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89화 (89/257)
  • 89화 제3장 트러블 메이커(4)

    소주가 든 사이다 병을 확인하고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김슬기의 약점을 찾았다.

    당직 근무를 설 때.

    아니면 자기 전에 음주를 하는 의사들이 간혹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병원 업무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병원에서.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사가 술을 마시는 걸 용납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나는 사이다 병을 한참 사랑스럽게 쳐다보다가 원위치 시켰다.

    아직은 이 무기를 사용할 때가 아니었다.

    음주로 김슬기를 걸고넘어진다고 해도 일회성으로 끝날 위험이 있었다.

    김슬기를 향한 윗 연차의 신임이 워낙 두터우니까.

    음주를 비롯한 약점 두세 가지를 한 번에 터뜨릴 때.

    그때야말로 김슬기는 완벽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믿음, 뭐하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김슬기가 당직실로 돌아왔다.

    나는 들뜬 마음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했다.

    “당직실 청소 중이었습니다. 냄새도 나고 먼지도 많고 지저분한 물건도 많아서요.”

    “청소 좋지. 이럴 때 보면 센스는 참 괜찮은데… 믿음아, 앞으로 넌 눈치만 챙기면 된다.”

    “뭐든지 선배를 따라가려면 한참 먼 것 같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김슬기가 호탕하게 웃으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 당직 근무가 아니었음에도 분주하게 처방 입력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 근무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근무 오프라고 해서 하루 종일 쉬는 건 아니었다.

    병원에서 오프란 야간 당직만 서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나 역시 김슬기 옆에 자리를 잡고 퇴원 처방 오더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심전도 검사는 밤이 더 깊어야 할 수 있을 듯했다.

    * * *

    자정이 넘은 시각.

    2, 3, 4년 차는 어느새 당직실로 복귀해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3년 차의 코 고는 소리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나는 소리처럼 우렁찼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다들 그만큼 피곤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레지던트 생활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이 억지로 깨우지 않는 이상 중간에 잠을 깨어 본 적이 없었다.

    “잘 수 있을 때 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오늘 같은 날, 자주 오는 거 아니다?”

    당직 근무 중인 오현준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오현준 옆자리에서 컴퓨터로 심전도 자료들을 암기하는 중이었다.

    하루 종일 일이 워낙 많아서.

    공부하려면 잠자는 시간을 줄이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어느새 현대판 주경야독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힘들지만 다른 도리는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려면 반드시 무언가를 희생해야 했다.

    “괜찮습니다. 평소에 잠이 없는 편이기도 하고 아직 둘째 날밖에 안 돼서.”

    “잠까지 줄여 가면서 무슨 공부하는데?”

    오현준이 내 쪽으로 얼굴을 내밀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김용 교수님이 심전도 공부를 해 보라고 과제를 내주셔서요. 그걸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순환기 내과 지원하게?”

    “아니요. 저는 흉부외과에 지원할 겁니다.”

    “너 학교에서 듣던 대로 괴짜구나. 너랑 친분은 없지만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인데, 슬기가 거지 같이 굴어도 딱 한 달만 참아.”

    오현준이 나를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김슬기 때문에 병원을 나가면 결국 내 손해라는 것이다.

    빅5 병원의 인턴 지원 시기는 이미 끝났기에 경력이 붕 뜰 수 있다.

    모교 병원이 주는 이득을 포기하는 일은 너무 아깝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김슬기도 그 점을 알기 때문에 인턴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으니까.

    약아 빠진 인간 같으니라고…….

    오붓하게 대화를 나눠 보니 오현준은 그래도 사람이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골고루 살필 줄 알았다.

    나라는 사람을 알아보려고 노력했으며 내가 겪는 고충을 이해해 주었다.

    힘든 의사 생활.

    또는 직장 생활을 버틸 수 있는 건 아마 오현준 같은 타입의 사람이 있어서 일 것이다.

    짧은 잡담이 끝나고 나는 다시 심전도 공부에 힘을 썼다.

