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71화 (71/257)

71화 제5장 활약상(1)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군.’

양순재는 곁에서 걷는 이믿음을 훔쳐보고 혀를 찼다.

살짝 볼을 꼬집어 보니 탄력을 잃은 피부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분명 꿈은 아닌데 의식이 꿈결처럼 몽롱했다.

육신에서 전해지는 오감은 어렴풋했다.

이게 다 이믿음 때문이었다.

수술 도구의 사용법.

실전에서 이루어지는 수술 과정의 개요.

오늘 그가 이믿음을 양원 병원에 데려온 것은 수술의 기초를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논문 공부와 케이스 스터디만 하면 지루할 테니까.

말하자면 동기 부여를 위해 수술의 맛만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이믿음은 의료 지식만 선행 학습한 것이 아니었다.

수술 스킬까지 미리 공부를 해 두었다.

이믿음이 자신만만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개흉술을 펼치고 횡격막 봉합하던 것을 떠올리면 양순재는 지금도 소름이 돋았다.

허… 수술책을 보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니…….

확실히 천재는 천재인 건가?

비록 대상이 카데바라고 해도 의예과 1학년생이 횡격막 파열을 수술했다고 하면 다른 교수들은 잠꼬대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치였다.

의료 지식이야 머리로 익힐 수 있겠지만 실전 경험은 수술실에서만 얻을 수 있었기에.

어쨌거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믿음이 세상의 상식을 파괴하는 존재라는 것.

“역전의 용사들이 돌아왔군.”

참관용 수술실에 참관 중이던 민동근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믿음아.”

“네, 병원장님.”

“솔직히 이 친구가 네 이야기를 했을 때 하나도 안 믿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

“너를 직접 보고 나서도 네가 믿기지 않는구나.”

민동근 농담 반, 놀람 반을 담아서 말을 건넸다. 그의 휘둥그레진 눈은 좀처럼 이믿음을 떠날 줄 몰랐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에 잠깐 수술실 좀 빌려도 되겠나?

-필요하면 스케줄 맞춰서 쓰는 거지.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그런 건 왜 물어봐?

저번 주, 민동근은 양순재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친구의 연구를 위해 수술방을 자주 내 주었기에 친구가 허락을 구하는 것이 뜬금없이 느껴졌다.

-나 혼자면 상관없는데 제자를 데리고 갈 생각이거든.

-요새 꽂혔다는 이믿음인가 하는 친구 말이지? 천재라서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선행 학습한다는…….

-맞아, 그 친구일세.

수술방을 떠난 후.

현장을 떠난 후.

메스를 내려놓은 후 내내 우울했던 양순재의 목소리가 요즘 들어 퍽 밝아 보였다.

이믿음이라는 학생이 친구에게 활력소가 되어 준 모양이었다.

양순재의 말에 따르면 이믿음은 천재라고 했다.

이믿음은 의예과 1학년생 주제에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선행 학습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드러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양순재가 선별한 의사 국시와 흉부외과 전문의 시험 문제에서 만점을 받았다고도 했다.

친한 친구에게 들은 이믿음의 활약상은 민동근이 생각하기에 가히 삼류 소설급이었다.

개연성도, 현실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양순재가 즐거워 보여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뿐.

-자네 말대로 이믿음이 천재라고 치세. 그래도 벌써부터 수술방에 출입시키는 건 오버 아닌가? 천재라도 적당한 과정은 거쳐야지.

-그건 자네가 믿음이를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날 믿음이를 보고 나서 직접 판단해 보라고.

양순재는 호기롭게 민동근을 도발하며 통화를 끊었다.

그래서일까.

구미호도 홀리지 못할 양순재를 홀린 이믿음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찾아온 오늘.

민동근은 참관용 수술실에서 지켜본 이믿음의 천재적인 솜씨에 경악하고 말았다.

메스, 전기 소작기, 썩션.

헤모 스탯(혈관 겸자), 견인기, 가위[Scissor], 포셉, 켈리 등등.

이믿음은 수술 도구들의 쓰임을 이미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카데바를 대상으로 횡격막 파열술을 집도해 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데.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데.

민동근은 백 번을 봐도 이믿음이 어떻게 그렇게 활약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 나이를 생각하면 수능 공부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민동근을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거기에 의학 서적과 수술 서적까지 같이 공부한 거니?”

“네, 이런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저는 천재니까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공부하다 보니까 그냥 됐습니다.”

이믿음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워했다.

수술방에서는 노련미를 뽐내던 이믿음이었지만 수술방을 나오니 앳된 모습을 보였다.

어쨌거나 이믿음을 직접 보고 나서야 민동근은 깨달았다.

양순재가 이믿음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그에게도 이렇게 영특한 제자 있다면 간이며 쓸개를 퍼 주어도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허허,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상식인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자세한 건 카페에서 더 들어 봐야겠어.”

“…….”

“그나저나 순재, 자네. 이러다가 믿음이 때문에 회춘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안 그래도 믿음이를 만난 날부터 조금씩 젊어지고 있지. 벌써 티가 나지 않나?”

두 사람을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 * *

양순재, 민동근과 찾은 지상 1층 카페.

두 사람은 나를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내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 장래를 어떤 식으로 펼쳐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를 앞에 두고 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잔뼈 굵은 외과의들의 대화는 낯간지러웠다.

