 거지.”

    “개인적으로 심전도 공부를 하는 중인데 마침 이번 케이스가 있어서 알아봤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운이 아닌 거야. 공부를 했으니까 전벽성 심근경색도 알아봤지. 이따 보자.”

    “네, 치프.”

    최호섭은 이믿음과 헤어져 혈관 조영실로 향했다.

    어쨌거나 환자를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 *

    드르르륵.

    나는 손명환이 누운 침상을 끌고 혈관 조영실로 이동 중이었다.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을 받을 수 있다고 미리 말해 둔 덕분에 동의서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해피엔딩이 눈앞이구나.’

    침상을 끌고 이동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전생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던 환자를 살리고.

    동료 및 아랫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김슬기에게도 정의의 철퇴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내 계획대로 착착 진행 중이었다.

    이것이 바로 회귀가 내게 준 선물이 아닐까.

    앞으로 일어날 굵직한 사건에 대한 예지.

    과거의 의료 지식에 새로운 의료 지식을 더하면서 이뤄지는 말도 안 되는 성장력 말이다.

    인턴임에도 이렇게 활약할 수 있다면 말이다.

    레지던트와 펠로우.

    나아가서는 교수와 과장이 됐을 땐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나는 내 미래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보호자분은 대기실에 계시고요, 환자분만 저와 함께 조영실로 이동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잘 부탁드려요.”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시술 난이도가 엄청나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시기도 적절해서요.”

    나는 보호자를 안심시키고 침상을 끌어 조영실 안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창 너머로 경피적 관상동맥 시술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의 바쁜 모습이 확인되었다.

    이제는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시간이었다.

    잠시 후면 환자는 PCI를 받고 건강을 회복할 것이며 김슬기는 자신의 죗값을 톡톡하게 치르게 되리라.

    위이이잉.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마친 나는 수술용 가운과 마스크, 장갑 등을 착용하고 환자와 함께 처치실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