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92화 (92/257)

92화 제4장 통쾌한 일격(2)

“감사합니다. 치프.”

최호섭이 건넨 캔 커피를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최호섭이 김슬기를 쥐 잡듯이 잡은 뒤 나는 최호섭을 따라 휴게실을 찾았다.

딸칵.

오늘따라 커피가 유독 달았다.

김슬기가 최호섭에게 털리는 모습을 직관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동안 윗 연차에게 예쁨만 받다가 된통 쓴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속이 쓰릴까.

김슬기의 불행은 곧 내 행복이었다.

“너, 아까 코드 블루 받고 CPR 했지?”

“네, 치프.”

나 역시 채혈실에 최호섭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먼저 온 인턴 동기들이 많았기에 최호섭은 직접 처치를 하지 않았다.

나와 동기들이 처치를 잘하고 있는지 관찰하기만 했다.

“CPR 잘하더라? 친구들에게 역할 분담을 시키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3년 차에게 들었는데, 의대 때부터 장난 아니었다고 하더라?”

최호섭의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우선 그가 나를 따로 불러 칭찬할 줄 몰랐다.

내 의대 시절 활약상을 3년 차에게 들어 벌써 알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내게 관심이 있는 걸까.

“어렸을 때부터 사건, 사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보다 침착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

“술기들은 인턴 오리엔테이션 때 확실히 복습을 해 뒀고요.”

“그래?”

최호섭은 짧게 말하고 캔 커피를 들이켰다.

“내 동기 중에 너랑 비슷한 친구가 있었다. 일도 잘하고 사교성도 좋은 친구였지.”

최호섭은 나와 닮았다는 동기의 이야기를 2, 3분가량 이어 갔다.

분명 그 동기를 칭찬하는 것 같은데 최호섭의 표정은 의외로 씁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동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모양이었다.

“근데 그 친구, 신경외과 레지던트 1년 차에 병원에서 도망쳤어.”

“왜 그러셨죠?”

“주치의로 맡고 있던 환자 중 한 명이 죽었어. 그 친구 실수는 없었는데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더군.”

“…….”

“널 보니까 괜히 그 친구가 생각나서.”

최호섭이 나를 걱정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그의 동기와 같은 길을 걸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웠지만 나는 최호섭의 동기와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최호섭의 동기는 굳이 말하자면 완벽주의 타입이었다.

스스로 완벽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뎌 낼 수 없는 타입.

자신의 실력과 명성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면 참을 수 없는 타입.

하지만 나는 완벽주의자는 아니었다.

부족한 재능을 노력과 시간으로 극복하는 타입이었다.

전생에서부터 나는 상처받거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에 익숙했다. 잠깐 쓰러질지는 몰라도 전진을 멈춘 적은 없었다.

강태섭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만 제외하고 말이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프. 제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개떡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듣네?”

최호섭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감돌았다.

“찰떡같이 말씀해 주셔서 찰떡같이 알아들었죠.”

“아까는 슬기 골려 주려고 일부러 나한테 고자질했지?”

아까 내가 김슬기의 어깨를 주무르던 사건으로 최호섭이 화제를 돌렸다.

의국장은 괜히 된 것이 아니라는 듯 내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김슬기는 아직도 내가 눈치 없는 인간인 줄로만 알고 있는데, 최호섭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글쎄, 네가 CPR 하는 걸 못 봤다면 고문관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널 고문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역시 치프십니다.”

최호섭이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지금.

지금이야말로 김슬기의 악행을 까발릴 좋은 기회가 아닐까.

본래라면 ‘그 사건’이 터진 뒤에 모아 놓은 무기를 한 번에 때려 부을 생각이었지만…….

최호섭과 뜻밖의 인연을 맺은 상황에서 시간을 길게 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

응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법이지.

애매한 2, 3년 차에게 고발하는 것보다 치프에게 고발하는 편이 효과도 더 확실할 테고.

“치프, 저 사실은… 김슬기 선배 건으로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

최호섭은 이믿음의 폭로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서 처음에는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최호섭이 야간에 음주를 한다.

간호사에게 보복성 오더를 내린다.

신규 간호사를 성희롱 및 성추행한다.

하나만 해도 의국이 뒤집힐 만한 행동을 무려 세 가지나 했기 때문이다.

‘이 녀석, 지금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건가?’

그래서 최호섭은 도리어 이믿음을 의심하기도 했다.

일을 잘한다고 칭찬해 줬더니 선배 레지던트를 깎아내린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믿음을 향한 의심은 곧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믿음이 내민 휴대폰에는 동영상이 재생 중이었다.

동영상 속 김슬기는 드레싱 카트를 밀며 이동하는 간호사와 함께 병동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문제는 김슬기가 간호사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고, 팔뚝이나 손목 같은 부위를 더듬었다는 점이었다.

그 발칙한 행동에 최호섭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 새끼가 돌았나.

환자 관리하기도 바쁜 놈이 감히 간호사를 추행해?

대가리 안에 든 뇌는 장식품이란 말인가.

“이믿음.”

“네, 치프.”

“근무한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 이런 건 어떻게 다 알게 됐지?”

최호섭은 자신조차 모르는 정보들을 이믿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갑질하는 이야기는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어제 도움을 드린 사건이 있어서 빨리 친해졌습니다.”

“…….”

“음주의 경우는… 냉장고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소주가 든 사이다 병을 발견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믿음의 똑 부러진 대답에 최호섭은 할 말을 잃었다.

