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86화 (86/257)
  • 86화 제3장 트러블 메이커(1)

    “어제저녁 흉부외과 양 교수님의 전화를 받았다.”

    “…….”

    “네게 개인적으로 심전도 판독 고급 과정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더구나.”

    김용 교수는 말을 마치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명백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인턴에게 심전도 판독 개인 레슨을 부탁한다고? 그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인턴 잡을 하기에도 벅찬 시기에 무슨 말도 안 되는 부탁을…….

    김용 교수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긴, 내가 김용 교수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교수급이 인턴을 개인적으로 교육하는 일은 전무후무했으니까.

    스승이라는 징검다리가 없었다면 아마 단박에 퇴짜를 맞았겠지.

    (그런 점에서 다시 생각해도 스승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양 교수님이 네 이야기를 덧붙이는데 믿을 수가 없더구나. 양 교수님 말로는 네가 천재라고 하던데?”

    “교수님 앞에서 말씀드리기는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재능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재능이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김용 교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했다.

    “재능이 있다면 증명해 보거라. 고급 심전도 판독을 배우고 싶다면 그만한 기본기를 갖춰야겠지.”

    “…….”

    “지금부터 심전도 결과지 몇 개를 줄 테니 해석해 봐. 통과한다면 가르침을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나는 김용 교수가 내민 3장의 심전도 결과지를 받았다.

    재능을 인정받기 위해 테스트를 치르는 일은 이제 익숙했다.

    긴장이 된다거나 초조하지는 않았다.

    심전도 판독의 대가 김용 교수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가 될 뿐.

    나는 심전도 판독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이마에 주름은 늘어나고 미간은 좁아졌다.

    ‘애초부터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군. 내가 귀찮았던 건가?’

    김용 교수는 해당 판독지가 기본기라고 했으나 막상 확인해 보니 중급 과정이었다.

    인턴과 레지던트 수준에서는 해독조차 어려웠다.

    전직 흉부외과 부교수였던 내가 힘겹게 판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참고로 보통 순환기 내과 의사들이 흉부외과 의사들보다 심전도를 더 잘 본다.

    흉부외과의 경우 판독이 애매한 심전도를 받으면 순환기 내과 의사에게 판독 요청을 보내기도 하고.

    “판독 결과를 말씀드리면 되겠습니까?”

    “벌써? 할 말이나 있고?”

    되묻는 김용 교수의 말투는 삐딱했다.

    김용 교수가 나를 성가신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순 없었다.

    인턴이 된 오늘 이 순간까지, 나는 다양한 성장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는 미움받을 용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김용 교수가 나를 조금 싫어하면 어떤가.

    고급 심전도 판독 과정만 배울 수 있다면 말이다.

    “첫 번째 결과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말해 봐.”

    “첫 번째 결과지는 정상입니다. 다만 V1에서 P-terminal force ≥0.04를 보이는 것을 보아 좌심실 비대를 의심은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가적인 심 초음파 검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

    “두 번째 심전도는 넓은 QRS군이 관찰되는 것을 보아 심방조기 박동입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는 것을 논리적인 근거를 대 가며 말하고 있었다.

    이에 김용 교수의 표정이 차차 변하기 시작했다.

    휘둥그레지는 눈동자.

    살짝 벌어진 입술.

    김용 교수는 명백히 놀라움과 경악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설마 인턴인 내가 중급 난이도의 심전도를 술술 읊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설명에 박차를 가했다.

    “마지막 결과지는 심전도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유도V2의 P파가 평평해 보이는 것을 보니 전극 위치가 흉부보다 너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똑 부러진 대답과 함께 찾아온 침묵.

    김용 교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운을 뗐다.

    “… 전부 정답이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다 맞출 줄이야…….”

    “…….”

    “이 정도면 따로 심전도 공부를 한 것 같은데? 맞니?”

    “네, 의사 고시 교재 말고도 전문 교재를 따로 사서 공부했습니다.”

    나는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듯이 하얀 거짓말을 했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흉부외과 부교수라고 밝혔다간 미친놈 소리를 들을 테니까.

    “어쨌거나 놀랍구나. 양 교수님 이야기를 듣고도 반신반의했는데… 이 정도면 천재 소리가 아깝지 않아.”

    김용 교수는 나를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흉부외과에 지원할 생각을 이미 굳혔다는데, 굳이 심전도까지 공부하려는 이유는 뭐니?”

    질문을 던지는 김용 교수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가 내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나도 한시름을 덜었다.

    “흉부외과에서 일하다 보면 검사 시간도 아까운 응급 환자가 응급실을 찾아온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그렇지.”

    “그럴 때 가장 빠르고 손쉽게 할 수 있는 검사가 심전도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흉부외과에서 심전도 검사를 하고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순환기 내과에 판독을 의뢰하면 되지만…….”

    “…….”

    “매번 순환기 내과에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또 야간일 경우 판독의는 당직 중인 레지던트 1~3년 차인데, 그분들은 판독이 완벽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전생의 어떤 사건을 떠올렸다.

    순화기 내과에 의뢰한 심전도 판독을 그대로 믿었다가 환자가 죽을 뻔했던 아찔한 사건을.

