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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76화 (76/257)

76화 제1장 인턴을 향해서(1)

스테이션을 향하고 있던 내 눈이 어느 순간 웃기 시작했다.

스테이션에 있던 마재욱과 간호사들이 술렁거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 소리가 작아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훤히 다 들리는 것 같았다.

검사 결과를 믿을 수가 없겠지.

표면상으로는 의대생이자 진상 보호자인 나를 검사 결과로 따끔하게 혼내 주려고 했건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사랑이는 백 퍼센트 세균성 뇌수막염이 맞을 것이다.

검사 결과가 아닌 의료진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너, 의예과 학생 주제에 잘도 설쳤구나. 검사 결과 뇌척수액에서 음성 반응이 나왔다. 내일 너희 학교 학과에 전화해서 단단히 경고를 줄 테니 각오해.

마재욱의 성격을 생각하면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불도저처럼 내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폭언과 욕설과 협박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건 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사랑아, 항생제 주사 맞으면 조금 더 편해질 거야. 힘들지만 잘 이겨 낼 수 있지?”

나는 아이스 팩을 갈아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응, 형아. 아까보다는 괜찮아졌어. 나 잘 참아 볼게. 나 참는 거 잘해.”

아픈 와중에도 씩씩하게 대답하는 사랑이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전생의 나는 사랑이 나이대 사랑이만큼 의젓하지 못했다.

내가 팔불출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이는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선생님, 검사 결과 나왔습니까?”

사랑이를 안심시키고, 나는 스테이션으로 이동해서 물었다.

마재욱은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내 눈까지 피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응급의학과 2년 차 레지던트가 고작 의예과 1학년생에게 개망신을 당했으니까.

자업자득이지. 농땡이 칠 생각하지 말고 진찰만 꼼꼼히 했으면 되는 건데…….

“선생님. 혹시 제 말이 안 들리시나요? 아니면 안 들리는 척을 하시는 건가요? 검사 결과가 궁금합니다.”

“그쪽 말이 맞아. 세균성 뇌수막염이 맞다고. 뇌척수액에 실시한 세균 검사에서 폐렴구균 양성 반응이 나왔어.”

마지못해 대답하는 마재욱의 목소리가 떨떠름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친개처럼 날뛰던 그가 얌전하게 꼬리를 말았기에 나는 깨소금 맛이었다.

지금 같은 소소한 보복과 응징도 회귀의 한 재미가 아닐까.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항생제 주사 투여하는 것 말고는 별 계획이 없지. 기본적으로는 보존적인 치료가 원칙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마재욱을 괴롭히려면 더 괴롭힐 수도 있었지만 나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 시간에 사랑이 곁을 지키는 게 더 이득이었다.

사랑이 곁으로 돌아가 간호를 하는데, 안경 쓴 간호사가 우리 병상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바이알(Vial)과 생리식염수,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바이알이란 주사용 유리 용기로 용기 안에 담긴 약품에 생리식염수를 섞어 주사제로 사용한다.

주로 항생제가 바이알의 형태를 많이 띤다.

비슷한 것으로는 앰플(Ample)이 있는데 앰플은 이미 주사제와 약제가 섞여 있기에 주사기로 용액만 빼내면 된다.

“미리 공부라도 했어요? 의예과 학생인데 용케 마 선생님을 말빨로 이겼네요?”

간호사가 주사기를 재며 질문을 던졌다.

확실히 의대생이 레지던트와 말다툼을 벌이는 광경은 보기 드물었다.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선행 학습을 좀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긴 좀 그런데…….”

간호사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학생이 마 선생님 잡을 때 솔직히 통쾌했어요. 마 선생님은 유독 야간 당직할 때 개판이거든요.”

“…….”

“진료 볼 때 빼고는 응급실에 있지도 않아요. 환자도 대충대충 보고.”

“…….”

“응급하지 않을 때는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나? 그런 멍멍이 같은 핑계만 해대고. 학생, 아주 잘했어요.”

간호사가 나를 보며 씽긋 웃었기에 나도 그녀를 향해 씽긋 웃어 주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바깥에서 새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법.

나는 마재욱의 평소 태도를 알 것도 같았다.

간호사는 수액제에 항생제를 섞은 뒤 내게 캔 커피 하나를 챙겨 주고 떠났다.

나는 캔 커피를 단번에 비우고 사랑이 간호에 힘썼다.

물론 간호라고 해 봤자 아이스 팩의 위치를 조정해 주고 사랑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곁을 지켜 주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다.

아픈 환자의 곁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가족이나 지인, 애인을 간호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사랑이를 확인하고 나는 마음을 놓았다.

모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체감상으로는 응급실에 들어온 지 한 2시간은 너끈하게 지난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시간을 따져 보니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지이이잉.

때마침 응급실 문이 열리고 한 모녀가 응급실로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아이의 나이가 사랑이와 비슷하다는 점.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점.

세균성 뇌수막염에 전염성이 있다는 점.

이 세 가지의 정보를 합쳐 보면 아이는 사랑이가 다니는 유치원생일 확률이 높았다.

아마 좀 있으면 다른 원생들도 응급실을 찾을 테지.

마 선생님께서 오늘 고생 좀 하실 모양이었다.