    몸은 지치고 머리는 무거워서

    예전 생활 패턴대로라면 잘 시간이어서

    심전도 그래프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래프들을 머릿속에 쑤셔 넣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그 시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났다.

    처방 업무를 보던 오현준마저 졸린 닭처럼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오현준이 깨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제 당직 근무로 밤을 샌 탓에 잠이 쏟아졌지만 딱 1시간만 더 공부를 하고 잘 생각이었다.

    [욕망이 나를 만든다.]

    전생에 멘토로 삼았던 서 교수님이 해 주신 말씀이었다.

    내 욕망은 심전도 판독의 고수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 욕망으로 나를 빚어야 할 것이다.

    ‘무슨 소리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말다툼을 하는 듯한 소리였다.

    환자들이 자야 하는 깊은 새벽에 소란이라…….

    호기심을 느낀 나는 조용하게 병동 복도로 나갔다.

    때마침 나이트 근무 간호사와 덩치 좋은 남자 한 명이 스테이션으로 이동 중이었다.

    이 두 사람이 야밤의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듯했다.

    “양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두 사람이 스테이션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양소연에게 물었다.

    “이 선생님, 안 주무셨어요?”

    대답을 하는 양소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치 내가 구세주라도 되는 것마냥.

    그녀가 곁에 있는 남자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다는 걸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분은 710호 이순재 환자분 보호자분이신데요.”

    “네.”

    “병실 라운딩을 하는 도중 보호자분이 술 드시는 걸 확인했어요. 드시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화가 나셨나 봐요.”

    보호자 앞이라서 그런지 양소연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속에서는 열불이 끓고 있으리라.

    얼마나 상식이 없으면.

    병실에서 남들이 다 자는 야밤에 술을 마실까, 하고 말이다.

    물론 나 역시 양소연과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이었다.

    병원은 드라마처럼 감동적이면서 애잔한 사연이 펼쳐지는 장소인 것과 동시에.

    추잡하고 추악한 일이 펼쳐지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아니, 씨발. 내가 떠들기를 했어? 아니면 바스락거리면서 안주를 먹기를 했어?”

    “…….”

    “조용히 술만 마시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성은 다짜고짜 반말을 지껄였다.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무례한 행동과 언사로 내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하… 이게 정말 사람 새끼인가.

    “환자분, 병원에서 음주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입원 전에도 설명을 드렸어요.”

    “환자만 안 마시면 되는 거 아닌가? 난 건강하니까 상관없잖아?”

    “환자가 됐든 보호자가 됐든 음주는 하시면 안 돼요. 그게 규칙이에요. 며칠 전부터 계속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양소연이 고분고분 타일렀음에도 보호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렸다.

    이에 겁을 먹은 듯 움츠러드는 양소연.

    이제 내가 나설 차례가 되었다.

    “양 선생님, 잠깐 저 좀 보시죠. 보호자분은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넌 뭔데?”

    “의사입니다.”

    의도적으로 인턴이라는 말 대신 의사라는 표현을 쓴 뒤 나는 양소연을 스테이션 안쪽으로 불렀다.

    양소연에게 보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보호자의 이름은 조희태.

    순환기 내과의 초특급 진상 보호자.

    입원한 뒤로 줄곧 병실에서 술을 마신단다.

    낮에 마시다가 걸려서 최근엔 밤에 마시는 중이었으며 한 번은 다른 보호자에게 술을 권했던 전적도 있다고 했다.

    “선생님, 저 인간 때문에 진짜 죽겠어요. 저 인간 때문에 다들 나이트 근무 안 서려고 난리도 아니고요.”

    하소연을 하는 양소연에게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환자와 심리적으로, 거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스태프는 누가 뭐래도 간호사였다.

    그러니까 환자나 보호자가 진상이면 가장 곤란한 스태프도 간호사였다.

    조희태 같은 초특급 진상이 있다면 그 고충은 말도 못할 것이다.

    “제가 해결할 테니까 선생님은 가만히 계세요.”

