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84화 (84/257)

84화 제2장 나는 인턴이다(4)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순환기 내과 인턴을 맡게 된 이믿음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전생은 전생이고 현생은 현생이 아닌가.

지금의 나는 인턴이었으므로 레지던트들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일이 쑥스럽거나 쪽팔린 일은 아니었다.

“반가워요. 같이 지내는 건 한 달뿐이지만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네, 물론입니다.”

1년 차가 초면에 반말을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에야 나는 당직실에 들어온 레지던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당연히 김슬기였다.

인수인계를 해 주었던 인턴이 지목한 요주의 인물.

김슬기는 정사각형처럼 네모난 얼굴과 숯 검댕이 같은 눈썹이 특징이었다.

선입견인지 몰라도 얼굴에 못된 놈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또 다른 1년 차 오세형은 존재감이 희미했다.

3년 차 배태곤은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심봉사 동아리로 안면을 튼 사이였기 때문이다.

“믿음이,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첫 턴에 선배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이것도 인연인가 보네.”

“선배님이 잘 아는 후배세요?”

김슬기가 나와 배태곤의 대화에 껴들었다.

(김슬기는 나와 모교가 달랐고, 오세형은 나와 모교가 같으나 친분은 없었다.)

“그럼, 잘 알고 말고.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우리 의과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지. 안 그래?”

“하하하, 제가 그랬던가요?”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쨌거나 배태곤이 순환기 내과 3년 차라서 한시름을 던 기분이었다.

김슬기가 아무리 쓰레기라고 해도 배태곤이 있으면 나를 마냥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의대에서부터 키워 온 인맥은 과연 헛수고가 아니었다.

“배고프실 텐데 음식부터 시킬까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김슬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척하면 척, 아니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주문하겠습니다.”

“슬기랑 세형이는 좋겠네. 눈치 빠르고 똑 부러진 인턴 들어와서.”

“역시 선배님이 눈여겨본 후배는 다르네요.”

배태곤의 말에 김슬기가 유쾌하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생각보다 까다로운데? 상대하기 쉽지 않겠어.’

이제 막 만나서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김슬기라는 인간의 본성을 알 것도 같았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간신배 스타일.

배태곤이 없으면 아마 나를 휘어잡지 못해서 안달 나지 않을까.

배태곤이 든든하게 내 뒤에 버티고 있음에도, 나는 순환기 내과 생황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마주했다.

“네, 라지 사이즈 두 판 배달이요.”

“…….”

“네, 감사합니다.”

나는 냉장고에 붙어 있던 전단지를 보고 피자 두 판을 주문했다.

야식시키기.

이것은 의외로 중요한 인턴 잡 중 하나였다.

야식 메뉴가 형편없으면 야식을 먹는 내내 레지던트들에게 구박을 받기 때문이다.

참고로 흉부외과 인턴 시절.

나는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했다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욕을 먹었다.

야식 먹는 도중 응급수술이 잡혔고.

수술이 끝난 후 당직실에 돌아오자 면은 떡이 되었다.

이에 분노한 레지던트들은 나를 짜장처럼 볶아 댔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시렸다.

“믿음아, 너 피자 좋아하냐?”

“아니요, 피자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왜 피자를 시켰어?”

“자리에 안 계신 선배님들도 나중에 와서 먹기 편한 음식이니까요. 식으면 냄새도 덜 나고, 식었더라도 데워 먹기 좋으니까요.”

배태곤의 질문에 나는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았다.

이에 김슬기가 감탄했다는 듯 짝짝짝 박수를 쳤다.

“야, 너 벌써부터 A턴의 싹수가 보인다? 첫 근무부터 센스가 작렬하는데?”

“감사합니다. 동기 인턴이 한 명 더 있는데 데려올까요?”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남자 당직실을 나와 반대편 복도에 있는 여자 당직실로 이동했다.

우리 대학은 남녀 당직실 구분이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이때만 해도 몇몇 대학병원조차 남녀가 당직실을 같이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똑. 똑. 똑.

나는 노크를 하고 남초롱의 이름을 불렀다.

문이 빼꼼 열리고 모습을 드러내는 남초롱.

“무슨 일이야?”

“레지던트 선생님들하고 야식 먹는 중. 너도 와서 얼굴 비쳐야 할 것 같아.”

“휴, 갑자기 또 떨리기 시작하네.”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내 농담에 남초롱이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긴장한 기색도 다소 풀린 듯 보였다.

남초롱이 선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라서 좋아하는 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남초롱이 걱정되기도 했다.

병원은 전쟁터니까.

전쟁터에서 중요한 것은 선(善)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독(毒)과 악(惡)을 품는 것이었다.

전생의 내가 고생했던 것도 병원이란 곳을 너무 낭만적인 곳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이었고.

‘당분간은 내가 관리를 해 줘야겠네.’

남초롱에게서 전생의 내 그림자를 봤으므로 나는 남초롱을 보살피기로 결심했다.

마음이 무너지는 구간만 견뎌 낸다면 남초롱은 전생의 나처럼 좌절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을 것이다.

“가자.”

나는 앞장서서 병동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 *

피자를 먹으며 이뤄진 레지던트들과의 잡담.

나는 의외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말년이었던 인턴에게 인수인계를 받을 때보다 더.

왜냐고?

회귀를 한 내게는 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해서였다.

업무 그 자체 때문에 사회생활이 힘들 경우는 드물었다.

사회생활이 힘든 진짜 이유는 직장 동료, 즉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그러니 순환기 내과 생활을 무탈하게 보내려면 레지던트와의 관계를 완만하게 가져야 했다.

-레지던트 1년 차 김슬기는 윗 연차 레지던트들에게 신망을 받고 있다. 일을 잘한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레지던트 1년 차 오세형은 말수가 적다. 하지만 자기주장은 뚜렷한 편이다.

