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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88화 (88/257)
  • 88화 제3장 트러블 메이커(3)

    “선배님.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김용 교수님 전화라서… 네, 교수님. 이믿음입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가운에서 콜폰을 꺼냈다.

    김용 교수의 전화는 당연히 없었다.

    단지 이 거지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전화 받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뿐.

    “네.”

    […….]

    “지금 연구실 말씀이십니까? 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왼손으로 쥐었던 콜폰을 다시 가운에 넣었다.

    김슬기가 내 왼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른손으로 콜폰을 쥐었다면 진짜 통화가 아니라는 것을 들켰을 것이다.

    짧은 순간에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고려하며 연기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순발력이었다.

    만약 의사를 관두게 되면 연예계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교… 교수님이 왜 너한테 전화를 하셨는데?”

    김용 교수가 갑자기 나를 찾았다는 의아함.

    내게 볼일이 생겨 농양 절개 배농술을 떠넘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쾌함.

    그 두 가지 감정이 섞인 김슬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굳이 따지자면 후자의 감정이 컸으리라.

    못돼먹은 인간.

    “오전 컨퍼런스가 끝나고 교수님이 저를 호출하셨던 거 기억하시죠?”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그때 전하지 못한 말씀하고 자료가 있다고 하셔서요. 지금 오라고 하시는데…….”

    “가 봐. 교수님이 부르시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처치는…….”

    “별 수 있나. 내가 해야지. 빨리 가.”

    “최대한 빨리 뵙고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병실을 빠져나와 본관 1층 로비로 이동했다.

    내가 자리를 비웠으니 처치는 꼼짝없이 김슬기가 해야 할 것이다.

    혼자 씨발거리며 처치하고 있을 김슬기를 상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번 작전이 교묘했기에 아마 들킬 염려는 없을 것이다.

    일단 김용 교수가 오전에 나를 따로 불렀다는 사실이 팩트였다.

    팩트 위에 살포시 올라간 거짓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교수님, 혹시 어제 오후에 믿음이를 호출해서 보셨나요?

    레지던트 1년 차인 김슬기가 감히 내과 교수에게 그런 건방진 질문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

    나는 1층 로비를 떠돌아다니며 생각에 잠겼다.

    즉흥적인 연기로 김슬기의 처치를 떠맡지 않은 건 좋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반쪽짜리 승리였다.

    편안하고, 정상적인 인턴 생활을 위해선 김슬기 자체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김슬기를 무력화하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사실 고발이었다.

    심봉사 동아리에서 친분을 다진 3년 차 레지던트.

    그에게 김슬기의 불합리한 행동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쉬운 만큼 부작용 또한 존재했다.

    윗 연차 레지던트들이 김슬기를 예뻐하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이제 막 인턴 생활을 시작한 내가 김슬기의 악행을 고발한다?

    이 경우 반대로 내가 철부지에 윗사람을 헐뜯는 나쁜 놈이 될 확률이 컸다.

    그러므로 김슬기에게 엿을 먹이려면 좀 더 결정적인 카드를 손에 쥐어야 했다.

    * * *

    순환기 내과 당직실.

    타다다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김슬기는 두 팔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경과 기록지.

    신환(처음 입원한 환자)의 입원 기록지.

    주치의를 맡고 있는 환자들의 처방 입력.

    거기에 관상동맥 중재술 등의 시술 기록지까지.

    레지던트 1년 차의 업무는 컴퓨터 앞에서 시작해서 컴퓨터 앞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김슬기는 가끔 자신이 환자를 보러 병원에 있는 건지.

    타이핑을 하기 위해 병원에 있는지 헷갈리곤 했다.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고 레지던트 1년 차 동기인 오현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다크 서클이 입술까지 내려왔는데?”

    “치프한테 된통 깨졌거든. CAG(관상동맥 중재술)어시스트 제대로 못한다고.”

    오현준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치프한테 잘못 걸리면 누구도 얄짤 없지. 그냥 재수 똥 밟았다고 생각해.”

