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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75화 (75/257)
  • 75화 제5장 활약상(5)

    사랑이가 앓고 있는 질병은 아마도 뇌수막염일 것이다.

    뇌수막염은 크게 바이러스성 뇌수막염과 세균성 뇌수막염이 있다.

    바이러스성일 경우 일반 독감처럼 잘 쉬면 저절로 낫는 케이스가 많다.

    하지만 사랑이가 앓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세균성일 경우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세균성은 1, 2시간 사이에 증상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거나 심한 후유증을 야기한다.

    [환절기라서 그런지 어제부터 감기 걸린 원생이 조금 있더라고요.]

    [아마 감기가 옮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관리를 못해서.]

    감기가 원생끼리 감기가 옮은 것 같다는 말은 세균성 뇌수막염을 의심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였다.

    세균성 뇌수막염은 감염성 질환이기 때문이다.

    아마 사랑이 말고 다른 원생들도 지금쯤 사랑이만큼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유치원 쪽에 서둘러 연락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고.

    세균성 뇌수막염을 의심할 수 있는 두 번째 근거.

    그것은 사랑이의 뻣뻣한 목이었다.

    세균이 뇌막에 침투하면서 생기는 경부 강직은 세균성 뇌수막염을 진단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였다.

    “사랑아, 괜찮아. 금방 좋아질 거야.”

    나는 내 무릎 위에 앉은 사랑이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사랑이는 오한과 두통으로 벌벌 떨기만 했다. 내 말에 대답도 못하고 연신 신음 소리만 흘렸다.

    외과의로서 침착함을 생명처럼 여기는 나조차 긴장과 불안에 휩싸였다.

    환자를 다루는 것.

    그리고 가족을 다루는 것.

    확실히 두 가지는 다른 영역이었다. 외과의 사이에서 자기 가족이나 친척의 수술을 금기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 그때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누가 대갈통을 도끼로 내리치는 줄 알았어.]

    [머릿속에 불이 난 것 같기도, 속은 뒤집혀서 구토하고 난리가 아니었단 말이지. 뻥 안 치고 그냥 그대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생에서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에 걸렸던 의대 동기의 말이 떠올랐다.

    내 가슴은 더 찢어질 듯했다.

    그 동기의 묘사대로라면 지금 사랑이는 얼마나 괴로울까.

    “이사랑 환자, 들어오세요.”

    때마침 들려오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천사의 목소리처럼 환하게 들렸다.

    나는 황급하게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응급실은 조용한 편이었다.

    술병이 나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 한 명과 보호자.

    감기가 심해서 내원했는지 연신 기침을 하는 환자.

    이렇게 두 명뿐이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내가 침상에 걸터앉고 한참이 지났다.

    “어디가 아파요?”

    거의 10분이 다 지났을 때쯤에야 주치의가 설렁설렁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응급의학과 마재욱.

    가운을 보아하니 레지던트는 확실한데 태도가 여유로운 걸 보면 2년 차 이상인 것 같았다.

    짬밥이 찼으면 눈치는 있겠지?

    “동생이 아파서 제가 대신 말하겠습니다. 집에서 체온을 쟀을 때 38도가 나왔고요, 두통이 심합니다.”

    “…….”

    “내원 전에 구토를 했고, 동생이 누워 있을 때 목을 만져 보니까 목이 빳빳하더라고요.”

    나는 유치원에도 사랑이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원생이 여럿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왜냐고?

    마재욱이 세균성 뇌수막염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단 환자부터 눕히죠. 양 선생님, 일단 이 환자 바이탈 체크부터 해 주세요.”

    “네.”

    마재욱의 지시에 간호사가 활력징후를 체크했다.

    맥박, 호흡, 혈압은 이상이 없었으나 사랑이의 체온은 그새 또 올라 38.3도를 찍었다.

    사랑이의 안위가 걱정되어 내 몸까지 달아올랐다.

    이어지는 피검사와 흉부 엑스레이 검사.

    사랑이와 검사를 마치고 응급실로 돌아온 나는 초조하게 마재욱의 진단을 기다렸다.

    과연 그는 세균성 뇌수막염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 * *

    “검사 결과 나왔고요. 특이 사항이 없는 걸 봐서 환자분은… 독감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재욱의 대수롭지 않은 독감 진단에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 걸까.

    독감과 뇌수막염을 감별 진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이가 아플 때 당직의가 헛다리를 짚을 건 뭐란 말인가.

    어쨌거나 사랑이의 회복을 위해서 난 멈출 수 없었다.

    사랑이는 세균성 뇌수막염일 확률이 높았고,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요추 천자를 통해 세균의 종류를 확인한 뒤 항생제를 투입해야 했다.

    “독감이라고 보기엔 증상이 너무 심각하지 않습니까?”

    “독감에 걸려도 증상이 심각할 수 있어요. 특이 아이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내가 건방지게 나선다고 생각했는지 마재욱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선생님, 이사랑 환자 5D/S(5퍼센트 포도당 생리식염수) 달아 주시고 피록시캄 1앰플 IM(근육주사)으로 놔주세요.”

    “…….”

    “아이스 팩도 몸에 대주시고요.”

    “네, 선생님.”

    마재욱이 내린 오더로 간호사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처치를 내렸으니까 일단 호전될 때까지 상황을 지켜봅시다.”

    “선생님, 동생에게 요추 천자해 주세요.”

    “요추 천자요?”

    내 돌발 제안에 마재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입에서 요추 천자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제 동생은 세균성 뇌수막염일 확률이 크지 않을까요? 그리고 뇌수막염을 확진하려면 요추 천자가 필수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어려 보이시는데 혹시 의사예요?”

