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63화 (63/257)

63화 제3장 막아야 한다 (3)

분명 내 질문은 대학에서 ‘무얼 하고 싶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안소혜의 대답은 의외로 ‘보여 드릴게요’였다.

안소혜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는 무척 궁금해졌다.

“여기요.”

안소혜가 책장 틈에서 꺼내 건넨 것은 다름 아닌 흰 바탕의 무지 노트였다.

나는 노트를 펼쳐 보곤 눈부터 깜빡거렸다.

깔끔한 펜 선으로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안소혜의 그림 솜씨가 남달랐다는 점이다.

미술을 잘 모르는 막눈인 내게도 안소혜의 그림은 단순히 취미로 끄적거리는 수준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안소혜는 아주 오래전부터 혼자 그림 수련을 했던 게 분명했다.

‘그래, 이거였구나.’

나는 안소혜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이유를 드디어 깨달았다.

안소혜의 꿈은 멋진 화가가 되는 것.

그런데 부모님이 바라는 것은 취업이 잘되는 명문대 인기 학과에 입학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충돌하며 안소혜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선생님이 보기엔 어때요?”

안소혜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 평가가 기대된다는 듯.

하긴 부모님이나 안태환에겐 그림을 보여 준 적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친구들에게도 그림을 보여 주지 않았을지 모르고.

그러니 내 평가가 더욱 궁금할 수밖에…….

“선생님은 솔직한 사람이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네, 저도 솔직한 게 좋아요.”

“소혜야, 너 혹시 고흐의 환생 아니니? 그림에 뭔가 너만의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고흐의 환생이 뭐예요. 부끄럽게. 어디서 그런 소리 하면 저 맞을지도 몰라요.”

내 칭찬에 안소혜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칭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기뻐하는 모습.

내가 안소혜의 방에 들어온 이후, 안소혜가 가장 밝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활기찬 아이에게 조만간 그렇게 끔찍한 운명이 닥친다니 믿기질 않았다.

“조금 과장을 하긴 했지만, 정말 잘 그려서 하는 소리야.”

나는 노트를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노트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은 뭐니?”

“이거요.”

안소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그림을 가리켰다.

어떤 높은 건물에서 도심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풍경화였다.

풍경 속에는 차로 즐비한 도로와 피아노 학원, 각종 음식점들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다.

“의외네? 선생님은 호수를 그린 풍경화가 제일 예쁘던데.”

“선생님이 말한 그림이 완성도는 더 높은데요. 제가 가리킨 그림에는 제 추억이 있어요.”

“…….”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어서 땡땡이칠 때 이 건물 옥상으로 자주 올라갔거든요.”

“땡땡이의 추억이 있다면 선생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죠?”

나와 안소혜는 눈을 마주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처음 만나 어색했던 우리는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부쩍 친해졌다.

어떤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법이니까.

“선생님이 저 같은 상황이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는데요.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 할 때요.”

“…….”

“저는 이렇게 계속 참으면서 지내야 할까요?”

안소혜는 그녀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녀를 괴롭히고 있던 질문을 솔직하게 던졌다.

“…….”

나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대개 내가 좋아하는 일로는 돈벌이가 힘들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기도 힘들다.

반대로 해야만 하는 일은 재미가 없고 한 개인의 개성을 죽인다.

한마디로 두 가지 다 일장일단이 있었다.

이번 경우에는 답이 정해져 있지만 말이다.

나는 무조건 안소혜의 편을 들어야 했다.

안소혜에게 다가올 비극을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선생님 생각을 말해 줄게.”

“네.”

“선생님은 소혜가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다. 소혜가 그림을 잘 그리고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든든한 아군을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안소혜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당연하지. 아까 말했다시피 선생님은 소혜 편이니까.”

“선생님, 멋있어요.”

“그런데 말이야. 일단은 그림에 모든 걸 걸지 말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나는 차분하게 설득에 나섰다.

부모님이 납득하고 안소혜가 행복할 수 있는 중간지대를 찾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가서 디자인과 같은 미술 관련 과목을 전공으로 택하면 좋을 것 같구나. 그럼 미술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을 테니까.”

“전 미대에 들어가고 싶어요.”

“선생님이야 소혜 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 하지만 시기적으로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부모님은 소혜가 그림에 재능이 있고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시잖아?”

“당연히 모르시죠. 말했다간 몇 날 며칠 동안 들들 볶일 텐데.”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안소혜.

“소혜 부모님은 소혜, 네가 명문대에 취업이 잘되는 과에 진학하기를 바랄 테니까 물론 말을 못 했을 거야. 너도 많이 답답했겠지.”

“맞아요. 저도 진작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쫓겨날까 봐 말 못 했어요.”

“그러니까 소혜도 만족하고 부모님도 만족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을 찾자. 이게 선생님 생각이야. 소혜 생각은 어떠니?”

내 의견을 정리하고 안소혜를 쳐다보았다.

안소혜는 혼란스러워 보였으나 이내 의견을 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선생님 의견이 가장 무난한 것 같아요. 미대에서만 미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부모님하고 싸우는 것도 싫으니까요.”

“잘 생각했다. 소혜도 벌써 어른인데? 선생님이 고3일 때보다 훨씬 성숙한걸?”

내 칭찬에 안소혜는 배시시 웃고 말았다.

학벌에 집착하는 부모님 때문에 그림에 대한 열정을 억누르는 아이.

아마 평소에도 의대에 입학한 오빠 안태환과 수도 없이 비교 당했을 아이.

