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제2장 나는 인턴이다(5)
‘하… C턴이 들어왔구나. 그것도 괴짜로.’
강수정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감이 있는 것은 좋으나 지나친 자신감은 없느니만 못했다.
이믿음이 딱 그 꼴이었다.
이제 막 인턴 첫 근무를 시작했으면서 왜 이리 오만하단 말인가.
안 그래도 예민한 환자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덜컥 해 버린단 말인가.
ABGA는 가장 기본적인 검사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검사기도 했다.
사람의 혈관이란 로봇처럼 딱딱 정해진 게 아니었다.
환자의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 상태가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도 지금 이믿음 앞에 있는 환자의 채혈 난이도는 최상급이었다.
혈관 탄력은 떨어졌으며 장기 입원으로 인해 쓸 만한 혈관도 찾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말턴(말년인 인턴)조차 세 번이나 실수를 했을까.
‘또 한바탕 시끌하겠네.’
강수정은 잠시 후 환자가 난리 칠 것을, 이믿음이 레지던트에게 쥐 잡히듯 잡힐 것을 상상하곤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는 소란을 싫어하는 간호사였다.
“너무 염려 마시라니까요.”
강수정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여유가 넘치는 이믿음.
그가 주사기 포장지를 벗기곤 채혈에 나섰다.
스으윽.
스으윽.
환자가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이믿음은 태연하기만 했다.
알콜 솜으로 요골동맥(손목 동맥)을 닦아 낸 뒤 주사기를 손에 쥐었다.
“따끔합니다.”
푝.
주사 바늘이 혈관을 45도로 찌르고 들어가면서 주사기 머리 부분에 빨간 피가 고였다.
한 번에 혈관을 찾았다는 신호였다.
‘이걸 한 번에 한다고?’
강수정은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환자의 왼손 요골동맥은 그리 썩 좋은 채혈 부위가 아니었다. 오른손 요골 동맥에 비해 혈관 탄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믿음은 단번에 채혈에 성공했다.
말턴보다 더 능숙한 솜씨에 강수정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녀와 환자에게 보여 줬던 자신감에는 다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5분 동안 꾹 누르고 계셔야 해요. 그건 잘 알고 계시죠?”
“알다마다. 그나저나 새로 온 젊은이가 솜씨가 좋구먼.”
환자는 껄껄껄 웃으며 이믿음에게 받은 알콜 솜으로 채혈 부위를 꽉 눌러 지혈했다.
“난 앞으로 선생한테만 채혈을 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둬.”
“어르신이 원하신다면 해 드려야죠. 다만 저는 어르신이 저한테 채혈받는 것보다 빨리 퇴원하시는 걸 더 바라고 있지만요.”
노인의 말에 이믿음은 넉살을 떨었다.
도무지 인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인턴의 탈을 쓴 레지던트 같다고 해야 할까.
병실에서 ABGA 채혈을 끝낸 뒤 강수정은 이믿음과 다음 병실로 향했다.
“선생님, 제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죠?”
“아, 네. 근데 이 선생님은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보통 인턴 선생님들은 ABGA라면 치를 떠는데.”
“제가 사실은 전생에 흉부외과 교수였어요. 그래서 ABGA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생님도 참…….”
이믿음의 농담에 강수정은 깔깔깔 웃었다.
기습적인 농담에 꼼짝없이 당해 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이믿음이 능력 있는 인턴이라는 사실은 간호사들에게 희소식이었다.
인턴하고 환자가 싸우는데 괜히 간호사 등이 터질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어진 라운딩에서 이믿음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속전속결로 ABGA 채혈을 성공시켰다.
덕분에 환자도 행복했고, 강수정도 행복했다.
라운딩 시간이 줄면 줄수록 그녀가 스테이션에서 처리할 업무 시간을 줄일 수 있었기에.
“수정 쌤, 라운딩 벌써 끝났어요? 초턴(인턴을 생활을 막 시작한 인턴) 선생님하고 라운딩 한 거 아니었어요?”
