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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83화 (83/257)

83화 제2장 나는 인턴이다(3)

인턴 전야.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일부터 당장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된다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그중에는 내가 막아야 하는 비극이 있었고.

내 실력을 키워야 하는 일이 있었고.

인연으로 맺어져야 하는 사람과 인연을 단칼에 끊어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내 병원 생활이 영화처럼 화려할 것임을 직감했다.

병원이라는 장소는 특수성을 생각해도 그랬고, 회귀한 나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도 그랬다.

‘말 그대로 최후의 만찬이었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볼록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었다.

1시간 전 어머니가 차려 주신 저녁상을 푸짐하게 먹었다.

갈비에, 계란말이에 다양한 밑반찬으로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인턴을 시작하면 내 끼니는 대부분 라면과 빵이 되겠지.

전생에서처럼 역류성 식도염에 안 걸리려면 식단 관리도 해야 할 것이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사랑이가 문틈으로 빼꼼 머리를 들이밀었다.

“형, 자?”

“아니, 들어와.”

사랑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중학생이 된 사랑하는 나의 동생 사랑이.

사랑이의 얼굴을 언제 또 마주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에 나는 사랑이의 모습을 가슴에 담아 두었다.

“인터넷에 알아보니까 의사 생활하면 형 얼굴 보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고.”

“그럴 거다. 게다가 형은 인턴 끝나면 흉부외과 지원할 거니까 더더욱 그렇겠지.”

“형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사랑이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형이 하고 싶은 일을 잘했으면 좋겠어. 형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고, 부모님도 행복할 테니까.”

“어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 어른인 척하니?”

“안 그래도 학교에서 애늙은이 소리 많이 듣거든? 형까지 그러지 마.”

내 농담에 사랑이가 발끈했다.

사랑이는 이윽고 내게 코팅된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며칠 전 가족끼리 외식을 나갔다가 집 근처 공원에서 촬영한 가족사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사진을 찍자고 했던 것도 사랑이었다.

“자, 선물. 형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고.”

“…….”

“항상 건강하고 자주 연락할게. 형이 내 연락을 못 받아도 서운해하지 않고.”

“녀석, 이런 걸 또 준비했네.”

나를 향한 동생의 배려와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마 사랑이는 모르겠지.

전생에 없었던 사랑이 본인이 내겐 그 무엇보다 큰 선물이라는 것을.

“형, 파이팅.”

사랑이가 이성에게 사랑 고백을 한 것처럼 쑥스럽게 방을 떠났다.

고요해진 방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사랑이가 건넨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이 이렇게 다시 모여 화목하게 사진 찍을 날은 대체 언제쯤 찾아올까.

* * *

“이제 진짜 의사 생활 시작이네. 긴장되지는 않아?”

“아주 조금?”

“조금이 아니라 많이 같은데? 아까부터 손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데?”

“그런가?”

어색하게 웃는 남초롱.

나는 남초롱과 잡담을 나누며 병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남초롱과 함께 순환기 내과 인턴에 배정받았다.

오후 6시.

직장인들이 분주하게 퇴근하는 시각에 우리는 반대로 병원을 향하고 있었다.

신원대학교 병원은 국내 5대 병원 중 하나였고, 역에서 가까웠다.

그런 탓에 지하철 출구로 나와 잠깐 걸었음에도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은 병원 건물이 보였다.

전생을 거슬러 다시 시작하는 의사 생활에 나는 기대 반, 설렘 반이었다.

폐급 인턴으로 괄시받던 과거의 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생의 나는 화려한 A턴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병원 스태프들은 인턴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두고 A턴, B턴, C턴으로 분류하곤 한다.)

“가까워지니까 더 떨려. 나 어떻게 하지?”

“괜찮아, 내가 있잖아.”

병원 안으로 진입하자 더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남초롱에게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OT에서 술기 복습할 때도 야무지게 잘하더만. 그때처럼만 하면 문제 될 거 없어.”

“정말 그렇겠지?”

“물론.”

남초롱의 긴장을 풀어 주며 병원 로비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순환기 내과 병동으로 이동했다.

응급의학과 교수 강민식의 도움을 받아 내가 선택한 첫 번째 수련 과는 순환기 내과였다.

쉽게 말하면 심장 내과.

호흡기 내과와 더불어, 흉부외과가 가장 많이 접촉하는 과가 바로 심장 내과였다.

왜냐고?

우선 두 과목 다 심장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고.

내과에서 치료를 받다가 한계에 부딪힌 환자들이 흉부외과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내가 심장 내과를 택한 두 번째 이유.

그것은 수련에 있었다.

의대생 시절 양순재에게 수련을 받았듯이 심장 내과에도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명의가 한 사람 있었다.

양순재처럼 나를 너그럽게 받아들여 줄지는 의문이었지만.

참고로 나는 전생에서 순환기 내과부터 근무하지 않았다.

전생에 내 첫 근무지는 응급의학과였고, 전생의 순환기 내과를 돈 적도 없었다.

“오늘부터 근무하게 되는 인턴입니다. 근무 중인 인턴 선생님은 어디 계시나요?”

나는 스테이션(간호사가 업무를 보는 데스크) 앞에 서서 간호사에게 물었다.

“왼쪽 복도를 따라 쭉 가면 끝에 당직실이 있어요. 거기로 가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병동 복도를 걸으며 나는 좌우로 펼쳐진 병실을 힐끔거렸다.

창틈 너머로 보이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남 같지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이들과 함께 지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똑. 똑. 똑.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6평 남짓한 당직실은 비좁았다.

2층 침대 2개와 업무용 책상.

