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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64화 (64/257)
  • 64화 제3장 막아야 한다 (4)

    안소혜는 터덜터덜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그녀만 빼고 모두 행복해 보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커플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하하호호, 웃기 바빴다.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은 재잘재잘 대화를 나누며 안소혜를 지나쳤다.

    오전 날씨는 모처럼 포근했으나, 안소혜의 마음은 여전히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이틀 전 저녁이었다.

    공부가 지겨워서 잠깐 미술 노트를 꺼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어머니가 기습하듯 방으로 들어왔고, 그림에 열중하던 안소혜는 어머니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안소혜, 너 지금 뭐 하니?”

    등 뒤에서 어머니의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로 돌아 마주친 어머니의 눈은 마치 악귀처럼 무서웠다.

    아… 바보같이…….

    그림 그리는 것을 들켜 버렸구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림 같은 건 왜 그리는데. 그림이 너 밥 먹여 줄 것 같아?”

    “…….”

    “정신 차려, 이것아. 그거 그릴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어야지.”

    “엄마, 나는 잠깐 기분 전환도 못 해요? 24시간 내내 어떻게 공부만 하고 살아요?”

    그동안 당한 일이 서러워서 안소혜는 그만 어머니에게 대들었다. 왜 어머니는 항상 자신을 쥐 잡듯이 잡으려고만 하는 걸까.

    오빠한테는 안 그러면서…….

    오빠한테는 늘 다정하면서…….

    “그리고 나 그림 제법 잘 그려요. 한번 봐 봐요.”

    안소혜가 내민 미술 노트를 어머니가 건네받았다.

    어머니가 노트를 훑는 시간이 안소혜에겐 몇십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안소혜.”

    “네, 엄마.”

    “왜 성적이 안 오르나 했더니 너 주구장창 그림만 그렸구나. 어휴, 네가 너 때문에 못 산다, 못 살아.”

    어머니는 질렸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소혜가 보는 앞에서 미술 노트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노트가 찢어지면서 안소혜의 마음까지 같이 찢어져 버렸다는 것을.

    대꾸할 힘도 없어서 안소혜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우울하고 힘들어도 잘 버텨 왔는데.

    믿음 오빠가 잘해 줘서 그래도 많이 기운을 차려 왔는데.

    어머니의 과격한 행동은 안소혜를 다시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허튼 짓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학생이 왜 학생인 줄 알아야지.”

    어머니가 떠난 뒤 안소혜는 구슬프게 울었다.

    ‘이젠 지쳤어.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아. 하늘에 올라가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며 살래.’

    거리를 걷던 안소혜는 곧 한 건물의 옥상으로 이동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초등학생 시절,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장소였다.

    그녀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분주하고 활기차게 깨어나고 있는 번화가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그녀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 * *

    -그 정도였어? 난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는데…….

    안태환은 낭패라는 듯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안소혜와 과외를 하며 내가 느낀 안소혜의 감정과 생각을 안태환에게 휴대폰 통화로 전했다.

    첫째, 안소혜가 안태환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차별감.

    둘째, 부모님의 엄격한 훈육으로 인한 스트레스.

    셋째, 안소혜가 좋아하는 미술을 숨기면서 겪어야 했던 고통 등등.

    안태환은 이 중에 두 번째 것만 알고 있었다.

    매일 보는 가족이라도 대화를 제대로 안 하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안태환이나 안태환의 부모보다 내가 안소혜를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전화도 안 받는 데다 버디버디 메시지창도 심상치 않아요. 어쩌면 소혜가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나는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내놓았다.

    어쩌면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 나는 속으로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생의 안소혜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설마가 사람 잡는 거 아시죠? 어쨌든 지금은 소혜를 찾는 게 제일 중요해요.”

    -잠깐만, 기다려 봐.

    우당탕탕 발소리가 들린 뒤 착잡하게 가라앉은 안태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씨발, 휴대폰을 방에 두고 갔네. 휴대폰도 아예 꺼놨어.

    안태환도 그제야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모양이었다.

    “선배, 일단 경찰에 신고하세요. 그리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려서 소혜가 있을 만한 곳을 같이 찾아보죠.”

    -지금은 그게 최선이겠네. 넌 지금 어디 있는데?

    “저희 집을 나왔고, 선배 집 쪽으로 가는 중이에요.”

    -괜히 나 때문에 네가 고생하는구나. 소혜만 무사히 구출하면 내가 널 평생의 은인으로 모실게. 약속한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소혜의 안위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래. 고맙고 미안하다.

    통화를 끊은 나는 번화가로 나와 발견한 택시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기사님, 여기요!”

    * * *

    택시를 타고 안태환의 집으로 이동하는 도중.

    나는 안소혜의 죽음과 연관된 전생의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방식이 투신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투신하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긴, 아는 게 더 이상한 건가?’

    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안소혜를 잃었던 전생의 안태환이 안소혜의 투신 장소를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했을 리 없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테니까.

    게다가 조문 간 사람이 안소혜의 투신 장소를 안태환에게 꼬치꼬치 물어볼 리도 만무하고.

    한마디로 이번 생에 안소혜의 투신 장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 믿음이 왔구나.”

    “왔어?”

    택시에서 내려 안태환의 아파트 단지 출입구에 도착하자 안태환의 식구들이 한데 뭉쳐 있었다.

    딸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다들 초조해 보였다.

    나만 해도 애가 타고 조마조마해서 죽겠는데, 가족인 세 사람은 지금 대체 어떤 기분일까.

    “네, 안녕하세요.”

    “이야기는 태환이한테 들었단다. 소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거지? 하… 다 내 탓이야. 내가 이틀 전에 노트를 찢어 버리지만 않았어도.”

