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72화 (72/257)
  • 72화 제5장 활약상(2)

    강태섭.

    그 이름 석 자를 듣고 나서 한동안…….

    나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이름이 내 가슴속에 묻힌 분노를 자극하는 이름인 것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변함이 없었다.

    강태섭에 관한 것이라면 나는 파블로프의 개나 다름없었다.

    단, 이번만큼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이 그 이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줄도 몰랐다.

    그래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교수님, 대체 강태섭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묻고 말았다.

    평소답지 않게 말실수도 저질렀다.

    “믿음이 넌 꼭 태섭이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만… 어쩐지 그 사람이 양 교수님께 해를 끼쳤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 지나간 일이니 너까지 흥분할 필요 없어.”

    양순재가 착잡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그가 영혼의 파트너인 민동근에게도 말하지 못한, 일찍 은퇴를 마음먹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았다.

    때는 바야흐로 2년 전.

    장소는 신원대학교 부산 병원 브랜치(지방 분원).

    당시 흉부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던 양순재는 3년 차 레지던트 이지혜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지혜는 흉부외과에 단 한 명뿐인 여성 레지던트로 성격이 싹싹하고 궂은일도 잘 처리했다.

    그런 이지혜가 참 예뻐 보였다고 양순재는 말했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말하는 예쁘다는 외모적인 부분이 아니란다. 참하고 기특해 보인다는 뜻이지.”

    “…….”

    “지혜는 능력 있는 서전이 되고 싶었단다. 그래, 지금의 믿음이 너처럼.”

    양순재의 옛날이야기에 나는 점점 깊게 빠져들어 갔다.

    이 이야기의 결말부에 정말 중요한 정보가 숨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전생의 나는 어째서 양순재를 그저 그런 교수라고 기억했을까.

    아마도 양순재가 일찍 은퇴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 지금 진행 중인 이야기 속에 그 단서가 숨어 있을 것이다.

    “하루는 지혜가 나를 찾아와서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하더구나.”

    “…….”

    “믿음이 너도 날 경험해서 알겠지만 난 배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결코 내치지 않지.”

    계속되는 양순재의 설명.

    양순재는 내게 그랬듯이 짬짬이 시간을 내서 이지혜를 가르쳤다고 한다.

    시간은 흘렀고, 그렇게 훈훈한 사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았던 찰나.

    문제의 강태섭이 등장했다.

    이때의 강태섭은 4년 차 레지던트이자 치프 레지던트.

    즉, 의국장이었다.

    하루는 수술이 끝나고 강태섭이 양순재에게 면담을 요청하게 되었다.

    “과장님, 지금 과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차마 말씀드리기 외람되지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보거라.”

    “그게… 과장님이 지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뭐… 뭐라고?”

    강태섭이 전한 충격적인 소식에 양순재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전문의도 아닌.

    고작 3년 차인 새파란 레지던트와 자신이 정분이 났다니…….

    이게 무슨 황당하고 해괴망측한 소문이란 말인가.

    “강태섭, 너 지금 나를 희롱하는 게냐? 감히 네가 나를?”

    양순재는 모멸감으로 몸을 바르르 떨며 물었다.

    흉부외과 과장에 오르기까지 환자와 보호자는 물론이요.

    의료 스태프에게 한 점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양순재였다.

    강태섭이 말한 소문이 과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은 양순재를 나락으로 빠트렸다.

    “오해이십니다.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저야 당연히 과장님의 인품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죠.”

    “그런데?”

    “다만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과장님께서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전해 드렸습니다.”

    “…….”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니까요.”

    “하… 살다 보니 이런 엿 같은 경우도 다 있군. 혹시 소문의 근원지는 알고 있니?”

    양순재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에 손을 얹어 평소보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침착이야말로 외과의의 미덕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근 두 달 동안 지혜와 교수님 단둘이 있는 장면을 목격한 스태프들이 많습니다.”

    “…….”

    “아마 그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알았다. 용기를 내서 이야기해 주니 오히려 내가 고맙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꿀꺽. 꿀꺽.

    커피를 들이켜면서 양순재의 목젖인 쉴 새 없이 출렁거렸다.

    혼자서 계속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옛 상처가 쓰라려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

    “…….”

    무거고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한참 동안 이어지는 침묵.

    이야기는 끝났지 않았음에도 나는 벌써 그 결말을 알 것 같았다.

    회귀한 나는 눈치가 빨랐으며 인간관계를 읽어 내는 눈도 성숙했으니까.

    도덕성을 중요시하는 스승에게 제자와의 추문은 말도 못할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설령 거짓일지라도 추문을 좋아한다.

    영웅을 떠받드는 것만큼 영웅을 끌어내리는 것도 좋아한다.

    아마도 양순재는 그 희생양이 되었겠지.

    “이야기가 너무 긴데, 이쯤 할까?”

    “어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중요한 일을 나한테 숨긴 것도 괘씸한데 중간에 말까지 끊겠다고? 어림도 없지!”

    민동근이 양순재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화가 잔뜩 난 민동근의 얼굴을 보면

    그 역시 나처럼 결말을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휴, 좋네. 믿음이 앞에서 이런 치부까지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기회에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도 좋겠지.”

    양순재의 설명이 이어졌다.

    흉부외과 과장이 3년 차 레지던트와 정분이 났다.

    이 말도 안 되고 괘씸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양순재는 기꺼이 칼을 빼 들었다.

