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59화 (59/257)

59화 제2장 선택의 기로 (4)

“저는… 한국에 남겠습니다.”

회귀 후 찾아온, 앞으로 내 미래를 180도 바꿀 수 있는 선택지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한국에 잔류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수련.

물론 탐나고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미국 병원의 근무 환경은 한국처럼 의사를 갈아 넣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기개발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의학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간까지 넉넉했다.

또한 실력 있는 의사는 견제가 아닌 존경을 받았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미국 생활을 뒷받침해 줄 경제적 능력과 영어 실력까지 충분했다.

심지어 양순재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를 돕겠다고 했다.

그러니 미국에서 적응하는 일이 그리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수련이라는 목적이 최우선이라면 분명 미국행이 옳았다.

하지만 미국행에는 사람이 빠져 있었다.

당연히 외국 사람을 치료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미국에서 흉부외과 전공의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12년.

그 12년의 기간 동안 내가 미국에서 머문다면, 나는 12년 동안 사람들을 놓치게 된다.

전생에서 내가 놓친 사람들.

내가 살피지 못한 사람들.

내 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을 말이다.

회귀의 목적이 전생을 따라가며 전생의 잘못과 실수들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미국행은 내게 큰 이득이 되지 않았다.

의대, 인턴, 레지던트.

이 기간을 거치는 동안, 내가 바로잡고 싶었던 인연을 고스란히 놓치게 될 테니까.

“믿음아, 다시 생각해 볼 일말의 여지도 없겠니? 네 결정이 확고한 듯하나 나는 네 선택이 아쉽기만 하구나.”

“…….”

“정의감과 사명감은 분명 훌륭한 감정들이지. 하지만 그 감정들로도 헤쳐 나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단다.”

양순재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나 역시 한국에서 흉부외과 조교수까지 해 봤으니까.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고생이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그렇다고 가야 할 길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겐 회귀라는 기적 같은 선물이 주어졌으니 그 선물을 잘 사용한다면 다가올 시련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의 나는 전생의 나처럼 요령 없고, 주변 사람을 관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조교수급 실력을 가지고 의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니까.

“교수님께서 저를 배려해 주신 것은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결정은 무르고 싶진 않습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양순재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국 잔류의 뜻을 꺾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휴,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면 하늘의 뜻이겠지. 좋다. 미국행은 없었던 걸로 하고, 내게 교육을 받으려무나.”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만 네가 천재라고 하니 내 교육 방식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졸업 전에 폐·식도 파트 지식을 펠로우 수준으로 만들어 주마.”

경고하듯 말하는 양순재의 말이 나는 오히려 반가웠다.

내가 원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 * *

개인 면담이 끝난 뒤 나는 양순재와 함께 해부실습실을 찾았다.

본격적인 교육에 앞서 양순재가 앞으로 내가 다룰 장기인 폐·식도의 개요를 직접 알려 주겠다고 한 것이다.

해부실습실에 들어선 나는 모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아주 오랜만에 수술실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콧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와 알코올 냄새.

포비돈 용액이 묻은 솔로 손가락과 손바닥을 문지르는 작업(스크럽).

이어서 수술모와 수술 마스크, 수술 가운, 수술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니 진짜 집도를 앞둔 서전 같았다.

“카데바(의학용 시체) 해부는 본래 본과 1학년 때부터 진행한단다. 하지만 너는 특별해서 선행 학습을 하는 거란다.”

“…….”

“오늘 실습할 카데바는 학과장한테 개인 연구용으로 얻은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고.”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들어가자꾸나.”

양순재가 앞장서고 그 뒤를 내가 따랐다.

서늘한 공기 속.

밝은 조명 아래,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의학용 테이블 위에 한 구의 시신이 누워 있었다.

포르말린 처리가 된, 하얀 천에 덮인 시신에 다가가자 겨자를 코밑에 둔 것처럼 쨍한 냄새가 풍겼다.

순간 막혔던 코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냄새, 지독하지?”

양순재가 내 표정을 살피고 피식 웃었다.

“정신이 번쩍 드네요. 코도 뻥 뚫리고.”

“녀석, 그래도 카데바를 처음 본 것치고는 의외로 담담한데?”

-의학용 시체가 아니라 진짜 시체도 수없이 봤습니다. 제 손으로 사망 판정을 내린 환자도 부지기수고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았다.

“제가 원래 간이 큰 편입니다.”

“하긴, 오리엔테이션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도 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지. 어쩌면 타고난 서전인지도 모르겠구나.”

“교수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폐·식도의 개요를 알려 주신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양순재의 교육은 그 시작부터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철저하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설마 첫날부터 해부실습실에서 카데바에 손을 댈 줄이야…….

“교과서나 논문, 그러니까 글자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을 너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어떤 교육이든 오감을 전부 동원할 수 있다면 학습력이 올라가기 마련이지.”

“…….”

“오늘은 네 손으로 할 것은 없단다. 카데바를 지켜보면서 내 설명을 잘 들어라.”

드르르륵.

양순재는 드레싱 카트를 테이블 쪽으로 끌어당긴 뒤 시신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을 걷어 냈다.

카데바는 옆을 보고 누워 있었다.

후측방 개흉술이 이미 끝난 상태로 옆 가슴의 피부와 근막이 절개(신체 부위를 단순히 가르는 것)되어 있었고, 갈비뼈 일부는 절제(잘라서 제거하는 것)되어 있었다.

