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제4장 한 걸음 더(4)
3층 복도 끝으로 이동한 양순재가 한 사무실 문 앞에 멈춰 섰다.
거침없는 발걸음이 닿은 곳은 놀랍게도 양원 병원의 병원장실이었다.
양순재는 양원 병원의 병원장과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친분이 나와 어떤 식으로 연결될지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똑. 똑. 똑.
“들어가도 되겠나?”
“얼마든지.”
양순재와 함께 들어간 병원장실 책상에 한 노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명함패에 적힌 직책과 이름은 병원장 민동근.
양순재가 희끗희끗한 머리에 차분한 분위기의 소유자라면
민동근 체격이 다부졌으며 장난꾸러기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양순재가 나, 민동근이 신철우 같은 느낌이랄까.
“옆에 있는 학생이 자네가 입이 닳도록 말한 이믿음 학생인가?”
“그렇다네. 실물로 본 소감이 어때?”
“으음…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말이야. 이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난 민동근이 내게 다가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선이 워낙 노골적이었던 지라 나는 살짝 부담감을 느꼈다.
“전형적인 노력파에 후회와 반성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같군. 자네가 생각하는 자네는 어때?”
“해 주신 말씀과 많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족집게 같으십니다.”
전생의 나는 노력파가 맞았다.
지금이야 회귀 때문에 천재 노릇을 하고 있지만 예전부터 나는 시간에 나를 갈아 넣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이루지 못한 성취들.
내가 지키지 못한 가족과 환자들.
나와 인연을 맺지 못한 동료들을 생각하면 자주 고통스러워하곤 했다.
민동근에게 신기가 있는 걸까.
“봐, 내가 관상 좀 본다고 했지?”
추측이 맞자 민동근이 아이처럼 기뻐했다.
“쯧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우리 믿음이가 사회생활을 얼마나 잘하는 줄 알아?”
“…….”
“이런 상황에서 자네 말이 틀렸다고 할 위인이 아니란 말이지. 정 그렇게 관상에 자신이 있다면 차라리 철학관을 차리는 건 어떤가?”
“깐깐하기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민동근이 혀를 차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민동근이고 부모님을 잘 만난 덕분에 이 병원을 물려받았지. 네 스승과는 대학 동기고.”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도 반갑네.”
악수를 나누는데 손에 전해지는 민동근의 악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딱히 골탕 먹일 의도 같은 게 없어 보였는데도
묵직하고 우악스러운 힘이 느껴졌다.
‘이분도 외과의시구나.’
민동근과의 악수를 통해 나는 민동근도 외과의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손에 드문드문 있는 화상은 보비(전기 소작기)의 흔적일 테고.
손에 드문드문 있는 절상(베인 상처)은 메스나 니들 홀더의 흔적일 테고.
손이 건조하고 갈라진 것은 스크럽(수술 전 소독)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이 살아온 궤적은 어떤 방식으로든 몸에 남는 법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앉아서 할까?”
“네, 병원장님.”
나와 양순재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는 민동근이 앉았다.
다소 정신이 없었던 첫 대면이 끝난 뒤.
나는 내가 왜 병원에 왔어야 했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양순재는 나를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병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수술실을 통째로 빌린 뒤 실습을 진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양순재의 배포에 나는 적잖이 놀랐다.
졸업하기 전까지 논문이나 케이스 스터디만 주구장창 할 줄 알았거늘.
설마 의예과 1학년생일 때부터 수술실에 들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쨌거나 벌써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벅찼다.
흉부외과의로서 내가 가장 빛났던 곳.
내가 가장 빛날 수 있었던 곳이 수술실이었으니까.
“표정이 별로 안 좋구나. 실습이 너무 빨라서 부담스럽니?”
내 표정이 무뚝뚝했는지 양순재가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실습이 좋습니다. 집도는 논문이나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손으로 하는 거니까요.”
“대답 한번 야무지구나. 그래서 네가 널 좋아하지.”
껄껄껄 웃는 양순재.
“오늘은 간단하게 수술이란 것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고, 수술 도중에 쓰는 도구들은 무엇인지 알려 주마.”
“네, 교수님.”
“근데 순재, 교육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이 친구가 천재라는 이야기는 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들었지만 말이야.”
민동근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20살에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서 수술 실습까지 한다고?”
“…….”
“이 친구 잡을 일 있나?”
“믿음이를 자네나 나 같은 둔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정 궁금하면 실습 참관이라도 하던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수술방을 빌려주는데 그 정도 값은 치를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민동근의 질문에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의학 지식으로 천재임을 입증했다면
오늘은 탁월한 손놀림을 뽐낼 차례였다.
의과의로서의 손놀림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전생에서부터 손을 잘 쓰는 편이었다.
심리적인 부담감.
선배들의 괴롭힘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수전증.
이 두 가지 때문에 제 실력 발휘를 못했을 뿐.
천재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번 삶에서 나는 전생과 같은 암흑기는 결코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내 실력을 남김없이 보여 준다.
양순재의 수술 스킬들을 모조리 흡수한다.
양순재가 간절하게 현직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목표를 세운 나는 양순재와 민동근의 대화를 들으며 가볍게 손을 풀었다.
벌써부터 손이 근질근질했다.
* * *
실제로 집도의와 어시스트가 수술방에 입장하듯 나와 양순재는 수술실로 입장했다.
벅. 벅. 벅.
입장 전 포비돈 용액이 묻은 솔로 손과 팔뚝을 소독했으며
수술복과 수술 가운을 착용했다.
수술 마스크와 수술모.
수술 장갑과 심지어 루뻬(광학 안경)까지 착용한 것은 양순재의 고집이었다.
