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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87화 (87/257)
  • 87화 제3장 트러블 메이커(2)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공부법은 암기다. 암기는 무식하지만 동시에 무식할 만큼 빠르고 강하다.]

    김용 교수가 내게 보내 메일은 암기의 중요성으로 시작해서 암기로 끝났다.

    암기가 매력적인 이유.

    독창적이면서도 섬세한 심전도 판독마저도 암기가 뒷바탕이 되어야 함을 설명했다.

    ‘암기가 비결이셨구나.’

    나는 메일을 읽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나는 심전도를 판독하느라 심혈을 기울였다.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전기 신호 속에 숨어 있는.

    심장이 보내는 은밀한 메시지를 읽기 위해서.

    하지만 다양한 심전도 케이스와 패턴을 통째로 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의대에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많은 심전도를 어떻게 다 외우냐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용 교수의 심전도 판독 요령은 의외로 암기였다.

    외우고

    또 외우고

    외우지 못한 심전도가 나오면 또 외우고.

    김용 교수를 심전도 판독의 대가로 만든 것은 8할이 암기였다.

    ‘어마어마하네.’

    첨부 파일을 확인한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김용 교수가 정리하고 분류한 심전도 그래프는 무려 2천 개에 육박했다.

    김용 교수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김용 교수가 얼마나 독하게 암기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보내 준 첨부 자료를 다 외우면 나를 찾아오거라. 간단한 테스트를 보고 테스트에 합격하면 다음 자료를 주마.]

    인턴 근무를 하는 것도 힘든데

    이걸 언제 다 외워서 테스트에 합격할까.

    오르지 못한 산을 마주한 것처럼 막막했지만 나는 금방 자신감을 되찾았다.

    다소 가학적인 표현인데.

    전생에서부터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걸로는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암기는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종목 중의 하나였다.

    -시간을 쪼개서 다양한 심전도 케이스를 암기한다.

    -적어도 순환기 내과 인턴 생활을 하는 동안에 1차 테스트를 통과한다.

    나는 야심 찬 포부를 안고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 * *

    순환기 내과에서 인턴을 시작한 둘째 날.

    예상했던 대로 나는 미친 듯이 바빴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던 신데렐라도 나만큼 힘든 하루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환기 내과 병동 간호사들은 수시로 나를 찾았다.

    -이 선생님, 703호 정병욱 환자 심전도 검사 좀 해 주세요.

    -707호 이한나 환자 관장 해 주세요.

    -오늘 퇴원하는 유태민 환자 퇴원 처방 오더 안 들어가서 퇴원 못하고 있어요. 퇴원 처방 오더 내주세요.

    콜폰은 한시도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무리 늦어도 콜폰과 콜폰 사이의 간격은 10분을 넘지 않았다.

    그러니까 10분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는 뜻이었다.

    검사실, 순환기 내과 병동, 다른 과 병동, 중환자실, 응급실, 당직실 등등.

    나를 하루 종일 병원 이곳저곳에서 발품을 팔았다.

    오래 걸어서 발바닥이 아팠던 게 얼마 만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고 해도.

    군 입대부터 시작한다면 시간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농담이 있지 않은가.

    의사에게는 그런 혹독한 시간이 바로 인턴과 레지던트 1년 차였다.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갈리는, 괴로운 시기였으니까.

    심지어 내가 일하는 이 시대에는 전공의법도 없었다.

    전공의법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전공의의 수련 시간이 주 80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법이었다.

    전공의의 과로를 방지하고 휴식을 보장하자는 차원에서 제정된 법안이었다.

    이 시대에는 최후의 보루 같은 전공의법마저 없으니 레지던트와 인턴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하지만 힘든 것과는 별개로 나는 인턴 생활이 퍽 즐거웠다.

    병원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환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휴, 간신히 내 시간이네.’

    포터블 심전도 기기를 반납한 뒤 병동으로 복귀한 나는 당직실을 찾았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서 김용 교수의 심전도 파일을 확인하려고 했다.

    “야, 인턴이 감히 쉴 여유가 있냐? 둘째 날부터 물이 빠지면 앞으로는 더 가관이겠다?”

    드르르륵.

    때마침, 아니 기다렸다는 듯 김슬기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본인도 인턴 때 고생했을 텐데 나를 걸고넘어지는 걸 보면 양반은 못 되는 듯했다.

    “701호실 이형동 환자 CAG(관상동맥 조영술) 동의서 출력하러 왔습니다.”

    “아? 그래? 또 할 일은?”

    “다른 환자 검사 동의서도 받고, 라운딩 돌면서 환자 상태도 살필 계획입니다.”

    나는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김슬기가 감히 꼬투리를 잡지 못하도록.

    “검사 동의서 받으러 가는 길이면 네가 수술 동의서도 같이 받아라. 난 오더 입력할 게 너무 많다.”

    “죄송하지만 그건 선배님이 하셔야 하는 일 아닙니까?”

    “뭐라고?”

    내가 대든다고 생각했는지 김슬기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공격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검사 동의서는 인턴이 받고 수술 동의서는 레지던트가 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 이믿음.”

    “네.”

    “너 이상한 곳에서 융통성이 없구나. 네가 동의서를 받나, 내가 동의서를 받나 무슨 차이가 있냐?”

    “…….”

    “수술이면 또 어떻고 검사면 또 어떻고. 시키는 대로 해.”

    “알겠습니다.”

    김슬기의 태도가 아니꼽고 거슬렸으나 일단 대답했다.

    김슬기가 언급한 환자들의 수술 동의서까지 함께 출력했다.

    ‘김슬기가 에이스 취급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네.’

    나는 처방 입력 중인 김슬기를 몰래 흘겨보았다.

