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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73화 (73/257)
  • 73화 제5장 활약상(3)

    양순재의 차를 타고 대학교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떨어진 뒤였다.

    캄캄한 하늘에 어느새 달이 떴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가로등의 불빛이 훤하게 빛났다.

    캠퍼스 앞 횡단보도에는 하교하는 학생들이 떼거리로 몰려 있었다.

    “오늘은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교수님이야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가? 수고를?”

    양순재가 헛헛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생을 한 건 믿음이 너란다. 횡격막 파열을 집도한 데다가 내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느라 많이 지쳤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을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서 기뻤는데요. 앞으로도 교수님이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은 적당히만 해. 다른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낄지도 모르니까.”

    양순재의 농담 같은 작별 인사를 끝으로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양순재의 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사건을 많이 겪은 날이었다.

    양순재의 동기가 200병상의 종합 병원을 소유한 갑부라는 것.

    덕분에 나는 다른 서전들보다 일찍 수술방에서 폐·식도 파트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 되는 강태섭의 악행.

    ‘넌 정말 구제 불능이다.’

    나는 강태섭의 뻔뻔한 면상을 떠올리며 이를 박박 갈았다.

    전생의 나는 강태섭이 악마인 줄 까맣게 몰랐다.

    그에게 신 수술법을 도둑맞고 지방 분원으로 내쫓길 때까지도 말이다.

    그런 내가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강태섭의 악행으로 인한 피해자가 나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강태섭은 현생의 내 스승인 양순재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피해자가 어디 양순재뿐이랴.

    알게 모르게 강태섭의 먹잇감이 된 이들은 이용당하거나 피폐해지거나 망가졌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겠구나.’

    나는 오랜만에 무력감과 좌절감을 맛보았다.

    회귀를 했더라도 의예과 1학년생인 나는 강태섭의 악행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의대에 있고 강태섭은 부산에서 펠로우 과정을 밟고 있으니까.

    활동 무대가 다르니 제아무리 나라도 강태섭에게 손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실력과 인맥을 쌓는다.

    그리고 나중에 강태섭을 만났을 때.

    내가 당했던 방식으로 내가 당했던 고통을 배 이상 갚아 준다.

    현재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으로 보였다.

    * * *

    “흑기사 왔냐?”

    “이믿음, 얼굴 보기 힘들다?”

    “믿음아, 안녕.”

    학교 근처 술집에 들어서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신철우, 권아름, 남초롱이 인사를 건넸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신철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후 교양 수업을 끝낸 세 사람이 나를 보고 싶다며 불러냈던 것이다.

    “오늘은 또 오후 수업 빼 먹고 어딜 갔다 왔냐?”

    “빼 먹은 게 아니라 비워 둔 거지. 난 누구처럼 무식하게 수강 신청 안 했거든.”

    “무식한 게 아니라 효율적인 거다. 기왕 등록금을 냈으면 수업을 많이 듣는 게 이득 아니냐?”

    신철우가 또 익살스러운 혀를 놀려 대기 시작했다.

    “뇌는 말이야, 자극을 원한단 말이지. 그것도 다양한 분야의 자극.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도 어쩌면 전기 자극에 불과한 걸 수도 있어.”

    “또, 또 뇌 병 도졌네.”

    나를 혀를 차며 내 잔에 술을 따르고 잔을 비웠다.

    뇌를 들먹이는 것은 신철우의 4차원 화법에 발동이 걸렸다는 신호였다.

    “뇌 타령도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어?”

    “불가능해. 내 뇌가 멈추기 전까지는.”

    “믿음이 너도 고생이 많다. 철부지 철우 데리고 다니느라.”

    “철부지? 데리고 다녀? 내가 무슨 유치원생인 줄 알아?”

    권아름의 공격에 발끈하는 신철우.

    내성적이고 조용조용한 성격의 남초롱은 그저 입을 가린 채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킥킥 웃을 따름이었다.

    “뇌, 뇌. 제가 죄송했습니다.”

    “권아름, 너 요새 나 놀리는데 맛 들린 것 같다?”

    “고작 이 정도로? 내가 진짜 맛 들리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구나?”

    신철우와 권아름이 티격태격 만담을 주고받는 동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중심은 신철우였다.

    신철우는 왜 말끝마다 뇌를 들먹이는 걸까.

    물론 4차원인 성격 때문이라고 하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뭔가가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승인 양순재의 일찍 은퇴한 이유가 사실은 완벽주의 때문이 아니었던 것처럼.

    신철우가 뇌를 들먹거리는 데는 다른 이유가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야만 신철우와 영혼의 단짝이 될 수 있을 테니까.

    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그 사람의 취미, 좋아하는 음식, 키와 체중 등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사람의 가슴속에 숨겨진 그늘을 이해해야 했다.

    내 그늘이라면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성취나 놓쳐 버린 인연들을 향한 후회와 미련일 테고.

    술잔이 오고 가면서 대화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평소와 달리 신철우에게 질문을 더 많이 더 자주했다.

    신철우라는 인간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가족 관계라든가.

    학창 시절 교우 관계라든가.

    연애를 해 본 적이 있냐던가 등등.

    질문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 오늘따라 수상하다? 내가 감자밭이라도 돼? 왜 이렇게 뭘 캐려고 해?”

    신철우는 내가 원하는 것을 순순히 보여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내면에 침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무장이 단단히 된 공작원이라도

    제 스스로 입을 열 수 있게 만드는 무기를 나는 가지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당연히 술이다.

