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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62화 (62/257)

62화 제3장 막아야 한다 (2)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나는 세월의 때가 잔뜩 낀 기억을 가까스로 찾아냈다.

시기는 이맘때쯤으로, 선배 중 한 명이 가족상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며칠 뒤 선배들 몇몇이 검은색 정장을 입고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모습까지 목격하게 되었다.

당시 교우관계가 전무했던 나는 누가 안타까운 일을 당했구나, 하고 그 일을 금세 잊었다.

누구의 가족이 죽었는지.

그 사람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것들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등록금을 온전히 내 힘으로 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주변을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조별과제를 시작하면서였다.

상을 당한 것이 본과 1학년생인 안태환이라는 것.

그의 여동생이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는 것 말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 돌이켜 봐도 퍽 생생하고 충격적이었다.

‘이번엔 조금 힘들지도…….’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안태환을 구하는 일이라면 비교적 난이도가 쉬웠다.

안태환과 나는 이미 친분이 있고,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구해야 할 대상이 안태환의 여동생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관계가 한 다리만큼 떨어져 있다는 건 그만큼 활동의 제약이 많았다.

얼굴을 보기도 힘들고, 연락을 하기도 힘들고, 친분을 쌓기도 힘들다.

“뭐야, 벌써부터 호구조사 들어가는 거냐? 근데 표정은 왜 그래?”

안태환이 살짝 굳은 내 표정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옷을 얇게 입고 왔더니 조금 추워서.”

나는 날씨가 쌀쌀하다는 듯 두 팔을 교차해 팔뚝을 쓸어내렸다.

“싱겁기는. 나야 부모님하고 올해 고3이 된 여동생하고 같이 살지. 너는?”

“저도 부모님하고 12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습니다.”

“동생하고 12살 차이나 나? 거의 애네?”

“네, 유치원생이니까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아요.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말을 하면서도 나는 차분하게 다음에 할 말을 생각했다.

안태환에게 고3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의 흐름대로라면, 안태환의 여동생은 예정대로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 죽음으로 안태환과 안태환의 가족은 마음의 상처를 입을 테고.

이제 중요한 건 내가 안태환의 여동생에게 자연스레 접근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내 상황과 처지를 생각하면 방법은 하나뿐.

“선배, 뵌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금 그런데…….”

“조금 그러면 아예 말을 하지 마… 는 농담이고 뭔데?”

“혹시 선배 동생, 과외 필요 없어요? 제가 용돈을 벌 때가 없어서…….”

나는 비장의 카드인 과외 얘기를 꺼냈다.

과외가 아니고서는 안태환의 여동생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과외만큼 자연스럽게 접촉할 방법도 딱히 없었고.

“전 과목 다 가능하고요. 일주일에 두 번에서 세 번까지도 갈 수 있어요.”

“너 뭔가 필사적인 것 같다? 과외 안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어?”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지는 안태환은 눈치가 빨랐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훗날 잔뼈 굵은 정치인에다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본과 수업 중이라 그런지 진단이 빠르시네요. 맞아요. 저 과외 안 하면 죽는 병에 걸렸어요.”

“…….”

“제발 선배가 치료해 주세요.”

“짜식, 넉살 부리기는… 가만 있어 보자. 최근에 영어 과외 선생이 그만두긴 했거든? 네가 영어를 가르쳐 주면 괜찮을 것 같긴 하네.”

안태환이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내가 전체 수석이니 부모님도 좋아할 것 같고, 그의 여동생인 소혜도 잘 가르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조금 더 나누면서 내 과외행은 확정되었다.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 둘 테니 당장 다음 주부터 안소혜를 가르쳐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휴, 다행이다.’

안소혜와의 접점을 찾은 나는 그제야 한시름을 덜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아닌가.

안소혜의 투신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안소혜를 직접 만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니까.

“태환 선배, 일찍 오셨네요. 믿음이도 일찍 왔고.”

3등으로 도착한 사람은 서영철이었다.

서영철은 내가 안태환의 여동생 과외를 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질투심을 불태웠다.

“아깝다. 저도 선배한테 과외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믿음이가 선수를 쳐 버렸네. 야, 이믿음 너는 왜 동아리에 들어오자마자 내 인생에 태클을 거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속으로는 천불이 끓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는 나였다.

서영철을 볼 때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고, 전생의 기억 때문에 불쾌해지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서영철을 향한 내 원한은 깊고도 강했으니까.

당장은 과외를 가로챈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전 9시 10분이 되어서야 봉사 동아리 회원 전원이 모였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노인복지센터로 걸어갔다.

그 이후로 내가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일 투신으로 목숨을 끊는 안태환의 여동생, 안소혜를 생각하고 있었다.

* * *

그다음 주 오후 6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나는 서초구에 위치한 한 고급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안태환이 잘살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려 한강 뷰를 즐길 수 있는 아파트라니…….

그 때문일까.

단지를 돌아다니는 평범한 복장의 아파트 주민들에게서도 왠지 아우라가 뿜어지는 것 같았다.

유령처럼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잡념을 물리치고 도착한 안태환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안태환의 어머니가 현관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반가워요. 이믿음 학생 맞죠?”