    내가 전문 용어를 쓰자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는 마재욱.

    “의사는 아니고 의대생입니다.”

    “참 나, 지금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아요? 레지던트 2년 차 앞에서 지금 세균성 뇌수막염을 운운하는 겁니까?”

    마재욱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가 보기에 나는 의대도 졸업 못한 파릇파릇한 새싹이었다.

    그런 새싹이 감히 의사 고시를 합격하고, 인턴 수련을 끝내고, 레지던트 2년 차 수련 중인 전공의에게 감히 진단을 운운했으니까.

    하지만 나 또한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 마재욱은 사랑이의 증상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을지 몰랐다.

    다만 요추 천자가 하기 싫어서.

    즉, 허리에 구멍을 내고 뇌척수액을 뽑아내는 검사가 복잡하고 번잡해서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마재욱이 간호사 호출 10분에 도착했다는 점.

    (응급의학의는 본래 응급실에 상주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응급실에서 없었던 걸 보면 다른 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을 확률이 컸다.)

    진료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껄렁껄렁했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그래도 보호자가 원하면 검사는 해 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쓸데없는 검사는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지.”

    마재욱이 나를 얕잡아 보고 은근히 반말을 던졌다.

    사랑이를 대충 진료하는 듯한 태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반말까지 섞자 나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환자가 독감인지, 뇌수막염인지 감별하려면 검사는 꼭 필요한 것 아닙니까?”

    “…….”

    “그게 어째서 쓸데없는 검사가 되는 거죠?”

    “학생이 너무 예민한 거라니까. 요즘 시대에 뇌수막염, 그것도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리는 사람은 별로 없어.”

    “가능성이 없어서 배제하는 것. 가능성이 있는데 무시하는 것, 두 개가 같은 거라고 보나요?”

    “하… 이 친구 어디서 드라마를 많이 봤나 보네. 의대생이 왜 이렇게 나대지?”

    이제 마재욱은 대놓고 나를 면박 주었다.

    주변에 간호사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요추 천자해 주세요. 제 동생에게는 검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지지 않고 검사를 요구했다.

    검사가 늦어지면서 진단이 늦어지고.

    진단이 늦어지면서 치료가 늦어지고.

    결국 사랑이에게 큰 후유증이 닥치는 꼴을 나는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어린 친구가 왜 이렇게 진상을 부려? 어디 대학 의대생이야? 거기 의대에서는 이렇게 선배한테 바락바락 대들라고 가르치나?”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겁니까? 1초 만에 동생을 낫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나요?”

    “…….”

    “제가 원하는 건 그저 동생의 상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검사를 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하… 재수 없게 뭐, 이런 게 걸렸지?”

    쿵!

    제 성질을 못 이긴 마재욱이 진료용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로 인해 응급실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

    “…….”

    나와 마재욱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칼만 들지 않았지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네 말대로 요추 천자 해 줄게. 대신 천자를 해서 세균성 뇌수막염이 아니면 넌 쓴맛을 보게 될 거다.”

    “…….”

    “여기 메모지에 네 이름과 네가 다니는 의대 이름을 적어. 천자해서 아무 이상이 없으면 내가 너희 의대 쪽에 개지랄을 떨 테니까.”

    “좋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나는 차분하게 메모지에 내 이름과 신원대학교의 이름을 적었다.

    “미친 새끼, 깝치는 것도 유분수지.”

    메모장을 확인한 마재욱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내가 의예과 1학년생인 것을 깨닫고 더더욱 빈정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쩐다?

    나는 무늬만 의예과 1학년생일 뿐 알맹이는 전직 흉부외과 부교수인데 말이다.

    심지어 강태섭으로 인해 부산으로 팽당했을 때 임시로 응급의학과 조 교수로도 있었는데 말이다.

    “양 선생님, 요추 천자 세트 좀 준비해 주세요.”

    “네, 선생님.”

    드레싱 카트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사랑이가 누운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수술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한 마재욱이 요추 천자에 나섰다.

    2년 차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그는 실수 없이 한 번에 천자를 마쳤다.

    천자를 마친 마재욱의 눈동자가 잠시 내게 머물렀다.

    가히 나를 잡아먹을 듯한 난폭한 눈빛이었으나 나는 그의 눈빛이 황당하기만 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닌가.

    사랑이만큼 심각한 증상이 있으면 당연히 요추 천자를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나를 원망하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마재욱 같은 대충대충 의사들 때문에 선량한 의사들의 평판까지 깎인다는 사실이 나는 마땅했다.

    “사랑아, 이제 좀 어때?”

    뇌척수액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병상에 걸터앉아 사랑이를 간호했다.

    사랑이의 달아오른 몸, 이곳저곳에 아이스 팩을 대주었다.

    “형아, 아까보다는 나은 것 같아.”

    슬슬 진통제 효과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사랑이가 제법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회귀한 흉부외과의라서 다행이었다.

    사랑이의 증상이 심상치 않은 것을 확인해서 큰 병원에 오고, 사랑이가 요추 천자까지 받게 했으니.

    만약 대처가 늦었다면…….

    그 뒷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찰대에 앉아 분을 못 이긴 채 씩씩거리는 마재욱을 쳐다보았다.

    아마 지금까지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

    환자를 불청객으로 생각하고 설렁설렁 진료하는 것 자체가 당신의 크나큰 과오라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뇌척수액 검사 결과가 나올 때가 되었다.

    레지던트 2년 차 마재욱이 허접한지

    내가 허접한지는 검사 결과가 말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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