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제2장 선택의 기로 (3)
이믿음과 헤어지고 교실로 돌아오는 동안.
이민호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불쾌감, 아니 불쾌감을 넘어선 치욕을 느꼈다.
이믿음이 자신을 감히 질 낮은 범죄자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민호의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고, 어머니는 고위 공직자다.
탁월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복한 가정에서 뛰어난 학업 성취 능력으로 의대에 들어온 그가 한낱 범죄자로 추궁을 당하다니…….
어제, 오늘만큼 굴욕적인 날이 또 있을까.
‘수석이라고 기고만장하는 건가?’
이민호는 이믿음을 떠올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 상황은 이믿음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입학식 날, 자신의 패거리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도 같은 맥락일 테고 말이다.
무시와 괄시. 그리고 거절.
이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이민호에게 이믿음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기분 나쁜 존재였다.
또한 이민호는 응당 자신에게 향해야 할 동기들의 관심이 이믿음에게로 향하는 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체 수석.
오리엔테이션 중 발생한 교통사고에서의 활약.
오리엔테이션에서의 장기 자랑.
어제 발생한 칼부림 사건까지.
이믿음은 항상 그보다 앞서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이민호가 가져가야 할 것을 이믿음이 도둑질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이믿음을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이믿음을 향한 적개심이 나날이 커져 가고 있는 이민호였다.
덜컹!
이민호는 음료수 자판기에서 탄산음료를 뽑아 마셨다.
식도를 거칠게 긁고 내려가는 탄산의 짜릿함에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그는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땐 탄산음료를 즐겼다.
그는 단번에 캔을 비우고 교실로 돌아갔다.
“이믿음이 뭐래?”
패거리 중 한 명인 배태섭이 물었다.
배태섭은 눈매가 가늘고 턱이 뾰족했는데, 실제 성격도 냉정하고 날카로운 편이었다.
“어제 술집 사건에 대해서 날 추궁하더군.”
“이믿음, 그 새끼도 참 웃기는 짬뽕이네. 민호 너 정도 되는 애가 왜 과도로 사람을 찌를 거라고 생각하지?”
“…….”
“분명 어디가 모자란 거 아니야? 내 생각에 전체 수석이 된 것도 뽀록 같다. 잘 찍은 문제가 운 좋게 다 맞은 거지.”
배태섭의 공격적인 언사가 이민호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배태섭의 말이 맞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믿음보다 수능 성적이 낮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난 이믿음을 이해할 것도 같아.”
유약한 인상에 안경을 쓴 강지호가 대화에 껴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강지호가 이믿음을 두둔하는 것 같아 이민호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생각에는… 어제 사건 당시에 민호 네 행동이 조금 의심스러웠을 수도 있다고 봐.”
“…….”
“흉기에 찔린 사람을 발견하면 보통 놀라서 굳거나, 주변에 도움을 청하거나, 신고부터 할 텐데 민호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현장을 나왔잖아?”
“…….”
“아무래도 일반적인 반응은 아니니까…….”
“너도 이믿음이 했던 소리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이민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이믿음도, 강지호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왜 연민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이 죽어 가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의사가 되어 병원에서 응급 환자를 처치하는 것이면 모를까.
그는 이믿음과 강지호의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근데 믿음이 진짜 대단하긴 하더라. 치료하는 걸 지켜봤는데, 엄청 침착했어. 약국에서 사 온 의약품들로 의사처럼 처치하기도 했고.”
“…….”
“구급 대원들이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겠다고 엄청 고마워하던데.”
“강지호, 넌 이믿음 편이냐? 그럼 이믿음한테 가든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냥 그때는 대단해 보였다는 거지.”
배태섭의 말에 항변하는 강지호.
강지호는 이민호의 표정을 살피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강지호의 행동은 이민호의 심기를 잠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강지호조차 결국엔 이민호의 눈치를 보고 이민호를 따랐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이민호는 흡족했다.
그 과정은 이믿음이 제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을 따르게 될 거라는 증거였으니까.
근본은 누가 뭐래도 이민호 자신에게 있었다.
“남초롱은 별말 없나?”
“네가 보자고 한다고 계속 말했거든? 근데 자기 주제도 모르고 계속 튕기던데?”
“…….”
“자기가 정말 잘나서 그런 줄 아나 봐.”
“어리석기는… 하긴 그러니까 이믿음 따위랑 어울리겠지.”
이민호는 최근 남초롱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관심은 애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이믿음이 남초롱을 좋아하는 것 같았기에 남초롱을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 이믿음을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앞으로는 남초롱한테 신경 쓸 필요 없다. 끼리끼리 놀라고 해.”
지시를 내린 이민호는 교실로 돌아오는 이믿음을 응시했다.
이믿음과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조차 언짢았다.
* * *
“저를… 기억 못 하시겠죠?”
중년 여성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가 퍼부었던 날,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잖아요? 저는 그때 학생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아… 이제 알 것 같네요.”
나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엔테이션 첫째 날 숙소로 이동하는 도중.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나는 양순재와 함께 환자를 치료했다.
