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제5장 활약상(4)
위이이잉.
위이이잉.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등장한 경찰차.
“저기요. 일어나 보세요. 집이 어디예요?”
“니러나어리나얼…….”
“하… 갑갑하네, 진짜. 오늘 취객 신고만 대체 몇 건째인지 모르겠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학생들은 갈길 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동료 경찰과 함께 취객을 차에 태우고 사라졌다.
일단 지구대에 취객을 데려간 뒤 술이 깨면 그때 집으로 귀가시킬 할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별일 없어서.”
“그러게.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남초롱의 말에 나 역시 놀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얼마 전 흉기에 난도질을 당한 환자에게 응급 처치를 했던 탓일까.
주택가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 순간 등골이 시려 왔다.
이번에도 끔찍한 사건이 터진 건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한 결과 그는 단순한 취객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믿음이 너 벌써부터 환타 소질 있는 것 같다?”
쿡쿡 웃으며 말을 거는 남초롱.
“환타를 알아? 보통 수련을 시작해야 아는 단어인데…….”
나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환타는 환자를 타는 의사의 줄임말로 환타의 곁에는 환자가 끊이질 않는다.
환타에겐 자석처럼 환자를 끌어당기는 신기한 힘이 존재했다.
“동아리 선배한테 들었어. 근데 너도 환타의 뜻을 아네?”
“그게… 나도 동아리 선배에게 들었으니까.”
“착각인지 몰라도 믿음이 네 주변에 있는 참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 같아.”
“…….”
“오리엔테이션 때도 그랬고, 저번에 주점에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인정 안 할 수가 없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나는 환타가 아니었지만 이번 생의 나는 환타가 분명한 것 같았다.
회귀한 내가 미래에 벌어진 비극을 막기 위해 현장에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뜬금없이 벌어진 사건을 뒷수습을 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주점 칼부림 사건.
안태환의 아나필락시스 발작 사건이었다.
의대생인 지금 시점에서도 말도 안 되는 일이 곳곳에서 터지는데 병원에 들어가면 얼마나 큰 사건이 터질까.
나는 벌써부터 내 환타 기질이 두려웠다.
“그래도 믿음이 너는 그런 사건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잖아. 신은 사람에게 감당할 만한 시련만 준다는 말도 있고.”
“초롱아, 너 종교 있어?”
나는 잠시 딴 길로 빠졌다.
“딱히 믿는 종교는 없지만 초월적인 존재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
“믿음이 너는 믿는 종교 있어?”
“나도 딱히.”
부모님이 믿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지 나도 따로 믿는 종교가 없었다.
그렇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병원 근무를 하다 보니 종교와 가까워질 기회는 더욱 없어졌다.
돈에 쪼들려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
너무 이른 나이에 꽃다운 나이에 희귀병을 앓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환자들.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환자들.
병원에서 다양한 비극과 불행을 마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교와는 멀어지고 말았다.
회귀라는 기적을 겪고 나선 생각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우리는 잡담을 나누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지켜본 결과 남초롱은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잘 웃으며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다.
다만 속내를 털어놓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오늘 술자리만 해도 사적인 이야기를 가장 적게 한 사람이 남초롱이었다.
-남초롱에게도 무언가 비밀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철역까지는 방향이 같았으나 나와 남초롱은 노선이 정반대편이라 헤어져야 했다.
“이거 받아.”
헤어지기 직전, 나는 남초롱에게 선물용 종이 박스를 받았다.
“이게 뭔데?”
“오늘 화이트 데이잖아. 집에서 수제 사탕을 만들어 봤어. 오리엔테이션 때 흑기사 해 준 게 고맙기도 해서.”
남초롱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오늘이 화이트 데이임을 알았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날짜에 둔감한 건 여전했다.
“화이트 데이는 남자가 여자한테 사탕 주는 날 아닌가?”
“꼭 그러라는 법은 없지. 난 갈게.”
“고마워. 잘 먹을게.”
남초롱과 헤어진 뒤 종이 박스를 개봉하자 알록달록한 빛깔의 사탕이 줄 맞춰서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사탕만으로도 남초롱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사탕에 입에 물고 동봉된 편지를 읽었다.
예쁘장한 글씨에 글씨보다 더 예쁘장한 남초롱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본래라면 지금쯤 강태섭의 계략에 희롱당해 실의에 빠졌을 양순재.
친동생을 잃고 오열했을 안태환.
아예 존재 자체마저 지워졌을 남초롱 등등.
나는 의대에 들어와서 내가 살리고 새롭게 맺은 인연들을 떠올리며 뿌듯함을 느꼈다.
이들과 함께라면 앞으로 더 험한 길도, 더 높은 길도, 더 먼 길까지도 나아갈 수 있겠지.
* * *
오전 수업을 마친 나는 모처럼 유치원을 향했다.
아버지는 출판사 관계자들과 오찬 약속이 있었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사랑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기에 내가 출동한 것이다.
유치원에 도착하자 사랑이가 힘없는 표정으로 현관에 나왔다.
평소라면 ‘형아!’를 외치며 와락 달려들었을 텐데…….
사랑이의 풀죽은 모습에서 나는 기분 나쁜 위화감을 느꼈다.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나는 사랑이 곁에 선 유치원 교사에게 물었다.