-레지던트 3년 차 배태곤은 동네 형처럼 푸근한 사람이다. 단, 일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철두철미하다

등등.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레지던트들의 특성과 역학 관계를 세세히 분석했다.

전생의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 데이터가 있다면 분명 문제가 생겼을 때 좋은 대처 방법을 떠올 수 있겠지.

야식 시간이 끝난 후 레지던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레지던트 당직이었던 김슬기와 인턴 당직이었던 나를 제외하고.

초면이라서 그럴까.

김슬기는 당장 내게 발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인수인계를 했던 인턴이 경고했던 것처럼 쓰레기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인턴 생활이 힘들어도 잘 이겨 내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된다.

힘들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자신에게 언제든지 물어봐라 등등.

오히려 나를 위해 주는 듯한 말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김슬기가 쓰고 있는 가면이 언제 벗겨질지를 예측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런 건 허락 안 받아도 돼.”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 김슬기.

“대신 언제 어디서나 콜폰을 챙기고 있어야 돼. 언제 응급 콜이 올지 모르니까.”

“네, 선생님.”

나는 화장실로 이동해 콜폰이 아닌 휴대폰을 들었다.

현재 시간은 밤 10시.

나의 스승이자 흉부외과 부교수로 복귀한 양순재라면 깨어 있을 것이다.

그럼 슬슬 새로운 수련을 시작하기 위한 주춧돌을 깔아 볼까.

“네, 교수님. 저 믿음입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그래. 믿음이냐? 인턴 첫날부터 전화를 다 하고…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지?

과연 양순재는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갑작스런 연락에 내 안위부터 걱정했다.

부모님 다음으로 고마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양순재일 것이다.

“문제는 없습니다만… 송구하게도 교수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 간을 떼어 달라는 부탁만 아니면 뭐든지 들어주마.

“저, 순환기 내과의 김용 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신 걸로 아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 * *

순환기 내과 인턴 근무 둘째 날의 아침이 밝았다.

당직이었던 나는 당연하게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야밤에도 검사를 해야 할 환자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퇴원 환자 처방 오더는 왜 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지.

일만 많았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김슬기는 하루가 넘어가기 무섭게 쓰레기의 면모를 뽐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나한테 떠넘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수법이 무척 교묘했다.

단순히 일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시킨다는 듯한 늬앙스를 풍겼다는 점.

본인 처리해야 하는 레지던트의 업무를 마치 인턴의 업무인 것처럼 둔갑시킨 점.

이 두 가지 방식이 정교하고 악랄했다.

아마 전생의 나였다면 당하는지도 모르고 당했을 것이다.

근무 첫날부터 윗사람을 들이받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김슬기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자신이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김슬기는 까맣게 모르고 있겠지.

아무리 늦어도 열흘 안에는 먹어 줄게.

인턴의 루틴이 시작되는 오전 6시.

나는 간호사 한 명과 함께 병실을 돌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환자들의 혈압을 재야 했고, 나는 ABGA(동맥혈 채혈)을 해야 했다.

ABGA는 일반적인 정맥이 아닌 동맥에서 피를 뽑아낸다.

대상은 호흡과 관련된 증상이 있는 환자들이며 검사를 통해 폐 기능의 이상 여부를 살피게 된다.

“선생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첫날이기도 하고, 익숙해지는 데 시간도 걸리는 채혈이니까요.”

첫 번째 병실로 들어서자 라운딩을 함께 도는 간호사가 나를 다독였다.

ABGA는 인턴들이 근무 초반에 가장 꺼려 하는 검사로.

바늘이 혈관을 빗겨 나가거나 혈관을 꿰뚫어서 부종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제는 채혈이 실패하면 채혈 횟수가 늘어난다는 점.

그 과정에서 환자들이 인턴에게 화를 낸다는 점이었다.

굵은 바늘로 피부와 혈관을 연신 쑤셔 대는데 환자들이 그걸 좋아할 리 만무했으니까.

“마음만 받겠습니다. 라운딩 빨리 끝내드릴게요.”

나를 위해 주는 간호사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나는 위로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현생의 나는 수전증이 없었으며 손기술은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내게 ABGA의 난이도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딸칵!

간호사가 병실 불을 켜고 환자들의 혈압을 잰 뒤 내게로 돌아왔다.

나를 향한 간호사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했다.

“어째 저보다 선생님이 더 긴장하신 것 같네요?”

“그게… 첫 번째로 채혈해야 하는 분이 만만치가 않아서요. 저번에 팔을 바꿔 가며 5번이나 바늘에 찔렸거든요.”

간호사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했다.

그녀의 우려는 금방 현실로 나타났다.

“뭐? 또 피를 뽑는다고? 때려죽여도 안 돼. 그냥 가.”

60세 만성 심근경색 환자는 극구 ABGA를 거부했다. 새내기 의사의 실험 대상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도 밝혔다.

전생의 나라면 곤란함에 발을 동동 굴렀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까짓거 한 방에 성공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환자를 불렀다.

“어르신.”

“왜?”

“제가 딱 한 번에 피 뽑을게요. 만약에 실패하면 그다음부터는 피 안 뽑으셔도 돼요.”

“…설마 거짓말하는 거 아니겠지?”

“의사가 환자한테 거짓말하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집니다.”

내가 호언장담하자 환자는 순순히 팔을 내주었다.

반면 간호사의 얼굴은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선생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면 어떻게 해요? 채혈 실패하면 환자랑 레지던트 선생님, 둘한테 욕을 먹을 텐데.”

귓속말로 우려를 전하는 간호사를 향해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우리의 처치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본래라면 의사가 전전긍긍하고 간호사가 여유로워야 하거늘.

“실패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주사기를 손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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