성추행 CCTV 영상까지 두 눈으로 본 터라 이믿음을 믿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픽스 턴 때부터 일을 잘한다고 귀여워해 줬더니…….

결국 이렇게까지 기어오르는 건가.

김슬기가 레지던트들을 까맣게 속여 왔다는 배신감.

그런 김슬기를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두 감정이 범벅이 되면서 최호섭은 기분이 나락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감정의 끝은 분노였다.

어디 새파란 레지던트 1년 차 주제에 의국을 농락해?

“이믿음, 이제 보니 너 일만 잘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네가 아니었으면 김슬기가 괜찮은 녀석이라고 착각할 뻔했어.”

“착각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윗 연차 선배들께는 엄청 깍듯하더라고요. 아래 사람들한테는 안 그래서 문제지만요.”

“하긴, 밑에서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지.”

최호섭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믿음의 폭로는 잘 들었다.

남은 건 사실관계를 좀 더 철저하게 파악한 뒤 김슬기를 징계하는 일뿐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김슬기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최호섭은 그 정도로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차갑게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일단 당직실로 돌아가자. 넌 잠깐 김슬기의 주의를 끌고 있어. 소주가 들었다는 사이다 병부터 확인해 볼 테니까.”

“네, 치프.”

최호섭은 이믿음과 함께 당직실로 복귀했다.

그가 다시 당직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김슬기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최호섭은 보통 당직실보다 회의실에서 공부하는 걸 선호했으니까.

이믿음이 영리하게 김슬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최호섭은 냉장고를 연 뒤 싱싱칸 뒤쪽에 숨어 있는 사이다 페트병을 발견했다.

뚜껑을 열자 알싸한 알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것마저도 이믿음의 말이 옳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김슬기는 병원에서 음주를 했던 것이다.

레지던트 1년 차 주제에 어디서 이렇게 나쁜 짓만 골라서 배웠단 말인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턱!

냉장고를 닫은 최호섭은 가만히 김슬기를 노려보았다.

그의 살벌한 시선을 느꼈는지 김슬기도 최호섭을 응시했다.

“치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오늘 저기압이신 것 같습니다.”

예전이라면 곱게 들렸을 말이 지금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기압도 보통 저기압이 아니지. 슬기야.”

“네, 치프.”

“앞으로 힘내라. 의사 생활, 네 생각보다 훨씬 만만치 않을 테니까.”

최호섭은 김슬기의 어깨를 툭툭 치고 당직실을 떠났다.

* * *

“치프가 왜 저러지? 저녁에 뭘 잘못 먹었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슬기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시원하게 웃었다.

내가 치프에게 김슬기의 악행을 폭로한 시점부터.

김슬기의 몸속에는 시한폭탄이 장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인에게 닥칠 불행과 재앙을 모르는 김슬기를 보고 있자니 실소가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너 치프랑 무슨 이야기 했냐?”

“인턴 생활이 할 만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했고요.”

“또 눈치 없이 내 욕한 건 아니겠지?”

김슬기가 가자미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태생적으로 의심이 많은 김슬기였다.

그 의심으로도 작금의 상황을 극복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럴 리가요. 만약 그랬으면 치프가 그냥 당직실을 나가지 않았겠죠. 슬기 선배에게 한소리를 하면 했지.”

“뭐, 그것도 그렇긴 하네. 넌 앞으로 입 다물고 일만 해라.”

“…….”

“아까 어깨 주무르는 일 때문에 콜했다고 이야기했을 때 얼마나 식겁했는지 알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

“뭐해? 대답 안 하고?

“선배가 입 다물고 일만 하라고 하셔서.”

“멍청아,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지. 어휴, 일은 그렇게 잘하면서 눈치는 또 이렇게 없는 인간은 살다 살다 처음이네.”

김슬기가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단 말이지.’

의대에 입학한 후부터 줄곧 천재 연기를 계속해 왔다.

뛰어난 활약을 하며 스승의 눈에 띄었고, 펠로우 과정을 배우기도 했다.

그런데 김슬기를 만나면서 내 포지션이 살짝 바뀌었다.

일 잘하는 고문관 스타일로.

일 못하는 고문관이면 아예 쓰레기로 낙인찍혀 구박만 받을 테니까.

어쨌든 살짝 모자란 척하면서 나쁜 놈을 엿 먹이기는 기분은 짜릿했다.

전생은 물론이요.

회귀 후 1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재미가 있었다.

이러다간 고문관 역할에 중독이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응급실에 내려가면 손명환 환자라고 있거든? 심전도 검사 하고 상태 확인 좀 하고 와.”

“네.”

응급실 환자를 살피는 것은 본래 레지던트 1년 차의 일이었지만 김슬기는 내게 가뿐히 떠넘겼다.

조만간 김슬기에게 닥칠 재앙을 알고 있으므로.

나는 기꺼이 응급실로 내려갔다.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손명환 환자의 전자의무기록부터 살폈다.

-C.C(주 호소): 흉통, 심계항진(가슴 두근거림).

-혈압은 80mmHg/40mmHg.

-지병으로는 당뇨병.

-심전도 상으로는 ST 분절이 급속도로 성장한 급성 심근경색 소견.

환자의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음에도 처치는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설하용 니트로글리세린 복용.

혈전 억제를 위한 아스피린 복용.

혈전 용해제 유로키나제 IV 투입 등등.

환자의 검사 기록을 꼼꼼히 살피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환자가 그 환자 같았다.

순환기 내과에 대형사고 터지는 날은 오늘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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