    김슬기 같은 부류는 비단 병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직장에라도 한 명 이상씩은 꼭 있는 부류였다.

    -자기 할 일을 부하 직원에게 떠넘기는 상사 타입.

    -부하가 흘린 땀으로 자신이 잘난 것마냥 거들먹거리는 타입.

    전생의 나를 침몰시켰던 강태섭의 몇 단계 아래 버전이랄까.

    전생의 나는 김슬기 같은 인간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게 미덕인 줄 알았고.

    그렇게 일하면 나를 부려 먹는 윗사람이 나를 인정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알았다.

    모기에게 순순히 피를 빨려 준다고 해서 모기가 고마워하던가?

    천만의 말씀!

    김슬기 같은 부류에게 피를 빨리기 시작하면 나는 그저 말라 죽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전생에서 인턴 시절 폐급 소리를 들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생의 내가 폐급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심리적인 부담감으로 인한 수전증.

    또 다른 하나는 바보같이 남의 일을 하느라 정작 내 일에 집중하지 못해 저지른 실수들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동의서 서명받고 라운딩 하고 오겠습니다.”

    “오냐, 빨리 갔다 와라. 할 일 또 있다.”

    나는 병동을 돌며 검사 동의서와 수술 동의서의 서명을 받았다.

    동의서 서명을 받는 일은 단순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숨어 있는 일이었다.

    시술이나 검사 과정을 설명하는 건 편하지만

    부작용을 설명할 때 몇몇 환자와 보호자가 거부감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작용이 생기면 병원에서 책임지나요? 그 부분을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혹시 좀 더 안전한 검사 방법은 없나요? 조영제 검사 도중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등등.

    의심이나 걱정이 많은 환자와 보호자에게 서명을 받을 땐 특히 의사의 입이 중요했다.

    기계적인 태도보다는

    인간적인 태도로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서명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환자와 교감하는 게 특기인 나는 어렵지 않게 동의서를 받아 냈다.

    어떻게 보면 전생의 장점만 가져와서 활약했다고 해야 할까.

    “하상태 환자 수술 동의서 받았어?”

    내가 당직실로 복귀하자 김슬기가 물었다.

    “네.”

    “그 환자 동의서 받기 힘들었을 텐데. 엄청 깐깐하게 따지지 않아? 자기한테 문제가 생기면 병원이 책임진다는 문구를 넣어 달라고 생 때를 부리고 그러던데.”

    “좋게좋게 해결했습니다. 신원대학교 병원은 국내 5대 병원 중 하나고 교수님들도 전부 실력 있는 분이다.”

    “…….”

    “환자분도 그래서 신원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게 아니냐.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환자의 걱정과 염려를 충분히 들어 준 뒤 권위에 호소하는 것.

    이 방법은 전생의 내가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

    환자를 설득할 때 18번으로 사용하던 특기였다.

    “오, 대박인데? 너 눈치는 없어도 말빨은 좀 있다? 진상 환자를 구워삶아 먹을 정도면?”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도 감사하지 않으면서 감사한 척했다.

    김슬기는 하상태 환자에게 동의서 받는 것이 껄끄러워서 나를 대타로 내세웠다.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래 놓고 나중에 윗 연차 선배를 만나면 자기가 일을 잘했다고 우쭐거리겠지.

    가증스러운 인간 같으니라고…….

    나는 최대한 빨리 건수를 잡아서 김슬기를 퇴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남에게 이용을 당했던 건 전생으로 충분하니까.

    동의서 작성과 라운딩을 끝낸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처방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바쁘냐?”

    “네, 할 일은 많이 남았습니다.”

    “어허, 선배가 물어보면 없는 시간이라도 있다고 대답해야지. 믿음이 넌 다 좋은데 눈치만 없다? 컨퍼런스 때 커피도 그렇고.”

    멍청아,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싫은 거야. 진짜 눈치가 없는 건 너라고.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았다.

    “너한테 가르쳐 줄 게 있으니까 잠깐 따라와 봐.”

    “네.”

    앞장서는 김슬기를 따라 도착한 곳은 709호 병실이었다.

    창가 쪽에 앉은 환자의 침상 옆으로는 이미 드레싱 카트와 간호사 한 명이 대기 중이었다.

    ‘이 인간이 나를 노예로 부려 먹으려고 작정했나.’

    나는 환자를 확인하고 치를 떨었다.

    환자의 이름은 심준섭.

    이주 전 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을 받고 퇴원한 환자였다.

    다만 외래에서 경과 관찰 중 대퇴부에 심한 농양이 확인되어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이 환자분, 제가 오후에도 드레싱 했습니다.”

    “알아, 근데 2년 차 선배님한테 물어보니까 농양 절개 배농술을 하는 데 더 나을 거라고 하더라.”

    “…….”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천천히 따라 해 봐.”

    농양 절개 배농술은 처치 중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했다.

    부분 마취를 하고

    피부를 절개하고

    절개창 내부의 농을 짜낸 뒤 식염수로 소독하고

    배액관을 삽입한 뒤 배액관을 고정해야 한다.

    다만 농양 절개 배농술은 일반적으로 레지던트 1년 차부터 실시한다.

    그래서 인턴의 업무는 레지던트 1년 차가 실시한 농양 절개 배농술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처치까지 하나둘 떠넘기겠다, 이거지?’

    김슬기의 의도를 눈치챈 나는 속으로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김슬기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악독한 인간이었다.

    “가만히 서서 뭐 해? 의사 고시 실기 때 해 봤던 거잖아. 복습한다고 생각하면 돼. 나도 옆에 있으니까 쫄 필요 없어.”

    김슬기의 말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전생의 흉부외과 부교수였던 내가 고작 농양 절개 배농술에 겁먹어서 얼어붙었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이 상황을 타파할 묘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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