“이번 달은 좀 편할 것 같아. 초턴 선생님 장난 아니었다니까. 넉살도 좋고 처치도 끝내줘. ABGA를…….”
흥분한 강수정은 이믿음의 활약상을 떠들어 대기에 바빴다.
* * *
ABGA 채혈.
수술 부위 및 도관 드레싱 등의 처치를 마치고 나는 당직실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하는 인턴 잡이었지만 별문제 없이 재빠르게 끝냈다.
비유하자면 수학과 교수가 초등학교 산수 문제를 푸는 느낌이랄까.
전직 흉부외과의 부교수였던 내가 인턴 잡에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믿음, 뭐해? 지금까지 라운딩 안 돌고.”
막 잠에서 깬 듯한 김슬기가 나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돌았습니다.”
“벌써 돌았다고? 그럼 루틴(인턴이 매일 반복해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까지 끝냈어?”
“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근무 첫날이라 30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너 일 처리가 꽤 빠르다?”
“어쩌다 보니 빨리 처리하게 됐습니다.”
“마침 잘됐다. 나랑 컨퍼런스 준비 좀 하자. 일단 회의실 청소부터 하고 컨퍼런스 자료 출력해서 자리에 올려놔.”
컨퍼런스란 매일 오전, 의국 내 스태프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갖는 것이었다.
입·퇴원 환자 경과 보고.
처치 및 시술 스케줄 정리.
레지던트들의 케이스 스터디 등등이 컨퍼런스에서 이뤄진다.
다만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김슬기가 나를 시종처럼 부려 먹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제 새벽 중환자실 라운딩을 돈 것도 나였고.
입원 환자의 경과 기록지를 작성한 것도 나였는데.
심지어 오늘은 컨퍼런스 준비까지 나보고 하란다.
-슬기를 빠르게 발음하면 쓰레기가 돼요. 그러니까 1년 차 김슬기가 쓰레기라는 뜻이에요.
어제 인수인계를 했던 말턴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는 데 고작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긴 했지만 나는 일단 참았다.
첫날부터 김슬기를 들이받았다간 오히려 내 평판만 나빠질 것이다.
병원 내 먹이사슬 최하위층에 바로 인턴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수를 위해선 강력하면서도 튼튼한 명분이 필요했다.
앞으로는 루틴을 너무 빨리 끝내도 안 되겠네.
그래 봐야 김슬기 좋은 일 시키는 꼴밖에 안 되잖아?
회의실 청소를 하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김슬기를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았다.
* * *
컨퍼런스 시작 20분 전.
나는 환자의 상태 및 처치 스케줄이 적힌 출력물을 책상에 올려놓는 중이었다.
남초롱도 곁에서 나를 돕고 있었다.
“당직 서느라 피곤했지?”
남초롱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뭐, 적당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믿음이 네가 네 입으로 힘들다는 소리를 한 걸 들은 적이 없거든.”
의대를 다니는 6년간 절친으로 지냈기 때문일까.
남초롱은 이미 속속들이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거 먹어. 그나마 정신이 좀 들 거야.”
남초롱이 가운 주머니에서 꺼내 건넨 것은 캔 커피였다.
의사들이 복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도핑 약물.
당직 근무를 선 나를 위해 휴게실까지 가서 커피를 사다 준 남초롱의 배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땡큐.”
“고마우면 약속해. 앞으로 주먹 낸다고 하고 가위 내기 없기.”
남초롱이 쿡쿡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어제 당직을 정하기 위해서 했던 가위바위보가 아직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뇌물을 받았으니까 안 된다고 하면 안 되겠지?”
“응, 양심이 있으면.”
“이야~ 보기 좋네. 인턴 둘이 회의 준비도 안 하고 도란도란 떠드는 거. 나 때는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어느새 회의실로 들어온 김슬기가 빈정거렸다.
우리 둘이 뭘 하는지 지켜보려고 소리를 죽여서 들어왔던 걸까.
김슬기는 의외로 치밀한 구석이 있었다.
“회의 준비는 다 끝냈어?”