    안태환의 어머니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게 당신은 왜 애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건강하게만 자라면 그걸로 고마운 줄 알아야지.”

    “당신도 뒷짐만 지고 있었으면서 전부 내 탓으로 돌리지 말아요.”

    안태환의 부모가 싸울 기세였기에 내가 재빨리 나섰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지금은 두 분이 싸울 때가 아닙니다. 1초라도 빨리 소혜를 찾아야 해요.”

    내 중재에 안태환의 부모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딸을 두고 서로 다퉜던 것이 민망했는지 두 사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근데 소혜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지?”

    안태환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화제를 돌리는 안태환의 입가에 하얀 조각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선배, 입에 뭐 묻어 있는데요?”

    “아… 집에서 복숭아를 먹고 있어서…….”

    안태환이 머쓱하게 웃으며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복숭아 조각을 떼어 냈다.

    “일단 세 분 다 저를 따라오세요. 소혜가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있으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설명할 시간도 없어요. 일단 따라오세요.”

    나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번화가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결과.

    짚이는 곳을 딱 한 군데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안소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속 풍경이었다.

    -선생님이 고른 그림이 완성도는 더 높은데요. 제가 고른 그림에는 제 추억이 있어요.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어서 땡땡이칠 때 이 건물 옥상으로 자주 올라갔거든요.

    과외 첫날, 안소혜가 보여 준 미술 노트에서 본 장소.

    아마 그 장소에 안소혜가 있을 것이다.

    투신을 한다면 분명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장소를 선택하지 않을까.

    쫓기는 기분으로 번화가로 들어선 나는 수많은 상가 건물들을 제치고 피아노 학원이 있는 건물을 위주로 살폈다.

    피아노 학원 간판이 2층에 있었고.

    아래층에는 분식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찾았다!’

    하늘이 도왔는지, 필사적인 노력에 보답이 따랐다.

    1층에 분식집, 2층에 피아노 학원이 있는 건물을 발견한 것이다. 순간, 안소혜를 살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이믿음, 대체 언제까지 달리냐? 또 어딘지는 알고 달리는 거야?”

    나보다 조금 뒤처져서 걷던 안태환이 내 곁에 섰다.

    그의 얼굴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기일 거예요. 아마.”

    나는 검지로 정면에 있는 10층짜리 빌딩 옥상을 가리켰다.

    미술 노트에 그려졌던 풍경화가 나올 수 있는 장소는 내 검지가 가리키는 빌딩 옥상밖에 없었다.

    부디 저곳에 안소혜가 있기를…….

    “선배는 뒤처진 부모님과 함께 옥상으로 올라오세요. 저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나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빌딩 출입구로 향하던 중 빌딩 주변에 사람이 모여 있는지 확인했는데 별다른 소동은 없어 보였다.

    바꿔 말하면, 안소혜가 아직 투신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회는 아직 있었다.

    회귀한 나는 안소혜를 살릴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는 9층에서 내려 옥상으로 뛰어 들어갔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있는 안소혜의 뒷모습을 본 순간 팽팽했던 긴장감이 사르르 풀렸다.

    “소혜야!”

    “서… 선생님? 여길 어떻게?”

    나를 발견한 안소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소혜의 입장에선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겠지.

    “하아… 하아… 일단 선생님 쪽으로 올래? 거긴 너무 위험해.”

    “…….”

    “선생님이 부탁할게.”

    내 간절함이 통했는지 안소혜는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 다가왔다.

    안소혜가 죽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네가 얼마나 힘든지 나는 다 알지 못해. 나는 네가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야. 네가 아파하는 걸 조금이나마 나눠서 가질 순 있단다.”

    “…….”

    “네 우울함과 고통. 선생님하고 같이 이겨 보자. 할 수 있지?”

    내 다정한 말에 안소혜가 숨죽여 울었다.

    어깨는 들썩거리고 눈에선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나는 서러워하는 안소혜를 품에 끌어안았다.

    “선생님, 저 죽으려고 했어요. 나 같은 건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힘들 땐 누구나 주저앉고 포기하고 싶어진단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에요. 제가 못나서 그래요.”

    “그런 소리 계속하면 혼나. 네 잘못이 아니야.”

    안소혜를 다독이고 있는데, 안태환과 안태환의 부모가 옥상에 도착했다.

    무사한 안소혜를 발견하고, 세 사람의 표정이 풀렸다.

    “소혜야, 엄마가 잘못했다. 네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못된 말만 했구나.”

    “아빠도 미안하다. 네게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

    “소혜야.”

    내가 안소혜를 품에서 놔주자 세 사람이 안소혜에게 다가가 위로와 미안함을 전달했다.

    꼬일 대로 꼬였던 네 가족의 앙금이 풀리고 있었기에 나는 그제야 완전히 걱정을 덜었다.

    안소혜를 살린 것은 결국 나의 관심 덕분이었다.

    안소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안소혜의 그림마저 허투루 보지 않았기에.

    투신 장소를 단번에 찾았기에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의사가 환자를 살리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의사가 환자의 증상이나 감정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면, 즉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면 죽을 환자도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콜록, 콜록.”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안태환이 보인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연신 기침을 했고, 숨을 쉬기 불편한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목 부근에 붉은 발적마저 일어나고 있었다.

    전생에서 목숨을 잃었을 안소혜가 살아난 반작용일까.

    이번엔 안태환에게서 불길한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냥 사라진 줄만 알았던 긴장감이 다시 고개를 쳐드는 상황.

    “선배, 괜찮아요?”

    나는 안태환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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