    “똥을 너무 밟았더니 똥독이 올랐나 봐. 진짜 죽을 맛이다.”

    “남초롱인가 걔는 좀 어때? 개가 처치실 인턴이잖아.”

    김슬기는 남초롱에게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이성적인 관심 같은 건 아니었다.

    그에게 인턴이란 그저 그의 발을 대신하는 수족에 불과했으니까.

    “일은 빠릿빠릿하게 잘하더라. 말귀도 잘 알아듣고. 당황할 땐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

    “믿음이는 어때? 걔 의대 다닐 때부터 날아다녔는데.”

    “눈치가 많이 없긴 한데…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더라고.”

    김슬기는 모처럼 인턴을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가 입력해야 할 처방 입력 몇 가지를 떠넘겨 봤는데 이믿음은 그것들을 깔끔하게 해치웠다.

    심지어 속도마저 자신이 직접 입력한 것보다 더 빠르게.

    “OCS(처방 전달 시스템)를 그렇게 빨리 익혔다고? 이틀 차면 더듬거리면서 퇴원 처방 내는 것도 힘들 텐데…….”

    “걔가 왜 그렇게 잘났는지야 나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 입장에서는 횡재 아니냐?”

    김슬기는 희죽 희죽 웃었다.

    이믿음이 잘나면 잘날수록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의 업무 부담은 줄게 된다.

    이 어찌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야, 인턴 좀 적당히 좀 부려 먹어. 인턴은 네 노예가 아니야. 네가 보살피고 가르쳐 줘야 하는 애들이라고.”

    오현준의 비난을 김슬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멍청하기는.

    그러니까 네가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귀찮은 일은 아랫사람한테 떠넘기고.

    나는 윗사람 눈에 잘 보이는 일을 처리해야 인정받는 걸 아직도 모르냐?

    출발선은 같아도 넌 금방 내 밑이 될 거다.

    “어차피 걔네들도 레지던트 되면 배울 일이잖아? 난 그냥 미리 경험을 시켜 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쥐 잡듯이 잡다가 애들 관두면 어떻게 할래?”

    “관두면 자기네만 손해지. 빅5병원에서 나가리되면 어디로 가려고.”

    “너도 참 독하다, 독해.”

    오현준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원래 세상은 독한 사람만 살아남는 법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당직 때 한 잔 오케이?”

    “오케이는 무슨. 너 몰래 술 마시다가 걸리면 골로 간다.”

    “새끼, 안 걸리면 되는 거 아니야.”

    김슬기는 조심성이 지나친 오현준에게 짜증을 부렸다.

    동기라는 녀석이 이렇게 마음이 안 맞아서야 원…….

    “윗 연차들 다 잘 때 두세 잔 홀짝거리는 게 죄냐? 그럼 우리는 어디서 스트레스를 풀고?”

    “몰라, 너 혼자 마시든가 말든가 맘대로 하셔.”

    “쪼잔한 새끼.”

    김슬기는 오현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처방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 * *

    내과 휴게실.

    나는 조영실 업무를 끝낸 남초롱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 메뉴는 컵라면과 샌드위치.

    시도 때도 울리는 콜폰 때문에 식당에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식사 도중 응급 콜이 오면 식판에 담긴 음식을 다 버리고 병동으로 올라와야 하니까.

    인턴 때는 대충 그리고 빨리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 최고였다.

    “혈관 조영실 업무는 어땠어?”

    “첫 근무라 정신없더라. 다른 선배들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 혼자만 병풍인 된 느낌도 들고. 믿음이 너는?”

    “여기저기서 불러 대니까 정신이 없더라. 그것만 빼면 뭐, 나쁘지 않았지.”

    흉부외과 부교수였던 내겐 인턴의 업무 난이도는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나를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김슬기뿐이었다.

    김슬기 때문에 여유 시간을 낼 수 없었고.

    여유 시간이 없어서 김용 교수가 준 심전도 파일을 공부하지 못했으니까.