    “캐내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걱정 마. 하늘이 무너져도 너랑 사귀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나는 익살맞게 대화를 받아치곤 건배를 유도했다.

    얼큰하게 취한 탓일까.

    그동안 쌓아 온 서로를 향한 친밀감이 더 끈끈해졌기 때문일까.

    권아름이 먼저 콤플렉스를 밝혔다.

    “나 본과 들어가기 전에 성형할까 봐.”

    “성형은 왜? 어딜?”

    “코가 너무 낮은 것 같아서. 난 학창 시절에 별명이 돼지 코였거든. 어떤 애들은 콘센트라고 놀렸어.”

    항상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던 권아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권아름의 코가 낮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나는 권아름의 고백에 조금 놀랐다.

    “왜? 내가 보기엔 예쁘기만 한데? 아름이 너한테 관심 끌려고 남자애들이 일부러 놀린 거 아니야?”

    “정말 그럴까?

    “내가 보기에도 괜찮은 것 같은데? 남의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마.”

    “나도 두 사람 말에 동감.”

    내 말에 신철우와 남초롱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제야 한결 표정이 풀어진 권아름.

    콤플렉스란 어쩌면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남이 교묘하게 심어 놓은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화제가 외모로 넘어갔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신철우에게 화살을 돌렸다.

    “여기 흉터 뭐야? 어렸을 때 다쳤어?”

    전에는 몰랐는데 신철우의 어깨 근처에 흉터가 있었던 것이다.

    “아… 이거?”

    흉터를 손으로 매만지는 신철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흉터가 생긴 이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러니 신철우를 알고 싶다면 이 흉터를 파고들어야 했다.

    “어렸을 때 놀다가 다친 거?”

    “하… 말하자면 길고 암울한데… 들을 준비 됐어?”

    “물론이지. 형님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거 알면서.”

    “염병.”

    신철우는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흉터 속에 감춰진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취하긴 취했나 보다. 원래 이런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분위기 무겁게 만들어서 미안한데 잠깐 말 좀 하자.”

    “길게 해도 돼.”

    “그럼 더 고맙고.”

    권아름이 코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신철우의 흉터 속에 담긴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신철우는 어렸을 때부터 새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그는 술만 마시면 폭군이 되어 신철우를 때렸다고 한다.

    신철우의 어깨에 생긴 상처는 새아버지가 깨진 술병으로 난동을 부리다가 신철우의 어깨를 그어서 생긴 상처라고 했다.

    평소 쾌활한 신철우의 성격 속에 이런 어두운 과거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믿음, 아까 왜 그렇게 뇌 타령을 하냐고 물었지?”

    “…그랬지.”

    “그거 사실 새 아버지한테 학대당해서 그런 거다. 고등학교에 올라서 우연히 뇌 과학에 관련된 책을 읽었지.”

    “…….”

    “우습게도 난 그 책에서 희망을 봤어. 왜냐고? 내가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 그리고 분노와 증오가 단순히 뇌에서 오고 가는 신호라고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설명을 듣고 나니 신철우가 뇌 타령을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닥친 고통들을 견뎌 내기 위해 신철우는 필사적으로 뇌라는 기관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느끼는 모든 것이 전기 자극에 불과하다면

    현실감을 덜 느낄 수 있으니까.

    덜 고통스러울 수 있으니까.

    가족에게 받는 학대.

    뉴스에서만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신철우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기분이 한결 더 묘했다.

    누군가에게는 항간의 소식 정도에 불과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도 아직 멀었구나.’

    회귀를 했다고 해도 나는 외과의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동안 신철우를 단순히 4차원이라고 매도했으니까.

    신철우가 왜 4차원인지 너무 늦게 알아보려고 했으니까.

    앞으로 좀 더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분발이 필요할 듯싶었다.

    “이거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 겁나 무거워졌네.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던 건데.”

    “…….”

    “그렇다고 너무 안쓰럽게 볼 건 없어. 그 인간은 죽고 세상에 없으니까. 나도 일단 보란 듯이 성공하기도 했고.”

    신철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분명 아무렇지 않지는 않을 것이다.

    집도를 수없이 많이 해 본 나는 알았다.

    큰 상처에는 큰 흉터가 남는다는 것을.

    큰 흉터는 때때로 아파 온다는 것을.

    “내 이름이 왜 이믿음이겠어. 힘들 땐 형님만 믿고 따라와라. 형님이 다 해결해 줄게.”

    나는 무거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익살스럽게 말했다.

    신철우가 내 농담에 웃으면서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슬슬 일어납시다. 오늘은 내가 헛소리를 많이 했으니까 내가 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철우가 술값을 계산했다.

    공교롭게도 집에 가는 길은 두 사람씩 나뉘었다.

    나와 남초롱은 지하철을 타야 했고 신철우와 권아름은 버스를 타야 했다.

    두 사람과 헤어진 뒤 나는 남초롱과 함께 술집 거리를 가로질렀다.

    거리를 10분 정도 걸어야 지하철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철우의 예상치 못했던, 불우한 사연을 들었기 때문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래서 남초롱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건이 터진 것은 술집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한 사람이 길바닥에 대(大)자로 쓰러져 있었다.

    의식이 없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안감.

    회귀하고 난 다음부터 추리소설의 탐정처럼 사건을 몰고 다니는 나였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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