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제4장 한 걸음 더(2)
반나절 만에 돌아온 집이 안태환은 너무도 푸근하고 좋았다.
동생의 극단적인 선택 시도.
그동안 살면서 까맣게 몰랐던 자신의 특이한 아나필락시스.
혼을 빼놓는 사건을 연달아 경험하고 나니 집이 더욱 그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안태환은 현관으로 뒤따라 들어오는 동생을 힐끔 쳐다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중 하나는 안도감이었다.
동생이 끝내 목숨을 잃지 않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축복받은 날임에 틀림없었다.
지금도 건물 옥상에서 동생을 마주쳤을 때만 떠올리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으니까.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또 다른 감정.
그 감정의 정체는 미안함이었다.
아무리 공부할 것이 많다는 본과 1학년생이라고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할 때까지.
그는 어떠한 징조도 읽지 못했다.
그저 고3이니까 학업 스트레스 정도만 있겠지, 하고 동생의 고통을 외면했다.
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데는 안태환의 지분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
오늘 안태환의 가족이 겪었던 영화 같은 사건들을 해결한 사람.
그 사람이 전부 이믿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동생의 극단적인 선택을 미리 알아차리고 그 장소까지 눈치챈 사람.
감기와 두드러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질병을.
음식물 의존성 운동 유발 아나필락시스로 밝히고 응급실행을 주장한 사람.
그 모두가 이믿음이었다.
그러니까 안태환 가족은 이믿음에게 구원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이믿음을 알지 못했다면 자신에게 오늘은 어떤 날로 기억이 됐을까.
상상이 그쯤 미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더불어 앞으로 이믿음에게 잘해 줘야겠다는 결심마저 들었다.
까치, 두꺼비, 개구리도 은혜를 갚는다는데.
사람의 탈을 쓰고 오늘 일을 어물쩍 넘어갈 순 없었다.
안태환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앞으로 이믿음을 돕기로 했다.
이믿음에겐 크나큰 은혜를 돌려받은 자격이 충분했다.
“다들 거실에서 쉬고 있으렴. 엄마가 과일 깎아 올게.”
어머니가 부엌으로 향하면서 거실에는 아버지와 안태환, 안소혜가 남았다.
짧은 침묵을 먼저 깨트렸던 건 동생이었다.
“오빠, 몸은 정말 괜찮은 거지?”
극단적인 시도를 마음먹었던 동생이 도리어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바보야,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나야말로 너 때문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난 오빠처럼 병원에 가진 않았잖아.”
“그보다 더 심한… 아니, 됐다. 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안태환은 입안에서 맴돌던 단어와 감정을 주워 삼켰다.
나오는 대로 뱉어 버리면 동생이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우리가 카페에 간 사이에 의사 선생님이 더 말은 없었니?”
잠자코 있던 아버지가 화제를 돌렸다.
“알레르기 내과 레지던트가 잠깐 내려왔어요. 상황을 설명하니까 알레르기 검사를 한 번 받아 보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주에 검사 예약 잡았어요. 검사를 받으면 쇼크 반응이 일어나는 원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래요.”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소혜 일도 그렇고 태환이 네 일도 그렇고 말이야.”
아버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굵직한 일을 잇달아 겪어서 그럴까.
아버지는 반나절 만에 많이 늙어 보였다.
“저녁 먹기 전에 간단하게 요기부터 하려무나.”
부엌을 벗어난 어머니가 과일이 담긴 그릇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다만 안태환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 복숭아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쉽지만 앞으로는 복숭아를 입에 대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까 응급실 나가서는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안태환이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그가 응급실 침상에 누워 있는 동안, 부모님과 동생만 따로 나가서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있다고 들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했다.
“엄마가 소혜한테 싹싹 빌었지. 노트를 찢은 것도 미안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잔소리만 했던 것도 미안하고.”
“이 아비도 그동안 소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사과했단다.”
아버지의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 동생도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 그동안 혼자 속으로 꽁하고 있었으니까.”
“…….”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기도 했고.”
“그건 소혜 네 탓이 아니란다. 엄마가 명문대에 가라고 얼마나 극성을 떨었는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니.”
소혜를 두둔하는 어머니를 보며 안태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의 어머니였다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비록 끔찍한 사건이 있었으나 그 사건은 결국 벌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그 상처까지 보듬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전화위복이란 표현이 딱 어울렸다.
그 후로도 네 가족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 따위를 시청하며 단편적으로 의견이나 감정을 덧붙이는 허물뿐인 대화가 아닌 속내를 털어놓는 대화다운 대화였다.
가족 간의 갈등이 봉합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안태환은 똑똑하고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다 이믿음 덕분이었다.
* * *
“오, 생은이 왔냐?”
심봉사 동아리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안태환이 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팔을 벌려 나를 극성스럽게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인사가 엄청 과격하시네요?”
“과격할 수밖에… 네 덕분에 동생하고 내가 목숨을 건졌는데.”
“제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요. 그냥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것뿐인데. 근데 생은은 무슨 뜻이에요?”
나는 안태환과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생은이 뭐겠니. 당연히 생명의 은인이지. 앉아 봐,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안태환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나는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열흘 전 주말에 겪었던 사건들의 후일담 같은 것이었다.