“네. 안녕하세요, 어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이쪽으로 와요.”

안태환의 어머니를 따라 도착한 거실에서 나는 과일을 먹으며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안태환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수능 만점에 전체 수석이라고 들었는데, 맞느냐.

인상이 성실하고 선해 보여서 이름처럼 믿음이 간다 등등.

짧은 대화를 통해 추정컨대, 안태환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극성인 타입이었다.

내 아들딸이면 무조건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콕 박혀 있는 사람이었다.

딱히 좋은 교육관은 아니었으나, 이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유튜브를 한다거나.

자신의 개성에 맞는 일을 진득하게 파고든다거나.

소규모 창업을 한다거나 등등.

개인의 개성을 그나마 드러낼 수 있는 시대는 조금 더 나중에 찾아온다.

지금 이 시대는 오직 학벌만이 최고의 스펙이었다.

“우리 소혜가 유독 영어에 약해요. 소심하고 말주변이 없어서 국어도 못하는데 영어야 오죽하겠어.”

“…….”

“그러니까 믿음 학생이 탄탄하게 기초부터 잡아 줘요. 그래도 전교에서 60등 안에는 드니까 말을 하면 어느 정도 알아들을 거예요.”

“…….”

“태환이처럼 신원대학교는 못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명문대는 들어가야죠. 안 그래요?”

“아, 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태환 어머니가 워낙 수다스러워서 아까부터 입 한 번 제대로 못 뗐다.

과외 선생인 나도 벌써 숨이 막히는데 안소혜는 얼마나 답답할까.

안소혜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안소혜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어쨌거나 대화는 한 달 과외비로 60만 원을 지불하겠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드디어 안소혜의 방으로 이동했다.

내가 구해야 하는, 내가 구하고 싶은 사람의 방으로.

“소혜야, 새 영어 과외 선생님 왔다.”

안소혜의 어머니가 안소혜의 방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책상에 앉아 있던 안소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

크고 맑은 눈동자.

젖살이 덜 빠져 통통한 두 볼.

안소혜는 고3이라기보다는 중3처럼 앳되어 보였다.

이런 아이가 곧 투신으로 목숨을 잃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 왔다.

“반가워. 너희 오빠 학교 후배인 이믿음이라고 한다.”

“네.”

“그럼 잘 부탁해요. 믿음 학생.”

안소혜의 어머니가 방을 떠나고 찾아온 정적.

먼저 움직인 것은 안소혜였다.

안소혜는 자연스럽게 좌식 책상을 펼치고 그 위에 영어 교재를 올려놓았다.

나는 책상 맞은편에 앉아 안소혜를 쳐다보았다.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보진 않았지만, 안소혜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내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지금 분위기가 어색한지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대충 느낌은 오네.’

안태환의 어머니를 만나 보니 안소혜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마 안소혜의 목을 조르지 않았을까.

수능이 끝날 때쯤 우리나라는 꼭 수능 성적을 비관해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나온다.

그만큼 사회 전체가 학벌에 미쳐 있다는 뜻이다.

또한 통계를 봐도 10대 사망률 1위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자살이었다.

그 불운한 통계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내 눈앞의 안소혜였고.

나는 안소혜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괴로워하는 아이를 어떤 방식으로 살려 낼 수 있을까.

한낱 과외 선생으로.

깊어 가는 고민의 끈을 나는 금방 잘라 냈다.

일단 안소혜와 친해지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안소혜와의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고 안소혜가 답답한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세상은 살 만하지 않던가.

“소혜야.”

“네, 선생님.”

“오늘은 공부 안 할 거니까 교재 덮어.”

“레벨 테스트 같은 거 해야 하지 않아요?”

내 말이 의외라는 듯 안소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은 레벨보다 징글벨이 더 좋던데?”

“뭐예요. 그게?”

내 얼토당토않은 농담에 안소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공부보다 중요한 건 공부를 하는 목적이란다. 선생님은 소혜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더 궁금해.”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안소혜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친구들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다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한다고 믿잖아요.”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거예요.”

남들이 하라니까 하고 남들이 가라니까 간다. 슬프지만, 이것이 대한민국 수험생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하긴 수험생에게 대입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어야 말이지.

“억지로 대학에 갔다고 치자. 그럼 대학에서 하고 싶은 건 있니?”

“네.”

안소혜의 대답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 대답 안에 감춰진 비밀이 안소혜를 구원할 수도 있다.

문득 그런 직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순간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선생님한테 말해 볼래?”

“부모님한테 일러바치지 않는다고 하면 알려 드릴게요. 부모님이 아시면 저 엄청 혼날 거예요.”

“선생님은 네 편이야. 왜인 줄 아니?”

“잘 모르겠는데요? 선생님은 부모님 편 아닌가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사실은 정반대지. 너한테 잘 보여야 선생님이 과외를 계속할 수 있으니까. 선생님은 부모님이 아니라 너한테 잘 보여야 돼.”

내 논리가 신선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는지 안소혜가 키득키득 웃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이제 내가 네 편이라는 건 증명된 거다?”

“네, 그럼 보여 드릴 게요.”

안소혜가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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