천재.

이 단어는 회귀한 내가 쓸 수 있는 무적의 치트키였지만 동시에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버튼이기도 했다.

인턴 때는 C턴.

―병원에서는 실력에 따라 인턴을 에이턴, 비턴, 씨턴으로 부르곤 한다―

레지던트 2년 차까지는 폐급 취급을 받았던 내가 지금은 천재라니…….

전생과 지금을 비교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미국행은 정말 생각이 없는 건지 궁금하구나. 나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만…….”

민동근이 다시 한번 미국행을 꺼내 들었다.

영혼의 의대 동기가 아니랄까 봐 민동근 역시 양순재와 생각이 비슷했다.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수련하고 싶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미국에는 양 교수님 같은 은인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고.”

“…….”

“두 번째 이유는 제가 한국에서 바꿔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입니다.”

“바꿔 보고 싶은 것이라… 구체적으로 들려주겠니?”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사람에 관련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가족 문제도 있고, 학과 동기 문제도 있고. 여러 사람의 문제가 엉켜 있습니다.”

내가 회귀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전생의 나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내가 했던 후회, 실수, 과오.

잘못 맺었던 인연,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인연 등등.

미국행을 택한다면 나는 좀 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겠지만 전생의 오점들을 수정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수련을 하는 무려 11년 동안!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국에 남아야 하는 건 어쩌면 필연이었다.

나는 가지 않았던 길을 가기 위해 회귀한 것이 아니었다.

갔던 길을 되짚어가며 잘못된 허물들을 수정하기 위해 회귀한 것이었다.

“아직 20살밖에 안 된 녀석이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내 말을 듣고 난 민동근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쯤 되면 자네도 인정해야겠지? 내 관상 보는 솜씨가 남다르다는 걸 말이야.”

“…….”

“내가 처음에 믿음이 봤을 때 한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고.”

“그건 반쪽짜리 정답 아닌가? 자넨 믿음이가 전형적인 노력파에 후회와 반성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믿음이는 노력파가 아니라 천재니까.”

“전문가도 아닌데 반이라도 맞춘 게 어디인가. 쯧쯧쯧, 그놈의 완벽주의 하고는. 그러니까 자네가 친구도 없이 빨리 은퇴했지.”

“뭐라고? 이 인간이 못하는 말이 없군. 능력도 없는 주제에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병원이나 운영하는 주제에.”

양순재와 민동근이 주고받는 말은 험악했으나.

정작 말을 하는 두 사람의 표정은 유쾌하기만 했다.

상대의 약점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본 절친만이 가능한 화법이었다.

전생에 이런 허물없는 친구를 갖지 못했기에 나는 두 사람이 부러웠다.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고.

사람을 울게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 아니던가.

만약 내가 인간관계에 신경을 썼더라면 강태섭에게 쓰라린 배신을 당하고도 꿋꿋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영혼의 단짝을 만든다.

서로를 끌고 끌어 주며 험난한 의료계를 헤쳐 나간다.

이것은 회귀한 나의 목표 중 하나였다.

예전의 나는 바보같이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살아왔다.

“믿음이를 보고 있으면 손이 근질근질하지 않나? 내가 자네라면 그럴 것 같은데 말이야.”

민동근이 화제를 돌렸다.

“확실히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요즘 은퇴가 너무 빨랐다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해.”

“저도 교수님이 복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제게 가르침을 다 내려 주신 다음예요.”

“원, 녀석도.”

진담 반, 농담 반이 섞인 내 말에 양순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그놈의 완벽주의를 좀 버리라고. 자넨 이미 대성한 흉부외과의야.”

“…….”

“완벽하지 않은 자네가 집도하는 수술이 지금 수술방에서 수술하는 서전들보다 백배는 나을걸?”

“그럴지도 모르지.”

양순재의 얼굴에 떠오르는 씁쓸함 속에서 나는 석연치 않은 구석을 느꼈다.

어쩌면 말이다.

양 교수가 일찍 은퇴한 것은 완벽주의 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동안 남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면 양순재도 복귀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뒤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는 내게 큰 버팀목이 되어 주지 않을까.

“교수님, 혹시 현장에 돌아가시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으십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휴, 글쎄다.”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1살 무렵으로 회귀해서 터득한 귀중한 요령.

바로 상대의 비밀을 엿보는 요령.

그것은 상대의 내면으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가 곧바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긴 빈 공간을 상대가 채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랜 침묵,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 이는 바로 양순재였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는 동근이 자네에게도 한 적이 없군.”

“대체 무슨 일인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2년 전의 일이군.”

먼 곳을 바라보며 추억을 회상하는 양순재.

나는 양순재가 일찍 은퇴한 이유를 들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듣는다면 양순재가 가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복귀한 양순재가 내 든든한 아군이 되는 것은 덤이었다.

“당시 의국장으로 강태섭이라는 친구가 있었지. 모든 건 그 친구의 입에서 시작되는데…….”

양순재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뜻밖의 강태섭이었다.

내 영혼을 조종하고 내 신수술법을 강탈하고 지방 분원으로 쫓아내기까지 한 불구대천의 원수.

강태섭이 왜 양순재의 이른 은퇴와 관련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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