    오전 컨퍼런스가 끝난 뒤 풍문을 직접 언급한 것이다.

    “요즘 나와 지혜와의 관계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퍼졌더군요. 그런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믿는 스태프들은 없겠죠?”

    “…….”

    “지혜야, 너와 내가 정녕 이상한 관계더냐?”

    “절대 아닙니다. 교수님은 그저 자상하게 절 가르쳐 주셨을 뿐이에요.”

    이지혜가 강하게 풍문을 부인했다.

    “자, 이쯤 되면 다들 풍문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건지 알 겁니다. 다들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자기 일에 집중하세요.”

    “…….”

    “우리는 환자를 치료하기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나름 완벽하게 뜬소문을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양순재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의 해명은 오히려 쓸데없는 오해만 불러일으켰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자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자기도 괜히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다른 스태프들이 다 있는 데서 이지혜에게 정분 여부를 물어보면 이지혜가 제대로 답변을 하겠느냐 등등.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 때문일까.

    양순재와 이지혜를 향한 흉부외과 스태프들의 시선은 차차 곱지 않게 되었다.

    놀랍게도 양순재가 그동안 쌓아 온 훌륭한 인품조차 그 뜬소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부 스태프들은 양순재를 위선자라고까지 생각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렇게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은 양순재는 결국 4개월 만에 과장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등이 떠밀린 채.

    “이제 와서 솔직하게 말하는 거지만 말이야. 나는 내 솜씨가 미더워서 그만둔 것이 아니야.”

    “…….”

    “나는 방금 말한 사건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지. 지혜와 추문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내 편을 들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

    “어쩌면 자업자득일지도 모르겠어. 내 인품이 조금만 더 훌륭했다면 다들 내 말을 믿어 주었을 텐데.”

    말을 마친 양순재가 다 마신 커피잔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양순재가 겪었을 말도 못한 고통.

    말하지 못한 고통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설마 스승에게 이런 그림자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이렇게 큰 상처를 받았으니.

    내가 본과 때 받았던 양순재의 수업 질이 좋을 수가 없었겠지.

    “자책하지 말게. 그건 자네 잘못이 아니야. 그저 사람을 끌어내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못된 습성 때문이니까.”

    “동근이, 미안하네. 이런 이야기를 이제 와서 털어놓다니.”

    “솔직히 그건 좀 괘씸하긴 하지. 그러니까 당분간 술값은 무조건 자네가 내도록 해.”

    “그거야 어렵지 않지.”

    자칫 무거워질 수만 있던 분위기를 민동근이 유쾌하게 풀어냈다.

    민동근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믿음아, 넌 날 어떻게 생각하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게 실망했니?”

    “…….”

    “내가 레지던트와 정분이 났는데 변명과 핑계를 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

    “절대 아닙니다. 저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양 교수님 편입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순재와 사제 관계를 맺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양순재가 순결한 영혼이라는 것을 알았다.

    양순재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환자밖에 몰랐다는 사실뿐이리라.

    “녀석,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양순재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계속했다.

    “너는 내게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정반대란다.”

    “…….”

    “교통사고 현장에서 활약하던 너를 보면서, 무서운 재능을 선보이던 너를 지켜보면서 나는 예전의 나를 떠올리고 있었단다.”

    “…….”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도 수재였고 환자라면 물불 안 가리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지.”

    “…….”

    “너로 인해 나를 반추하게 되었고, 덕분에 내 의사 생활도 그리 헛되지는 않았다고 위로하게 되었단다. 비록 은퇴할 때는 그리 아름답지 않았지만 말이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양순재의 길고 고통스러웠던 고백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민동근 병원에 남았고, 나는 양순재의 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돌아가는 내내 나는 강태섭의 이름을 잘근잘근 씹으며 저주했다.

    전생의 나였다면 아마 양순재와 비슷하게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풍문에 재수 없게 휘말렸구나, 하고.

    하지만 현생의 나는 양순재의 은퇴에 강태섭이 깊숙하게 간섭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사이코패스인 강태섭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통제하는 건 강태섭의 주특기였으니까.

    가까운 미래에는 이 심리적인 기만을 가스 라이팅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강태섭은 아마 양순재와 반대편에 있는 세력에 포섭되어 양순재를 끌어내렸을 것이다.

    그 대가로 빠른 승진이나 주요 논문의 공저자로 올랐을 테고.

    이야기를 반추하다 보니 나는 이지혜라는 여자 레지던트도 매우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강태섭의 번지르르한 외모와 매너에 빠져 강태섭의 조종을 받았을 확률이 컸다.

    윗 연차 선배한테도 부탁하기 힘든 개인 교습을 과장에게 부탁한다?

    이건 지극히 상식 밖의 일이었다.

    사람 좋은 양순재의 성품을 이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하… 진짜 말도 안 되는 악당이잖아. 한낮 레지던트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과장을 끌어내리지?’

    나는 강태섭에게 감탄 아닌 감탄을 하고 말았다.

    양순재의 강점인 도덕성을 오히려 약점으로 만들어 이리도 쉽게 무너트리다니…….

    그야말로 세기의 악당이라고 할 만했다.

    강태섭과 이지혜.

    흉부외과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던 스승의 등에 비수를 꽂은 원수들.

    아니,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들.

    나는 그들의 이름을 가슴 깊숙한 곳에 고이 묻었다.

    내가 의사가 되어 그들과 마주하는 순간.

    그들은 정의의 철퇴를 얻어맞게 될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