“아니요, 다른 원생하고 다투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고요. 환절기라서 그런지 어제부터 감기 걸린 원생이 조금 있더라고요.”
“…….”
“아마 감기가 옮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관리를 못해서.”
“어쩔 수 없죠. 사랑아, 형아한테 인사 안 할 거야?”
나는 허리를 숙인 채 사랑이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사랑이는 그제야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형아가 왔어?”
“그래, 사랑이 보고 싶어서 한걸음에 달려왔지. 몸은 좀 어때?”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파.”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하는 사랑이.
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소중한 내 동생이 아프다고 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자식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픈 게 낫다고 말하는 부모님들의 심정도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참사랑이란 어쩌면 아픔을 공유할 줄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참을 수 있어. 형아가 ‘호’ 해 주면. 선생님, 우리 형아 의사 선생님 공부 중이에요.”
“…….”
“우리 형아가 ‘호’ 해 주면 다 나아요. 부럽죠?”
아픈 와중에도 내 자랑을 하는 사랑이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부럽네. 선생님도 아프면 사랑이 형아한테 호 해 달라고 해야겠다.”
“선생님이 저한테 간식을 잘 주시면요.”
“선생님도 일 보셔야 하니까 이제 그만 가자. 수고하셨습니다.”
유치원 교사에게 작별 인사를 한 나는 사랑이를 등에 업고 유치원을 떠났다.
평소라면 고사리 같은 손을 붙잡고 걸었겠지만 아픈 사랑이가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아, 형 볼에 잠깐 이마를 대 볼래?”
“왜?”
“열이 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네.”
사랑이는 제 이마를 고분고분 내 뺨에 갖다 댔다. 그런데 사랑이의 이마에서 느껴지는 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후끈한 것이 손난로를 방불케 했다.
사실 어린아이들에게 열이 나는 것은 흔한 증상이었다.
어릴수록 면역 반응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펄펄 끓던 열이 순식간에 내려가기도 하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열이 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유치원에서 감기가 옮았을 수 있다는 교사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나는 집에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운 의원을 찾았다.
간단한 체온 측정과 문진을 통해 사랑이는 예상대로 감기 진단을 받았다.
의원과 약국을 나와서 받은 건 3일 치 해열제와 진통제뿐이었다.
뭐, 뻔히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진단과 약을 받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형아, 나 약 먹기 시른데.”
약을 먹이려고 하자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랑이.
“그렇게 아프면 포켓몬 마스터가 되겠어, 못 되겠어?”
“…….”
“그리고 사랑이가 아프면 포켓몬들이 사랑이를 걱정할 텐데. 그게 좋아?”
“아니.”
“맛있는 주스 사 줄 테니까 같이 먹자. 빨리 나아야지.”
사탕발림에 성공한 나는 가까운 편의점에서 주스를 구입한 뒤 약과 함께 먹였다.
“옳지. 꿀떡 잘 삼켰네.”
“나 잘했어?”
“잘하고말고.”
“근데 형아, 빨리 호 해 줘. 나 아직 호 못 받았어.”
사랑이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사랑이에게 호 해 주었다.
녀석 그렇게 호가 좋을까.
사랑이와 집으로 들어간 뒤 나는 찰떡처럼 사랑이에게 붙어 있었다.
사랑이의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약을 먹고 나서 한동안 사랑이는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TV에서 방영하는 포켓몬스터도, 웨딩피치도 재미있게 보았다.
문제는 서너 시간이 지난 뒤 발생했다.
삐비비빅.
사랑이에게 고막 체온계를 사용한 나는 체온을 확인하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해열 진통제를 먹었음에도 체온이 38도에 육박했다.
초롱초롱하게 TV를 보던 사랑이의 눈동자는 어느새 힘을 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선 안타까운 신음만이 흘렀다.
어쩌면 사랑이는 단순한 독감에 걸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나는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랑이에게 다가갔다.
한 손으로 사랑이의 목을 쥐고 앞으로 살짝 굽혀 보았다.
그런데 근육이라도 뭉친 것처럼 사랑이의 뒷목이 빳빳했다. 목이 경직되어 앞으로 잘 굽혀지지가 않았다.
평범한 독감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특이 증상.
순간 나는 사랑이가 앓고 있는 것으로 의심 가는 질환 한 가지를 떠올렸다.
내 의증(의심 가는 증상, Rule out)이 맞다면 사랑이는 응급 상황이었다.
사랑이가 아닌 유치원의 다른 원생까지도.
나는 재빨리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사랑이와 같은 증상을 앓고 있는 원생들에게 큰 병원을 가 보라고 유치원 차원에서 권유하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형아,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너무 추워.”
통화를 마치자 사랑이가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내 육신이 고통스러운 것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아랑 큰 병원에 가자. 조금만 더 힘내렴.”
나는 사랑이를 두 팔로 안고 황급하게 집을 나왔다.
큰 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가장 가까운 종합 병원으로 향했다.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병원이 오늘처럼 길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괜찮아, 사랑아.”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사랑에게 호를 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당장 사랑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택시에서 내린 나는 바람처럼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응급실 원무과에 접수하고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진료를 기다렸다.
미래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만약 미국행을 택해 자리를 비웠거나.
의료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사랑이는 죽거나 큰 후유증을 앓았을지 몰랐다.
사랑이가 앓고 있는 질병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