소형 냉장고와 책장 하나.

캐비넷 2개가 놓인 것만으로도 방이 꽉 찼다.

숨을 들이마시니 꼬리꼬리하고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속에서 기름으로 머리가 떡진 남자 인턴이 분주하게 처방을 입력 중이었다.

의사 가운만 아니면 거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턴을 보고도 안쓰럽다거나 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곧 미래의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일까.

그런 질문에 나는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인턴 때와 레지던트 1년 차 때라고.

“처음 보는 선생님인데?”

“다른 학교 선생님인가 봐.”

인턴을 쳐다보며 남초롱이 전하는 귓속말에 내가 대답했다.

신원대학교 병원이라고 해서 신원대학교 출신만 일하는 건 아니었다.

“잠깐만요. 입력 다 끝나 가요.”

인턴은 우리가 곁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5분 넘게 처방 입력을 했다.

“휴, 간신히 끝났네. 오래 기다렸죠?”

인턴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남궁윤호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이믿음입니다.”

“남초롱이에요.”

간단하게 통성명을 나누고 본격적인 인수인계가 시작되었다.

수더분한 외모처럼 남궁윤호는 편하게 우리가 순환기 내과에서 해야 할 루틴(매일 반복되는 업무)을 알려 주었다.

곁에 선 남초롱은 메모까지 해 가며 진지하게 인수인계를 들었으나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전생에서 흉부외과 부교수로 활동하고.

이번 생에서는 벌써 폐식도 파트의 펠로우급 지식과 실전 경험을 가진 나였다.

인턴 루틴을 귀담아들어야 할 짬밥은 아니었다.

“일이 쉽지는 않을 거예요. 심장 내과는 다른 과에 비하면 바쁜 편이라서.”

“…….”

“그래도 다행히 둘 다 야무지게 일은 잘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런데 선배님은 이제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남초롱이 이름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요? 이제 피부과 레지던트로 가야죠.”

“와, 선배님 A턴이셨나 봐요. 피부과 레지던트에 합격하는 거 어렵다고 하던데.”

“일은 적당히 하고 눈치만 빠르면 돼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 남궁윤호.

그를 향해 나도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인수인계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졌기 때문이다.

“선배님,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요.”

“윗 연차 선생님들은 어떤가요?”

인턴을 관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레지던트의 몫이었다.

그러니 레지던트가 누구냐에 따라 인턴 생활이 필 수도 있었고, 구겨질 수도 있었다.

업무만큼 중요한 게 상급자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루틴보다 레지던트들이 어떤 사람인지가 더 궁금했다.

“겁주기 싫어서 일부러 말을 안 했는데… 물어봤으니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남궁윤호가 머뭇거리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나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거 뭔가 있구나.

“레지던트 1년 차 중에 김슬기라는 선배가 있어요. 슬기를 빠르게 발음해 볼래요.”

“슬기. 슬기. 슬기.”

모범생인 남초롱이 남궁윤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슬기를 빠르게 발음하면 쓰레기가 돼요. 그러니까 1년 차 김슬기가 쓰레기라는 뜻이에요.”

“…….”

“그 사람만 조심하면 아마 큰 탈은 없을 거예요.”

고개를 떨어트리며 한숨을 쉬는 남궁윤호.

그는 벌써 김슬기에게 많이 당했던 모양이었다.

* * *

인수인계가 끝난 뒤 나와 남초롱은 원무과를 찾았다.

의사 명찰을 받아 목에 걸었고, CSR(중앙공급실)로 이동해 의사 가운과 진료용 초록 수술복, 응급 연락을 위한 콜폰을 받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의사가 된 것 같아.”

바짝 긴장했던 남초롱이 다소 들뜬 모습을 보였다.

투명한 벽기둥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했다.

“복장을 갈아입으니까 꼭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 같다?”

“믿음이 너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돌아온 순환기 내과 병동.

병동 게시판에는 나와 남초롱의 콜폰 전화번호가 계시 되어 있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우리는 어엿한 순환기 내과의 인턴이 된 것이다.

“오늘부터 근무 있는 거 알지? 당직은 내가 설게.”

나는 당직 근무를 자처했다.

오늘 저녁부터 차근차근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인턴이라고 해서 수련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안 돼. 그건 불공평하니까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이긴 사람이 당직 정하기. 콜?”

“네 뜻이 그렇다면야… 대신 나는 주먹을 낼 테니까 네가 알아서 해.”

“심리전이라 이거지? 나 믿음이 너 믿는다?”

숫자를 센 뒤에 나는 가위를 냈다.

남초롱은 보를 냈고.

남초롱이 보를 낸 것은 아마 내가 주먹을 낼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치사하다, 치사해. 주먹 낸다며.”

가위바위보 결과가 불만인지 남초롱이 미간을 찌푸렸다.

“초롱아, 내가 너한테 인생의 교훈을 알려 준 거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법이라고.”

“…….”

“어쨌거나 오늘 당직은 나야. 짐 정리하면서 좀 쉬고 있어.”

“응, 고생하고 내일 오전에 봐.”

남초롱과 헤어진 나는 남자 당직실로 이동했다.

백팩에 있던 짐들을 락커에 풀기 시작했다.

감회가 새로웠다.

기억을 되짚어 보면 기저귀를 차고 있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의사 면허를 따고 인턴 생활을 시작하다니…….

짐을 정리하면서 나는 순환기 내과에서 이뤄야 하는 목표들도 같이 정리했다.

이번 순환기 내과 근무에선 내가 그동안 쌓아 놓은 인맥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드르르륵.

당직실 문이 열리며 레지던트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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