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90화 (90/257)
  • 90화 제3장 트러블 메이커(5)

    “이봐요, 폭행죄로 고소당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금주를 하는 게 좋을까요?”

    이믿음의 말이 고요한 복도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인턴에게 협박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까.

    조희태의 얼굴에 공포와 초조함이 떠오른 것을 양소연은 놓치지 않았다.

    ‘와, 이 선생님 장난 아니네?’

    조희태도 놀랐겠지만 양소연 역시 적잖이 놀란 상황이었다.

    고작 근무한 지 이틀밖에 안 된 인턴이.

    순딩이 같은 외모에 싫은 소리와는 담을 쌓은 것 같은 인턴이.

    순환기 내과 병동 최악의 보호자를 단번에 굴복시켰다.

    더 놀라운 것은 보호자를 굴복시킨 방법이었다.

    이믿음은 대화를 녹음한 데다가 보호자가 자신을 떠민 것처럼 연기를 펼쳤다.

    폭행죄로 보호자를 얽어맬 수 있는 상상도 못할 방법을 선보였다.

    어떻게 즉흥적으로 이런 발상을 떠올릴 수 있는지, 양소연은 이믿음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기요, 선생님. 이번 일은 좋게 넘어갑시다.”

    조희태가 굽실거리며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간호사를 개똥으로 알던 그가 저 자세를 취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고소 이야기가 나오니까 넙죽 엎드려?

    에라이, 치사한 인간아…….

    “내가 알콜 중독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니까? 젊은 사람이 너그럽게 용서해 줘요.”

    “그건 보호자분이 하는 걸 봐서 결정하겠습니다. 앞으로 한 번이라도 병동에서 사고를 친다면… 그땐 경찰서에서 보게 될 겁니다.”

    “다시 한번 술 마시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개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간호사분에게 사과부터 하세요.”

    이믿음의 단호한 명령에 조희태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간호사 선생님, 미안합니다. 내가 딸 같이 너무 편하게 생각하다 보니 무례를 저질렀어요.”

    “…….”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조희태를 바라보며 양소연은 통쾌함을 느꼈다.

    설마설마했는데 저 뻣뻣한 고개가 숙여지는 날이 올 줄이야.

    “여기 계신 의사 선생님을 생각해서 참는 거니까, 계시는 동안 얌전히 계세요. 아셨죠?”

    “암요, 그렇고말고.”

    보호자가 병실로 돌아가면서 스테이션에 모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양소연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두 번 다시 조희태가 음주 및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수명이 몇 년은 연장된 것 같았다.

    “이 선생님, 진짜 멋있었어요! 지켜보는 제가 다 조마조마했는데… 진상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셨는데요?”

    스테이션에서 근무 중이던 막내 김소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양소연도 질 수 없었다.

    “감사해요, 선생님. 저 진상 때문에 고혈압 올 뻔했는데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

    “운 좋게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그런 거죠, 뭐.”

    이믿음이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양소연이 지금까지 지켜본 이믿음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예의 바른 사람이 아까는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고 단호할 수 있었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의문이었다.

    “저런 사람은 건수를 잡아서 따끔하게 혼내 줘야 해요. 안 그러면 한없이 기어올라요.”

    “고소는 진행하실 건가요?”

    “아니요, 일단은 겁만 주는 선에서 끝낼 겁니다. 소송을 남발하면 병원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

    “엄밀히 따졌을 때 저 사람이 진짜로 저를 밀어서 넘어트린 것도 아니고요.”

    “그것도 그러네요. 하여간 이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양소연을 진심을 담아 재차 감사를 표현했다.

    당직실에 있던 이믿음은 사실 조희태의 난동을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아니, 모른 척해야 했다.

    그편이 자신에게 훨씬 편안할 테니까.

    그럼에도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간호사의 편을 들어주었으며 조희태를 깔끔하게 제압했다.

    그 선한 마음씨는 칭찬받아 마땅했다.

    “선생님, 잠깐만요.”