    “그럼 너무 죄송한데…….”

    “죄송이 싫으면 팝송하세요. 전 팝송을 좋아하니까.”

    내 말장난에 양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름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던진 농담인데 효과는 최악이었다.

    회귀를 했어도 이놈의 유머 감각은 성장할 줄 모르는구나.

    “흠흠, 하여튼 껴들지 말고 지켜만 보세요. 알았죠?”

    나는 양소연과 말을 맞추고 스테이션으로 복귀했다.

    내가 새로운 상대임을 인식했는지 조희태는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보호자분.”

    “왜?”

    “병원은 보호자분이 술을 드시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부로 음주는 자제해 주세요.”

    나는 조희태를 상대고 강하게 나갔다.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켠 채.

    병원에서 진상이라 불리는 환자와 보호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경우는 병원의 형편없는 서비스와 스태프들의 성의 없는 치료 때문에 진상으로 변한 환자들이었다.

    이 경우 의료 스태프들에게도 상당한 잘못이 존재했다.

    일이 힘들거나 다른 환자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애먼 환자에게 푸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부류의 진상은 엄밀히 말하면 진상이 아니었으므로 스태프가 잘못을 인정하면 쉽게 진정시킬 수 있다.

    그리고 대망의 두 번째 경우.

    환자와 보호자가 선천적인 진상인 케이스였다.

    바로 눈앞에 있는 조희태처럼 말이다.

    안하무인에 적반하장이 기본 옵션이 이들은 철없는 망아지와 같은 인간들이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경우의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할 때는 단호해야 한다.

    좋게좋게 말해서 알아듣는 것은 상대가 사람일 때만 가능한 법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남한테 피해를 안 주고 조용히 혼자만 마신다고 하잖아. 젊은 사람이 그 정도 말귀도 못 알아들어?”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병실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피해입니다.”

    “…….”

    “보호자분 지금 술 냄새 나시는 거 압니까? 보호자분이 소란을 일으켜서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분들 깬 건 알고 계시고요.”

    “하… 씨발 졸라 짜증 나게 하네. 너 이름 뭐야? 이믿음? 내일 회진 돌 때 교수한테 다 불어 버릴 거야.”

    “…….”

    “젊은 놈이 보호자 무서운 줄 모르고 싸가지 없게 군다고.”

    “불리한 건 보호자분일 것 같습니다만…….”

    “내가?”

    코웃음을 치는 조희태.

    “지금 저희가 나누는 대화 다 녹음 중이거든요.”

    나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조희태에게 보여 주었다.

    순간 조희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황한 표정이 깨소금 맛이었다.

    “의… 의사란 놈이 보호자 동의 없이 마음대로 녹음해도 되는 거야?”

    “대화 당사자가 하는 녹음은 동의가 필요 없습니다. 법적인 효력도 가지고 있고요.”

    “야, 그거 내놔. 빨리!”

    술에 취해서 판단력이 흐려졌을까.

    위기감을 느낀 조희태가 휴대폰을 빼앗기 위해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어! 어! 저를 지금 떠미시는 겁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는 1살 때부터 갈고닦은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CCTV의 촬영 각도를 정교하게 계산한 뒤

    조희태가 나를 밀지 않았음에도 민 건처럼 보이게 하고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넘어진 연기를 선보인 직후 나는 곧바로 휴대폰의 녹음을 껐다.

    그리고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 녹음 파일이 있는 데다가 CCTV에 보호자분이 저를 미는 게 찍혔네요.”

    “뭐… 뭐라고? 난 널 민 적이 없어.”

    조희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희태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고

    나는 대화의 주도권이 완벽하게 내게 넘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게 사람을 봐 가면서 까불어야지.

    “양 선생님, 제가 혼자 넘어졌나요? 이런 상황에서 혼자 넘어지는 게 가능한가요?”

    “아… 아니요.”

    “심지어 당신이 떠민 걸 입증해 줄 증인까지 있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봐요, 폭행죄로 고소당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금주를 하는 게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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