그런데 비교적 경상을 입은 환자 중 한 명이 회복 후 과사무실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아마도 회복 자세만 취해 줬던 환자일 것이다.
전생에서는 그 회복 자세가 없었던 탓에 기도 질식으로 사망했을 확률이 높았고.
멀쩡하고 건강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연 나의 회귀는 헛되지 않았다.
전생에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을 인물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남편은 아직 입원 중이라서 부득이하게 저 혼자만 왔네요. 저는 조금 덜 다쳤던지라…….”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신가요?”
“덕분에요.”
“혹시 같이 사고가 났던 분들 소식은 아시나요?”
“그분들도 입원 중인데 별 탈 없이 회복 중이라고 알고 있어요. 학생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말을 마친 중년 여성이 명함을 내밀었다.
<한길 동물병원 원장 김애란>
“저는 서초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어요.”
“수의사 선배님이셨군요.”
“뭐, 선배랄 것까지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꼭 동물에 관한 게 아니어도 괜찮으니까요.”
“…….”
“그리고 약소하지만 이거.”
김애란이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서 내밀었다.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것까지 챙겨 주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건강하고 무사한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한 보답을 받았습니다.”
“아니에요. 뭐라도 해 드리지 않으면 제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빨리 받으세요.”
김애란이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봉투를 받았다.
봉투 속에 담긴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었다.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계속 거절하는 것도 실례가 될 것 같았다.
“고마워요. 학생. 학생 덕분에 나와 내 남편, 다른 사람들까지 목숨을 건졌어요.”
“…….”
“의대 과정을 잘 마치고 학생이 멋진 의사가 되기를 기도할게요.”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화가 끝난 뒤 김애란은 과사무실을 떠났고, 나는 복도에 서서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수십 명을 살리는 것이다. 가족과 친지, 그 주변인들까지 슬픔에서 건져 내는 것이다.
나는 문득 흉부외과 시절 멘토로 삼았던 서 교수님의 명언을 떠올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서 교수님의 말씀은 양날의 검이었다.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수십 명을 살리는 것이라면 말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수십 명이 고통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집도할 때는 수십 명의 무게감을 느끼며 집중력을 잃지 말고.
집도를 마쳤을 때는 수십 명을 살렸다는 뿌듯함으로 기운을 북돋는 것.
아마 그것이 서 교수님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이 아닐까.
‘교수님, 이번에는 행복해지실 겁니다.’
나는 먼 훗날 서 교수와의 만남을 기대했다.
이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으므로 강태섭을 물리치고 서 교수를 도와 곪아 버린 흉부외과를 다시 일으킬 것이다.
지금의 내겐 그럴 만한 힘과 지식과 인맥까지 있으니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두툼한 두께의 봉투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돈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집안의 경제 사정은 풍족했고, 그동안 내가 모아 놓은 돈도 꽤 됐다.
무엇보다 흉부외과는 돈을 벌기 위해서 선택한 과목이 아니었다.
비교적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과목이라면 비보험 진료가 가능한 피부과, 성형외과 정도가 될 테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암울해지는 과목이라면 산부인과, 흉부외과, 비뇨기과 정도가 될 것이다.
‘어쨌든 내게 주어진 길은 흉부외과니까 흉부외과로 가는 수밖에…….’
나는 회귀했던 당시의 초심을 살리며 교실로 돌아갔다.
집도를 무사히 마친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오후 교양 수업이 끝난 뒤 나는 곧바로 양순재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최대한 머리를 비우고 지냈던 나흘의 시간.
양순재가 추천했던 미국행에 대해서 나는 이미 확고한 결정을 내렸다.
선택이란 본디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 것.
그러므로 고통 받지 않는 선택,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기 위해선 세 가지 성찰이 필요했다.
하나는 선택을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지 아는 것.
둘째로 선택을 통해 무엇을 잃을지 아는 것.
마지막 세 번째로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내게 큰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것.
선택을 잠시 미뤄 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세 가지 과정을 모두 거쳤다.
그 과정 속에서 나온 결론은 퍽 마음에 들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죽는 그날까지 갖고 싶은 가치관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호모 사피엔스.
인간은 놀이하는 동물이라는 호모 루덴스 등등.
인간을 정의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는데, 나는 인간을 선택하는 동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인간을 만드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선택의 결과물이니까.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양순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가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책상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양순재도 내 맞은편에 앉았다.
대학 생활, 동아리 활동, 수업 내용 등등.
나와 양순재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이야기들로만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치르는 의식과도 같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어느 쪽으로든 결심을 굳힌 모양이구나.”
양순재가 마침내 미국행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했을까.
양순재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생각은 충분히 했니?”
“교수님이 생각하신 것과 다르게 일부러 안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허허.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너무 많고 깊으면 오히려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으니까.”
“…….”
“좋다. 이제 네 대답을 듣고 싶구나.”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양순재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각오를 굳혔기에 마음을 따라 입만 움직이면 모든 상황은 결정될 것이다.
“교수님,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