    스테이션 뒤쪽의 처치실로 들어간 양소연은 초콜릿과 사탕 같은 간식들을 잔뜩 챙겼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믿음의 의사 가운에 간식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이렇게 해 주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무슨 말씀이에요. 이걸로도 한참 모자란데. 피곤할 때마다 단 음식을 드시면 정신이 번쩍 드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녁 근무 잘 서세요.”

    “이 선생님도요.”

    “아, 참.”

    등을 보이며 걷던 이믿음이 갑자기 뒤를 돌았다.

    “이건 야간 근무 서시는 세 분하고 저만의 비밀인데요. 혹시 1년 차 김슬기 선배,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믿음의 질문 속에 담긴 의도를 양소연은 알 것도 같았다.

    병동의 넘버원 진상 보호자가 조희태라면.

    레지던트 넘버원 진상은 김슬기였으니까 말이다.

    “김슬기 선생님도 장난 아니죠. 본인이 처방을 깜빡 잊어 놓고 우리한테 역정 내는 때도 있어요.”

    “저는 보복성 오더도 맞아 봤어요.”

    “저도요.”

    양소연의 말에 막내와 2년 차 간호사가 지원 사격에 나섰다.

    “보복성 오더요? 쪼잔하게 그런 짓까지 해요?”

    이믿음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보복성 오더란 환자 치료와는 무관하게 간호사를 괴롭히기 위해 의사가 내리는 처방을 의미했다.

    이를테면 15분 간격으로 환자의 바이탈을 측정하라는 오더를 내리는 식이었다.

    15분마다 병실을 들락날락거려야 한다면 간호사가 다른 업무를 어떻게 보겠는가.

    이는 명백히 간호사를 엿 먹이는 처사였다.

    ‘생각보다 심각하잖아?’

    이믿음은 김슬기라는 악당이 순환기 내과 병동 자체를 망가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인턴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간호사들까지 괴롭히다니…….

    그렇다면 김슬기에게 좀 더 빠르게 정의의 철퇴를 맛보게 해 줘야 할 것이다.

    “선생님들, 김 선생님에게 당한 거 전부 말씀해 주세요. 제가 기억했다가 김 선생님 좀 혼내 주게요. 방금 저 보호자한테 했던 것처럼요.”

    이믿음의 말에 간호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억울한 사연을 토해 냈다.

    개중에는 심지어 신체 접촉이 포함된 성희롱까지 있었다.

    이믿음은 열정적으로 사연들을 기록한 뒤 당직실로 돌아갔다.

    * * *

    진상 보호자를 제압하고 당직실로 돌아온 나는 잠시 심전도 판독 공부를 멈췄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이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총알은 충분하려나?’

    나는 메모를 살피며 김슬기의 악행을 총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오늘 냉장고 청소 중 확인한 음주가 있었다.

    소주가 든 사이다 병이 냉장고에 아직 존재한다는 점.

    당직 근무 중인 김슬기에게서 술 냄새를 맡았다는 간호사가 있다는 점.

    이 두 가지는 김슬기의 음주를 증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여기에 이것들까지 합쳐진다면… 완전히 골로 가는 거지.’

    나는 씨익 웃으며 간호사들의 사연들을 살폈다.

    김슬기가 내린 보복성 오더는 간호 기록지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조희태 건으로 겸사겸사 찾아간 보안실에서도 성과가 있었다.

    스테이션 앞에서 간호사에게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하는 김슬기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흩어져 있던 이 조각들이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제아무리 윗 연차의 사랑을 독식한 김슬기라도 한 방에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그 사건까지 며칠 남았으려나?’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달력을 응시했다.

    이번 달 안으로 순환기 내과에 대형 사고가 터진다.

    당시 당직의였던 김슬기의 실수로 부주의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가 사망한다.

    그로 인해 신원대학교 병원은 불명예스럽게 매스컴에 오르내리게 된다.

    언제가 될지는 몰랐지만.

    그날을 나는 디데이로 삼았다.

    환자는 살아남을 것이고, 김슬기는 그 사건을 기폭제로 내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들을 얻어맞아 재기불능 상태가 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단잠에 빠진 김슬기를 응시했다.

    잘 수 있을 때 푹 자 두는 게 좋을 거야.