* * *

오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사랑이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응급실에서 보존적 치료를 받던 사랑이는 결국 소아 병동에 1박 2일 동안 입원하게 되었다.

다행히 상태가 악화되어서 입원 결정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용이한 경과 관찰.

심도 높은 보존적 치료를 위해서 입원했을 따름이었다.

사랑이가 건강하게 퇴원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분주했다.

걱정이란 원래 잡초와 같아서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기에.

“형아, 왔어?”

현관에 들어서자 사랑이가 발랄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이틀 전 다 죽어 가던 사랑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번 생에는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

이름처럼 사랑스러운 동생.

“우리 사랑이 몸은 좀 어때?”

“나? 씩씩해!”

사랑이가 건강을 자랑이라도 하듯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귀여운 녀석.

나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랑이를 두 팔로 번쩍 들었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꺄르르, 하는 사랑이의 웃음소리가 해맑았다.

“큰아들 왔어?”

“모처럼 평일에 온 가족이 모였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도 뒤늦게 나를 맞아 주었다.

식사를 하기엔 시간이 일렀으므로 우리 가족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았다.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의 중심은 당연히 사랑이었다.

“설마 사랑이가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릴 줄은 몰랐는데… 믿음이 네가 응급실에 빨리 데려가길 잘했어. 독감인 줄 알고 방치했으면 큰일 났을 텐데.”

현직 간호사인 어머니가 안도하며 말했다.

사랑이가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어머니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계속 지켜봤는데 평범한 독감 같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응급실로 갔죠.”

“잘했다, 잘했어. 큰아들이 의대생인 덕을 톡톡히 봤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요, 뭐.”

“동생을 살린 일이 왜 대단한 게 아니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나는 일부러 마재욱과 싸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부모님이 더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까.

대화는 곧 유치원 쪽으로 넘어갔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유치원은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린 원생의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기로 했다고 한다.

또한 유치원이 보건 당국의 역학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한 달여간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것.

내가 제때 유치원에 경고를 준 덕분에 뇌수막염으로 사망하거나 후유증을 앓는 원생 또한 없었다는 사실까지.

의사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건만.

나는 회귀한 지식으로 사랑이와 수많은 원생의 목숨을 건졌다.

이만하면 회귀한 보람은 넘치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그나저나 사랑이도 슬슬 포경 수술할 때 되지 않았나?”

아버지가 슬쩍 운을 뗐다.

사랑이가 TV를 보다가 잠이 든 타이밍이었다.

“하긴, 빠르긴 하지만 믿음이도 이때쯤 포경 수술을 했던 것 같은데. 당분간 유치원도 안 나가니까 다음 주쯤 해도 될 것 같아.”

아버지의 제안에 어머니가 힘을 보탰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생양(?)인 사랑이는 여전히 단꿈에 빠져 있었고.

지금 사랑이 편을 들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암, 사랑이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없지.

“포경 수술을 굳이 해야 할까요?”

내가 넌지시 의견을 비쳤다.

“포경 수술을 해야 감염 예방에 좋단다.”

어머니가 먼저 반대 의견을 냈다.

“그건 단순한 기댓값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포경 수술을 안 했다고 요로 감염에 걸렸다는 사람은 못 봤는걸요.”

“…….”

“그리고 요즘은 안 하는 게 더 좋다는 말도 많아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포경 수술은 반 의무이자 반강제적인 수술이었다.

하지만 2000년 전후부터 포경 수술을 반대하는 입장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딱 이맘때쯤 말이다.

“그런데 믿음아, 기댓값이 있다면 하는 게 더 좋은 거 아니니?”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가 어머니의 지원 사격에 나섰다.

두 분의 세대에선 포경 수술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술이니 입장을 바꾸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기댓값이라는 것도 사실 믿을 만한 게 못 돼요.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추측 같은 거죠.”

“…….”

“해외를 생각해 보세요. 포경 수술을 우리나라처럼 반 의무로 하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종교적인 이유를 제외하면요.”

나는 본의 아니게 열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감염 예방이라는 것도 웃기는 게 평소에 잘 씻으면 그만인 거죠. 외출 후에 손을 씻는 것처럼요.”

“…….”

“저는 사랑이가 포경 수술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열렬하게 포경 수술을 반대하자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작 포경 수술을 두고 내가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엄마도 해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아.”

어머니와 아버지의 협공.

사랑이를 지키기 위해 나는 외로운 싸움을 펼쳐야만 했다.

뜻밖의 난상 토론은 거의 30분 가까이 이어졌고, 부모님은 기어이 백기를 들었다.

사랑이에게 포경 수술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토록 열렬하게 의견을 내고 부모님께 반대한 적이 없었던 지라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면서.

“엄마, 아빠 형아하고 싸웠어요? 막 시끄럽던데…….”

꿈나라에 빠졌던 사랑이가 실눈을 뜨며 물었다.

대화 소리에 잠이 깬 듯했다.

“싸운 건 아니고 그냥 대화를 나눈 거란다.”

아버지가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포경 수술 뭐, 그런 말을 하던데… 포경 수술이 뭐예요? 나 아직 아파요? 수술받아야 해요?”

순진한 눈동자로 나와 부모님을 번갈아 보던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랑이 너는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는 그런 사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안심시켰다.

사랑아.

넌 앞으로도 까맣게 모르겠지만 형이 널 지켜 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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