칭찬 한 마디에도 표정이 꽃처럼 밝아지는 아이.

전생에서는 알지 못했던 안소혜라는 아이의 인생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안소혜를 살리고 싶은 내 마음은 더욱더 간절해졌다.

* * *

과외 선생이 돌아간 뒤 안소혜는 거실 소파에서 어머니와 짧게 대화를 나눴다.

“새로 온 영어 선생님은 어땠니?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아 보이던데.”

“지금까지 과외 받은 선생님 중에 가장 좋았어요. 실력도 있어 보이고, 저한테도 엄청 잘해 줬어요.”

안소혜는 이믿음에 대한 칭찬을 한참 늘어놓았다.

새 과외 선생이 오면 으레 하는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스스로가 부모님 편이 아니라 자신의 편이라고 말해 준 사람.

단순히 과목을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사람.

자신의 그림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사람.

그런 사람은 단연코 이믿음이 처음이었다.

“네 마음에 든다니 엄마도 기분이 좋구나. 하긴 신원대학교 의대 출신인 네 오빠가 고른 사람인데 오죽 괜찮겠니.”

“…….”

“오빠만큼은 아니더라도 너도 좋은 대학에 좋은 과에 들어가야 해. 우리 집안에 먹칠하지 않으려면. 잘 알고 있지?”

“네.”

안소혜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빠와 자신을 비교할 때마다 자신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새겨진다는 것을.

오빠는 오빠고, 나는 나인데 말이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지?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안소혜는 드라마를 보고 있는 어머니의 옆얼굴을 응시하며 답답함을 느꼈다.

안소혜가 알기론 어머니도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

디자인 계통 회사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어머니는 왜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을 그리도 못마땅하게 여길까.

왜 공부에만 목매게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까 어서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렴.”

“네.”

네 말고는 대답할 게 없었다.

어머니는 안소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소혜에게 궁금한 것은 그저 그녀가 어느 대학, 어느 과에 들어갈 것이냐는 사실뿐.

방으로 돌아간 안소혜는 교재 대신 하얀 무지 노트를 꺼냈다.

오늘 처음 만났던 이믿음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역시 안소혜는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했다.

* * *

보름의 시간이 물처럼 잘도 흘러갔다.

회귀 후 의예과 1년 생활을 시작한 나는 무난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생과 다른 이번 생의 특징 중 하나는 내가 양순재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무시무시한 양의 폐·식도 파트 논문과 자료를 정리하고 요약해야 했다.

덕분에 나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반나절 가까이를 도서관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름마다 한 번씩 있는 쪽지 시험을 치렀다.

전직 흉부외과의 지식을 바탕으로 열심히 공부했으므로 나는 당연히 만점을 받았다.

-행복은 추억이고, 불행은 경험이다.

두려워할 것이 없으니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앞으로 의사 생활을 할 때, 흔들리지 않을 좌우명을 정해라.

양순재가 내준 특이한 숙제에 나는 아버지의 소설 후기를 언급했다.

양순재는 내 좌우명에 흡족해했다.

그런 반면, 내가 쪽지 시험에서 만점 맞은 것에는 의외로 무덤덤했다.

천재임을 스스로 밝히고 난 뒤부터였을 것이다.

양순재에게 칭찬을 받는 일이 드물어진 것은.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나는 수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다시 한번 받기도 했다.

주점에서 있었던 칼부림 사건이 재조명되었던 것이다.

방송국에서 해당 사건의 취재를 나왔고, 대학 신문에서도 나를 다뤘다.

파릇파릇한 새내기 의대생이 펼친 능숙한 응급처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기에 바빴다.

내 존재감은 벌써 하늘을 꿰뚫을 듯했다.

하지만 내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소혜였다.

안소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막는 것이 내겐 가장 중요한 숙제였다.

일주일에 두 번 과외를 하면서 나는 수업은 적당히 하고 주로 안소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안소혜가 숨 쉴 수 있는 구멍이 되어 주었다.

과외가 없는 날에도 틈틈이 문자를 주고받았고, 전화 통화도 나눴다.

착각인지 몰라도 나를 통해 안소혜의 성격이 조금 더 밝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운명을 바꾸는 일이 그리 쉽고 간단할 리가 없었다.

토요일 오전.

나는 인터넷 메신저인 버디버디에 접속했다.

그런데 안소혜의 상태창 메시지가 심상치 않았다.

[모두들 안녕.]

무언가 작별을 암시하는 듯한 문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소혜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순간 철렁 내려앉는 가슴.

왜지?

분명 엊그제 과외를 했을 때만 해도 우울한 기색이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안소혜의 마음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정말 큰 사고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안태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따라 신호음이 길게만 느껴졌다.

“선배, 소혜랑 연락이 안 되는데 혹시 집에 있어요?”

-아니, 집에 없는데? 왜?

불길한 예감이 점차 구체적인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나는 손에 쥔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최근에 소혜한테 무슨 일 있었어요?”

-이믿음, 나한테 전화해서 계속 소혜만 찾는다 이거냐? 섭섭하게.

“중요한 일 있어서 그래요. 빨리 대답해 주세요.”

-엊그제 어머니하고 대판 싸웠지. 소혜가 공부 안 하고 그림을 그리다가 어머니한테 걸렸거든.

“…….”

-집안이 난리도 아니었다. 거의 전쟁터 수준이었어.

“하…….”

안태환의 설명에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내가 멈췄다고 생각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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