김슬기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가자미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청소도 끝냈고 프로젝터 연결도 하고 유입물도 다 나눠 놓았습니다.”
“그거야 너희 생각이지.”
김슬기는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으려고 회의실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애초에 꼬투리가 잡힐 만한 일은 남겨 두지 않았으니까.
김슬기보다 직급이 낮을 뿐.
실력으로 보나, 정치력으로 보나, 사회성으로 보나 나는 김슬기보다 몇 배는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쩝, 일 처리는 잘했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오늘처럼 만 해. 근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목이 마르지?”
김슬기가 내 손에 들린 커피를 보며 중얼거렸다.
인턴에게 커피를 사 주지는 못할망정 커피를 뺏어 먹으려고 해?
그 고약한 심보에 나를 속으로 혀를 찼다.
딸칵.
나는 뚜껑을 딴 캔 커피를 김슬기에게 건네… 지 않았다.
나 혼자 벌컥벌컥 단번에 마셨다.
남초롱이 나를 위해 준 커피를 왜 김슬기에게 헌납한단 말인가.
“이믿음, 너 진짜 눈치 없다?”
“네? 제가요?”
나는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어떤 부분에서 눈치가 없었는지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휴, 그걸 내가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눈치 없는 거야. 됐다, 말을 말자.”
등을 보이며 회의실을 나가는 김슬기를 지켜보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믿음아, 정말 괜찮겠어? 이러다가 괜히 찍히는 거 아니야?”
나와 김슬기의 관계가 틀어진 듯 보이자 남초롱이 나를 걱정했다.
“쪼잔하게 캔 커피 안 줬다고 뒤끝을 남기겠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준 커피를 1년 차 선배한테 다시 주는 것도 웃기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슬기 선배… 한 성깔 하는 것 같던데.”
“나도 보통 사람은 아니거든?”
나는 너스레를 떨며 남초롱을 안심시켰다.
잠시 후 시작된 컨퍼런스.
새롭게 순환기 내과에서 근무하게 된 나와 남초롱의 소개 따위는 없었다.
병동에서 인턴이란 딱히 소개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도중.
나는 한 인물을 눈여겨보았는데, 바로 최호섭이었다.
최호섭은 4년 차 치프 레지던트(의국장)로 짙은 갈매기 눈썹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최호섭에게 신경을 썼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인턴 평가를 하는 데 그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매달 각 과에서 이뤄지는 인턴 평가에는 특히 교수와 의국장의 입김이 세다.
놀라운 것은 적어도 인턴 평가에 관해서는 교수보다 의국장이 더 큰 힘을 쓴다는 점이었다.
왜냐고?
교수는 인턴에게 별 관심이 없으므로, 의국장에게 전해 들은 대로 인턴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전생에 C턴이었던 나는 이번 생에서 A턴으로 거듭나기를 원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최호섭에게 활약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 컨퍼러스를 마치겠습니다.”
의국장 최호섭의 선언으로 종료된 컨퍼런스.
“이믿음 선생은 잠깐 나 좀 봐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허혈성 심질환과 심혈환 중재 시술 파트를 맡은, 조교수 김용이 나를 호출했다.
조교수가 인턴을 따로 호출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지라 스태프들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 쏠렸다.
스태프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나는 김용과 단둘이 컨퍼런스실에 남았다.
‘양 교수님이 연락을 해 주셨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김용이 나를 따로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제저녁 내가 스승에게 연락해 김용 교수에게 심전도 판독 수련을 받고 싶다는 부탁을 드렸기 때문이다.
김용 교수는 심전도 판독의 대가였다.
초음파나 조영술을 해야만 파악할 수 있는 질환조차 심전도로 추측해 내곤 했다.
그런 김용 교수의 심전도 판독 능력을 내가 가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검사하는 시간마저 아껴 응급 환자를 더 빠르게 수술할 수 있지 않을까.
초응급 환자는 단 몇 분 차이로도 목숨이 이승과 저승을 오가니까.
사실 내가 순환기 내과를 첫 번째 과로 선택한 이유도 김용 교수에게 심전도 판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