    심장내과는 정상이라고 했던 심전도가 나중에 조기박동이라고 불리는 부정맥의 한 종류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해당 환자는 병동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응급 수술을 받았다.

    그때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장기적인 관점을 봐서도 내 실력을 키우는 일이 절실했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영역과 내가 성장해야 하는 영역.

    나는 이 두 가지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심전도의 경우 명백히 후자였다.

    “흉부외과를 선택한 것도 놀라운 데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

    “그러면 그렇지. 양 교수님께서 내게 아무나 소개시켜 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널 잠시나마 의심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제가 교수님이었으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어딜 설치냐고 단박에 쫓아냈을 겁니다.”

    “하하하, 녀석도.”

    내 농담에 김용 교수가 껄껄껄 웃었다.

    “너만 한 수재라면 가르칠 맛이 나겠어. 흉부외과에서 멋진 서전이 나온다면 우리 과도 도움받을 일이 많을 테고 말이야.”

    “그럼 교육은…….”

    “당연히 합격이다. 하지만 교육 방식은 네가 기대하는 것도 조금 다를 거다.”

    김용 교수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심전도 판독의 대가 김용.

    나의 두 번째 스승.

    과연 그는 어떤 방식으로 나를 가르치려는 걸까.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 * *

    “정말이십니까? 허허…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는군요.”

    […….]

    “알겠습니다. 제가 성심성의껏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김용은 양순재와의 통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막 믿기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이믿음이 의대에 다니는 6년 동안 양순재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비공식적으로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인턴 주제에 말이다.

    ‘꼭 불가능한 건… 아닌 건가?’

    김용은 혀를 찼다.

    지금도 자신이 선별한 심전도 기록지를 또박또박 해석하던 이믿음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의사 고시를 준비하며 외운 심전도를 다시 읊는 것도 힘든 시기에 이믿음은 독자적으로 심전도를 해석해 냈다.

    이믿음이 천재라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믿음이 천재라면.

    양 교수 밑에서 6년을 수련했다면.

    종합 병원 수술실에서 특훈까지 받았다면.

    이믿음이 벌써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졸업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믿음처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했던 인물이 주변에 있었던가.

    김용은 주변의 잘난 의사들을 기억 속에서 하나둘 꺼내 봤다.

    다들 수재 소리를 들었다만 그들조차 이믿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대로 곱고 바르게 성장한다면 이믿음은 분명 대한민국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리라.

    ‘무엇보다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어서 마음에 든단 말이지.’

    사실 이믿음이 심전도를 배우고 싶은 이유를 댔을 때 김용은 깜짝 놀랐다.

    이믿음이 심전도 판독을 완벽하게 해냈을 때보다 더.

    최악 중의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준비성.

    다른 과 의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곧은 의지.

    실력으로 보나.

    인성으로 보나.

    이믿음은 평범한 인턴이 아니었다. 마치 몇십 년은 이 바닥에서 일해 본 듯한 노련미와 성숙미를 뽐냈다.

    이믿음과 같은 인재가 순환기 내과를 택한다면 좋겠지만 아마 이믿음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믿음은 김용이 자주 언급하는, 돌아보지 않는 눈빛을 가졌다.

    돌아보지 않는 눈빛이란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고집하는 사람을 일컫는 그만의 용어였다.

    연구실에 있던 김용은 아까 타 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오전은 비교적 널널했다.

    외래 업무는 오후에만 있었고,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할 시술도 없었다.

    모처럼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날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특별한 숙제가 떨어졌다.

    바로 이믿음을 교육하기 위해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들려오는 노크 소리.

    똑. 똑. 똑.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4년 차 레지던트 의국장 최호섭이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무슨 일이니?”

    “죄송하지만 이번에 교수님과 준비 중인 논문에 대해서 상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거기 앉거라.”

    김용은 책상 앞 소파를 가리키고 최호섭의 맞은편에 앉았다.

    “요새 의국에 뭐 어려운 일은 없고?”

    “교수님께서 잘해 주시는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아래 연차들도 사고를 안 치고 있는 데다가 환자 중에서도 특이할 만한 환자는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구나.”

    김용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인턴들, 너는 어떻게 보고 있니?”

    “아직 말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인턴과 레지던트 4년 차의 격차는 거의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인턴이 감히 4년 차에게 말도 못 섞는 게 일반적이었다.

    “2년 차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이믿음이란 친구가 일을 잘한다고 합니다.”

    “…….”

    “오전 라운딩 때 ABGA를 한 번도 실패 없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인턴이 신경 쓰이십니까?”

    “대단한 건 아니고, 단순하게 궁금해서 말이야. 어쨌거나 이거 한번 풀어 보겠니?”

    김용은 이믿음을 테스트했던 심전도 결과지를 최호섭에게 건넸다.

    최호섭 역시 전체적으로 야무지게 판독했지만 네 문제 중 한 문제를 틀렸다.

    그러니까 순환기 내과 4년 차보다 인턴인 이믿음의 심전도 판독 능력이 더 뛰어났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전도는 왜…….”

    “신경 쓸 필요 없다. 이제 논문 이야기를 하자꾸나.”

    김용은 최호섭과 10분 정도 대화를 나눈 뒤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믿음의 수준에 맞춰서 교육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믿음은 과연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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