    * * *

    순환기 내과 인턴 생활 3일 차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오전 5시에 기상했다.

    심전도 공부를 했던 데다가.

    조희태와 갈등이 있었고.

    김슬기를 물리치기 위한 계획을 짰던 탓에 잠은 1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온몸의 세포가 피곤하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이 시대 인턴의 수면 시간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주 7일 동안 고작 11시간.

    거의 잠을 못 자게 고문하는 수준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빈 시간에 요령껏 조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나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어제 간호사에게 받은 초콜릿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덕분에 가라앉았던 몸과 마음이 조금은 올라갔다.

    오전 6시부터 시작한 루틴은 남초롱과 함께 진행했다.

    어제저녁 내게 ABGA 요령을 배운 남초롱은 신입답지 않은 매서운 채혈 솜씨를 뽐냈다.

    채혈 성공률이 무려 70퍼센트.

    채혈만 놓고 보면 이미 A턴의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전생에서는 어처구니없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번 생에서는 제 활약을 하고 있는 남초롱.

    나는 그녀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또 나중에는 어떤 과를 선택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ABGA와 드레싱, 검사 동의서 받기 등의 루틴 잡을 마친 뒤 당직실로 돌아가자 오현준이 나를 불렀다.

    “믿음아.”

    “네, 선배.”

    “너 어제 제대로 못 잤지? 화장실에서 30분이라도 졸고 와라.”

    “아닙니다. 컨퍼런스 준비 도와드려야죠.”

    “됐으니까 빨리 자고 와. 컨디션 안 좋으면 실수하고, 실수하면 또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악순환에 빠진단 말이지.”

    “…….”

    “나도 경험해 봐서 다 알아.”

    오현준은 괜찮다고 말하는 나를 억지로 당직실 밖으로 쫓아냈다.

    밤새 자지 못한 나를 배려해 주는 그 마음씨가 곱고 고마웠다.

    역시 오현준은 김슬기와는 차원이 다른 따뜻한 사람이었다.

    모처럼 얻은 짧지만 소중한 여유 시간.

    나는 화장실 변기 칸으로 들어가 앉았다.

    두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명상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명상에 제대로 몰입하면 몇 시간을 잔 것처럼 개운해진다는 것을.

    명상은 양배추즙과 함께 내 건강을 책임질 또 하나의 무기 중 하나였다.

    명상을 마친 나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컨퍼런스를 듣고 회진을 돌았다.

    “이 선생님 정말 친절한 분이더라고요. 제가 어머님 모시고 이 병원 저 병원 참 많이 다녔는데 이 선생님 같은 분은 없었어요.”

    회진 도중 찾은 710호에서 조희태는 침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다.

    분명 어젯밤에 친 사고가 찔려서 그랬던 것이리라.

    속사정을 아는 나는 그저 이 상황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조희태의 위선에 구역질이 날 따름이었다.

    어쨌거나 조희태 덕분에 나는 교수님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보호자가 이 정도로 열정적으로 인턴을 칭찬하는 일이 드물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칭찬받는 나를 김슬기가 아니꼽게 쳐다보았던 것은 덤이었고.

    그래.

    지금 생활 실컷 즐겨 두셔.

    윗 연차 앞에선 순한 양이고

    아랫 연차 앞에선 여우가 되는 그 위선적인 껍데기가 벗겨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오전 회진이 끝나면서 본격적인 인턴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남초롱은 혈관 조영실 보조로.

    나는 병동 보조로서 업무를 보았다.

    어젯밤에 있었던 조희태 사건을 오전 근무 간호사가 인수인계 받았을까.

    콜폰으로 연락하는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

    예전과 달리 재촉하는 기색 또한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무난할 줄 알았던 오늘은 아침부터 심상치 않았다.

    심전도 실에서 심전도를 촬영하고 병동으로 복귀할 무렵이었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2층 채혈실에서 심정지 환자 발생. 다시 한번 안내 드립니다. 코드 블루…….”

    방송을 듣자마자 나는 의사 가운을 펄럭이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채혈실이라면 방금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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