양순재는 개흉을 통한 폐암 수술을 연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양 교수에게 가르침을 다 받고 나면 나도 폐 수술을 집도할 수 있겠지.’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폐암 수술과 더 나아가서는 폐·식도 파트의 꽃이라고 불리는 폐 이식 수술까지.

그런 고난도 수술을 해낼 수 있다면, 나는 자타 공인 흉부외과의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생에서는 미처 닿지 못했던 경지에 말이다.

서전으로서 다룰 수 있는 장기의 영역이 넓어지고 실력까지 키울 수 있다는 건 축복 그 자체였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폐·식도 파트의 대가인 양순재의 펠로우 수업.

그것도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일대일 수업을 만끽해 볼까.

“너도 보고 있어서 알겠지만 이게 폐란다.”

양 교수가 포셉으로 카데바의 우측 폐를 가리켰다.

“네, 교수님.”

“폐는 흉강 안에 위치하고, 갈비뼈가 둘러싸고 있으며, 산소를 혈액에 보내 주고 이산화탄소를 몸 밖으로 배출한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

“그런 교과서 같은 내용보다 폐가 가진 위대함을 깨닫는 게 우선일 테니까 말이야.”

양순재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인체에서 중요하지 않은 장기가 없다지만 그중에서도 심장과 뇌, 폐는 각별하단다.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가 흔히 어떤 표현을 쓰지?”

“숨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었다는 표현도 쓰고요.”

나는 양순재가 말하고 싶은 바를 알아차리고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에 양순재가 흡족하다는 듯 눈으로 웃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만 골라서 하는구나. 괜히 천재가 아닌데?”

“…….”

“그래, 목숨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기가 바로 폐란다. 그러니까 서전이 폐를 잡지 못하면 집도에서 패(실패할 패, 敗)하는 거야. 그리고 그 대가는 환자의 목숨으로 치러야 하지.”

양순재는 처음부터 묵직한 가르침을 내렸다.

폐와 목숨.

폐와 패.

단순히 의료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닌 장기에 대한 깊이 있는 인문학적 성찰을 드러냈다.

나는 그 몇 마디만으로도 양순재가 왜 존경받는 서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동시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왜일까?

전생의 내가 양순재의 본과 임상 수업에서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던 것은…….

이렇게 멋진 가르침을 내려 줄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본과 수업을 진행할 때쯤 양순재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 걸까.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 당장은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

그래서 나는 방금 떠오른 의문을 기억 속 서랍에 보관해 두기로 했다.

“믿음아, 폐의 폭과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니?”

양순재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략 25센티에서 30센티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게는 양쪽 폐를 합쳐서 1킬로 정도 됩니다.”

“허허, 교과서가 따로 없구나. 나는 아직도 네가 미국에 갔으면 좋겠는데…….”

양순재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보마. 사람이 1분 동안 호흡할 때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니?”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무려 6.8리터란다. 1.5리터짜리 생수를 4병이나 채우고도 남는 양이지.”

“…….”

“폐가 1분에 6.8리터 분량의 호흡을 한다면 우리가 하루 종일, 더 나아가서는 평생 호흡하는 양은 얼마나 될까?”

양순재의 질문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나는 금방 과부하가 걸렸다.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흉부외과 심장 파트를 전공했던 나는 오로지 심장만이 인체에서 가장 부지런한 장기인 줄 알았다.

심장은 무려 하루에 7천 리터의 피를 순환시키며, 평생 25억 회가량 박동하곤 하니까.

하지만 양순재의 말을 듣고 보니 폐도 심장 못지않은 열정적인 일꾼이었다.

“이번엔 조금 놀란 눈치구나.”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양순재가 껄껄껄 웃었다.

“네, 폐가 이렇게 부지런한 기관인 줄은 몰랐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깊게 따지고 보면 폐도 심장에 뒤지지 않는단다.”

“…….”

“이쯤 되면 폐렴이나 폐암, 기타 호흡기 질환이 왜 무서운지 충분히 피부에 와 닿았으리라고 믿는다.”

이어지는 설명.

양순재는 오른쪽 폐가 왼쪽 폐에 비해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무게가 나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진화생물학적인 측면에서 풀어 주었다.

좌측 폐가 심장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생기는 공간 부족으로, 좌측 폐가 우측 폐보다 크기가 작아졌을 거라는 해석이었다.

그렇게 양순재의 첫 수업을 들으며 나는 감탄하기에 바빴다.

양순재의 수업은 딱딱한 암기 위주의 수업이 아니었다.

피부에 와 닿는 정보들로, 이를테면 1분당 호흡량, 폐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가르치는 방식.

목숨이라는 단어로 폐를 인문학적인 시선에서 접근하는 방식.

좌우 폐의 크기 차이를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다가가는 방식.

카데바를 통해 폐를 생생하게 보여 주며 오감을 자극하는 방식 등등.

양순재의 교육은 그야말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교육이었다.

양순재의 수업은 누구라도 들으면 폐·식도 파트를 전공하고 싶을 정도의 마력을 지녔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이쯤에서 나는 한국에 남기로 결정하기를 잘했다고 판단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 양순재와 같은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있을까.

나는 없을 것 같았다.

90여 분의 시간이 흘러 끝난 수업.

양순재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한 나는 모처럼 배움의 욕심에 불타올랐다.

양순재가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을 흡수해서 심장 파트는 물론이요, 폐·식도 파트까지 아우르는 만능 흉부외과의가 된다.

회귀한 내 꿈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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