양순재는 내가 수술실의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술실을 온몸으로 체험하기를 바랐으니까.
그의 철저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양순재는 역시 못 말리는 완벽주의자라는 점.
그 완벽주의로 양순재로 인해 은퇴가 빨랐다는 사실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내가 양순재의 눈에 띄어 양순재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점까지.
설령 내가 천재라고 해도 말이다.
의예과 1학년생에게 펠로우 과정을 순순히 교육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본인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모자라
오늘처럼 수술실 실습까지 시켜 주는 교수가 세상 천지에 어디 또 있을까.
아마 미국에도 없을 것이다.
―미국행을 택하지 않은 건 역시 신의 한 수였다―.
즉, 양순재는 내게 또 다른 부모님이나 마찬가지.
그런 양순재에게 보답하는 길이 단 하나 존재한다고 나는 믿었다.
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쑥쑥 성장하는 것.
그런 나를 보며 양순재가 흐뭇해하는 것이 바로 그 길이 아닐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
위이이잉.
수술실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나는 잡념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쎄에에에엑.
천장에서 쏟아지는 하얀 증기가 몸을 씻어 내렸다.
에어 샤워라고 불리는 소독 단계였다.
에어 샤워까지 마친 뒤에야 나는 전생에서만 입장할 수 있었던 수술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살갗을 스치는 서늘한 공기.
코를 찌르는 소독액 냄새.
달덩이처럼 환한 빛을 뿜어내는 무영등.
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들이었다.
“이쪽으로 오거라.”
“네, 교수님.”
양순재가 수술대 옆자리에 섰고, 내가 그 옆자리에 섰다.
자리로 따지면 제2 어시스트의 위치였다.
제1 어시스트는 집도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집도의를 도우니까.
스르르륵.
양순재가 하얀 방포를 걷어 내자 포르말린 냄새를 뿜어내는 카데바(실습용 사체)가 수술대에 놓여 있었다.
“동근이 덕분에 나는 종종 여기서 연구를 하기도 한단다. 이 카데바가 다섯 번째 카데바인데 보다시피 깨끗하지.”
“…….”
“널 위해 준비한 거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회귀를 한 후로 수많은 사람을 도왔지만 정작 내가 이렇게 감동적인 도움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내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다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고작 서전 한 명이 뭘 할 수 있겠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많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마스크 위로 드러난 양순재의 눈빛이 진지했다.
“단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고 해도 우린 태어난 밥값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
“…….”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겠다는 욕심은 버릴 줄 알아야 해. 당장 눈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만 모든 걸 집중해야 한단다. 알겠니?”
“네, 교수님.”
“아까 이야기한 대로 오늘은 간략한 수술 과정과 수술 도구 사용법에 대해 알려 주마.”
“저… 교육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말해 보거라.”
“처치 도구 설명은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다 외웠거든요.”
“…….”
“솔직히 간단한 수술은 지금 당장이라도 집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양순재를 쳐다보았다.
마스크를 써서 표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에 난감하다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이건 클램프입니다. 장기와 혈관에 출혈이 있을 때 결찰을 통해 지혈하는 도구입니다.”
“…….”
“이건 개흉술을 할 때 사용하는 흉골 전기톱이고.”
“…….”
“이건 가위인데[Scissor] Sharp/Blunt 타입으로 한쪽 날이 날카롭고 다른 한쪽은 무딥니다. 봉합사를 자를 때 사용하고요.”
나는 근 10분에 걸쳐 드레싱 카트 위에 놓여 있는 수술 도구들의 이름과 용도를 일일이 열거했다.
인턴부터 시작해서 조교수로 활약할 때까지.
수술방에 들어간 횟수가 몇 번이나 될까.
내게 수술 도구의 이름과 용법을 말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허… 믿기지가 않는구나. 벌써 수술 도구까지 외웠다니.”
감탄한 기색의 양순재.
하지만 나의 질주는 여기서 끝날 수 없었다.
양순재가 지금까지 내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려면 말이다.
“예전에 한국 흉부외과의 협회에서 발간한 흉부외과 수술집이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에는 수술 과정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적혀 있더군요.”
“그렇지. 필요한 수술 도구와 수술 요령, 수술하는 장면이 그림으로도 나와 있는 책이야. 나도 집필진으로 참가했단다.”
“마침 멀쩡한 카데바도 있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나는 일부러 뜸을 들였다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그 책을 통째로 외웠고, 머릿속으로 수술 과정들을 오랫동안 그려 왔습니다.”
“…….”
“교수님이 허락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간단한 집도를 직접 해 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폭탄선언을 해 버렸다.
의예과 1학년 주제에 감히 집도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비록 심장 파트이긴 하지만 나는 엄연히 흉부외과 조교수로 활약했다.
그러니 내게 필요한 건 기초가 아니었다.
심화 및 응용 수련이었다.
때마침 이렇게 좋은 판이 깔리지 않았는가.
실력을 인정받고 심화 단계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허…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믿음이 너는 대체 나를 몇 번이나 놀래켜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교수님이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신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겠다는 마음 하나뿐입니다.”
“으음… 좋다. 오늘에야말로 네 능력의 끝을 보고 싶구나. 내가 도울 테니 집도 해 보거라.”
“…….”
“케이스는 2주 전에 공부했던 횡격막 파열이다.”
“네, 교수님.”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나는 손을 풀었다.
문득 수술용 참관실을 응시하니 민동근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집도 대상은 환자가 아닌 카데바.
참관자는 민동근 한 명.
그래도 의예과 1학년생이 진행하는 첫 집도치고는 퍽 화려한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