나도 뒷이야기가 궁금했으므로 쫑긋 귀를 세웠다.
첫째로 안태환은 알레르기 내과에서 실시한 검사를 통해.
음식물 의존성 운동 유발성 아나필락시스 확진을 받았다고 한다.
복숭아를 먹고 트레드밀을 받았다는데, 여기서 트레드밀이란 운동 부하 검사였다.
운동 부하 검사는 주로 심장내과에서 실시한다.
심전도 센서를 부착하고 런닝 머신 위를 달리게 하여 환자의 운동 시 심장 상태를 확인하는 검사였다.
“걸을 때는 괜찮았는데 숨이 찰 정도로 뛰니까 그때부터 알레르기 반응이 오더라.”
“…….”
“진짜 웃기는 짬뽕이지. 복숭아를 먹어도 되고 숨이 차게 뛰어도 되는데. 복숭아를 먹고 숨이 차게 뛰면 안 된다는 거 말이야.”
안태환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식물 의존성 운동 유발성 아나필락시스란 극히 희귀한.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질환이었으니까.
“그래도 원인을 알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 원인을 알고 나면 피할 수 있잖아?”
“그거야 그렇죠. 소혜는 좀 어때요?”
나는 소혜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번 주에는 과외가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연락해 대충 소식은 들었다.
가족끼리 속을 터놓고 이야기한 덕분에 사이가 더 돈독해졌다고.
소혜가 명문대에 취업 잘되는 과에 들어가야 한다는 숙명에서 벗어나.
미대 입시를 준비하게 됐다는 것도.
“그것도 네 덕분에 잘 해결됐지. 소혜, 요새 방긋방긋 웃고 다닌다. 걔가 그렇게 잘 웃는 아이인 줄 예전에는 몰랐는데.”
“정말 잘됐네요. 온 가족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서.”
“근데 너한테는 새드 엔딩일지도 모르겠다.”
“제가 왜요?”
나는 놀라서 반문했다.
안태환 가족만큼이나 행복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전생에서 투신으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던 안소혜를 구하고.
전생에서는 까맣게 몰랐던 안태환의 음식물 의존성 운동 유발성 아나필락시스까지 밝혀냈다.
나는 내가 스스로 부여한 임무를 200퍼센트 완수했다.
뿌듯함이 흘러넘칠 정도였다.
이 맛이 바로 회귀의 맛 아닐까.
“소혜, 앞으로 공부와 관련 과외는 안 하기로 했거든. 너한테는 진짜 미안하지만.”
“전 또 뭐 대단한 일이 있는 줄 알았잖아요. 과외 못하는 건 상관없어요.”
“그래도 미안하지. 한 달도 못 채우고 관두게 됐는데.”
안태환이 소파 근처에 두었던 가방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봉투에는 세 달 치 과외비가 들어 있다고 했다.
“부모님이 고맙다는 인사도 대신 전해 달라고 하시더라.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받아.”
“…….”
“거절하면 지옥까지 쫓아간다?”
“그럼… 잘 쓸게요.”
나는 순순히 봉투를 챙겼다.
마음이 담긴 선물은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선배. 소혜, 미대 입시는 어떻게 준비해요?”
“어머니 말로는 미대 학원 다니면서 미대 학생 과외도 붙여 줄 생각이라던데. 지금 시작하기엔 많이 늦었으니까 재수까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럼 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나는 슬슬 발동을 걸었다.
브루가다 증후군을 앓고 있는 국민학교 동창 김요한과 최근 연락을 주고받았다.
김요한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내신 성적을 잘 관리하고 실기 시험을 잘 봐서 대한민국 최고의 미대에 입학했다.
내게 그랑죠 책받침을 선물했던 코흘리개가 어엿한 미대생이 된 것이다.
다만 김요한은 미대의 값비싼 등록금을 벌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라고 했다.
그래서 김요한과 안소혜를 연결시켜 주면 좋겠다 싶었다.
김요한의 다사다난했던 인생사가 안소혜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고.
“하나가 아니라 두 개여도 되고, 세 개여도 되지.”
“인맥 찬스 좀 쓰려고 하는데요. 소혜 미대 과외 선생을 제 친구로 해 줄 수 있을까요?”
나는 김요한이 어떤 친구인지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안태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이 있는 데다가 네 친구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어. 부모님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얼마든지.”
나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 안태환.
저번 주 사건을 겪은 뒤 안태환은 내게 간이며 쓸개며 모든 것을 떼어 줄 것 같은 관대함을 보였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선순환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이런 선순환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세상도 참 살 만할 텐데…….
“믿음아.”
안태환이 무게를 잡으며 지그시 네 이름을 불렀다.
“네, 선배.”
“너 앞으로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 내 힘이 닿는 한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
“넌 그럴 자격이 있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안태환은 수업이 있다며 동아리실을 벗어났다.
먼 훗날 잔뼈 굵은 정치인이 되는 안태환.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는 거물 정치인이 되는 안태환.
그런 그가 나를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겠단다.
그의 대장부 같은 말은 내게 천군만마와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