    “믿음이 너야 워낙 야무지게 일을 하니까 걱정이 안 되긴 하지만.”

    “아니, 제발 걱정해 줘. 나도 한참 걱정받을 때야. 걱정도 꽤 좋아한다고.”

    “너도 참.”

    남초롱이 꺄르르 웃었다.

    하는 업무가 달라서 남초롱을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오늘 남초롱이 웃는 걸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노예 같은 인턴 생활을 하면서 웃음과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은 지옥에서도 웃을 수 있는, 대단한 인간일 것이다.

    참고로 남초롱은 혈관 조영실에서.

    나는 병동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주 후에는 근무 교대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끼니를 때우며 대화를 이어 나갔는데,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이미 전생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였다.

    딱히 업무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아 참, 믿음아. 나 ABGA(동맥혈 채혈) 요령 좀 알려 주면 안 돼?”

    “ABGA?”

    “응, 간호사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너 ABGA 한 번도 실패 안 했다고 하던데? 간호사 선생님들도 많이 놀라더라.”

    “안 그래도 이제 ABGA 할 때 됐으니까 병실 같이 돌자. 입으로만 떠드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백번 낫지.”

    “땡큐.”

    “이거 먹어.”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나는 가운 주머니에서 꺼낸 양배추즙을 남초롱에게 건넸다.

    “웬 양배추즙?”

    “앞으로 계속 빵이랑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텐데, 그러면 속 버려. 없던 역류성 식도염하고 위염까지 생길 거야.”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래 봬도 양배추즙은 인턴 생활을 버티게 해 줄 나의 필살기 중 하나였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속이 쓰려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루 종일 가슴이 타들어 가는 느낌 때문에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미리 대비해야지.”

    나는 먼저 양배추즙을 깔끔하게 짜 마시고 포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으… 비려.”

    남초롱도 나를 따라 양배추즙을 먹고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꼭 사랑이가 어렸을 때 억지로 당근을 먹는 모습 같아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사랑이가 보고 싶네.

    부모님도, 외가 어르신들도.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곧바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드레싱 카트를 끌고 병실을 돌며 ABGA를 시작했다.

    내가 먼저 두 번 정도 시범을 보인 뒤 남초롱이 직접 ABGA를 시작했다.

    당연히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환자들의 혈관이 굵고 탄탄한 편이긴 했지만.

    남초롱은 제법 손재주가 좋았다.

    총 10번의 시도 중 실패한 횟수는 단 3번뿐이었다.

    한 번 실패한 환자를 3번 이상 찌른 경우도 없었다.

    이런 인재가 OT 때 과음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니…….

    전생의 그녀를 떠올리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고마워, 믿음아. 덕분에 내일 아침에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걱정 마. 내일 아침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잘할 것 같으니까.”

    나는 남초롱의 사기를 북돋워 준 뒤 남자 당직실로 이동했고, 남초롱은 여성 인턴 당직실로 이동했다.

    병동 복도를 걸으며 문득 바라본 창밖은 어두웠다.

    꼭두새벽에 기상해서 ABGA를 한 게 아까 같은데 벌써 밤 9시가 되었다.

    병원은, 인턴 생활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아무도 없네.’

    당직실에 들어가니 처방 입력을 하고 있어야 할 레지던트들이 보이지 않았다.

    잠깐 담배라도 피우러 자리를 비운 걸까.

    나는 악취를 뿜어내는 냉장고 청소부터 하기로 했다.

    청소 역시 인턴 잡 중 하나였다.

    유통 기한이 지난 음식물을 버리고.

    걸레로 지저분한 내부를 닦던 도중 나는 수상한 사이다 페트 병을 발견했다.

    뭐랄까.

    사이다 병이 음료수 칸에 놓여 있지 않고 싱싱칸 뒤쪽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사이다 병뚜껑을 열었다.

    나를 반겼던 것은 의외로 청량한 탄산 소리가 아닌 코를 알싸하게 만드는 알콜 향이었다.

    아하!

    이렇게 몰래몰래, 야금야금 음주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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