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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55화 (55/257)
  • 55화 제1장 관종의 탄생 (5)

    나와 신철우가 있는 테이블에 두 명이 더 합석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남초롱과 권아름이었다.

    아까 전 술집에 들어왔던 두 사람은 자리가 없어서 헤매던 중 우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인사를 나누던 중 신철우가 강력하게 합석을 주장했고, 나도 전생에는 함께하지 못했던 남초롱이 궁금했기에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이라면 이제 신물이 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내가 남초롱에게 물었다.

    OT 때의 술 권유가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거라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술을 못 마시고 술을 좋아하지도 않아.”

    “…….”

    “그런데 술자리 분위기는 좋아해. 뭔가 떠들썩하고 활기찬 느낌이 좋더라.”

    남초롱이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사실 술집은 내가 오자고 했어. 내가 술을 잘 마시거든.”

    잠자코 있던 권아름이 한마디 거들었다.

    남초롱이 조용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면, 권아름은 시원시원하고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성격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퍽 잘 어울려 보였다.

    마치 나와 신철우처럼.

    우리 넷의 조합은 전생에는 없었던 조합이었기에 나는 이 조합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술과 안주가 오가면서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의대 입학하기 전의 생활.

    오리엔테이션.

    학교 수업에 대한 단상 등등.

    우리는 공통분모를 찾아가며 서로를 차근차근 알아 나갔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 나가면서 서로를 향한 친밀감도 키우게 되었다.

    술자리의 순기능이라고 해야 할까.

    타인과 빠른 속도로 친해지는 데는 술자리만 한 것이 없었다.

    “초롱아, 그 이야기해도 돼?”

    권아름이 남초롱의 눈치를 보며 한마디 했다.

    “뭔데?”

    “그거 있잖아. 그거.”

    “믿음이랑 철우가 부담스러워할지도 몰라.”

    “그건 들려줘 봐야 아는 거 아닌가? 이 기회에 고민 상담 좀 받자.”

    권아름이 강하게 나가자, 남초롱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두 사람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 사연이 썩 유쾌하지 않을 거라는 점도.

    ‘전생에 이맘때쯤 무슨 문제가 있었던가?’

    잠깐 기억 속 서랍을 뒤져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너희 둘만 알아야 돼. 알았지?”

    “비밀 보장. 보안 엄수. 우리 입은 무겁기로 유명하지.”

    권아름이 분위기를 잡자, 신철우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초롱아, 그럼 말한다?”

    “그래.”

    “어제부터 있었던 일인데. 우리 과의 이민호 있잖아. 걔가 초롱이한테 자꾸 찝쩍거리는 거 있지.”

    권아름은 어제 이민호가 남초롱에게 휴대폰 번호를 묻고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는 것.

    오늘도 공강 때 시간을 내서 남초롱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이민호의 성격을 아는 내 입장에선 확실히 뜻밖의 일이긴 했다.

    “그래서 초롱이 너는 어떻게 했는데?”

    “싫다고 했어. 휴대폰 번호도 안 가르쳐 줬고, 대화할 때는 시큰둥하게 대했고.”

    남초롱이 내 질문에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민호는 뭔가 분위기가 안 좋아. 눈빛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사람을 무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한마디로 밥맛이야.”

    “사람 볼 줄 아시네.”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신철우.

    세 사람이 이민호를 화제 삼아 대화하는 동안, 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생에 남초롱은 이 시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번 생의 남초롱은 내 활약으로 살아남았고, 그 때문에 이민호가 남초롱을 좋아하게 되었다.

    현재로서는 이것이 제일 합리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민호의 행동이 영 의심스러웠다.

    전생에 이민호가 사귀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화려했다.

    개중에는 모델도 있었고, 배우 지망생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초롱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내겐 이민호·남초롱의 조합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그럼… 설마?’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리고 나니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민호는 내가 남초롱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OT 때 남초롱이 마셔야 하는 술을 내가 적극적으로 대신 마셨으니까.

    그러니까 이민호는 남초롱이 좋아서 남초롱과 사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엿 먹이기 위해 남초롱과 연애하려는 것이다.

    가히 소설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럴 만한 개연성은 충분해 보였다.

    이민호가 나를 싫어한다는 전제를 깔아 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민호는 고등학교 때 나를 성가시게 했던 심병수와는 차원이 다른 악당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수법이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교묘했다.

    ‘벌써부터 선제공격이라는 건가?’

    나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민호가 앉은 테이블을 응시했다.

    때마침 이민호도 독사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술집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 한 테이블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남학생 두 명이 서로에게 심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씨팔이며 X은 가장 양호한 수준이었고, 죽여 버리겠네, 대가리를 부숴 버리겠네 등등, 입에 담기 험한 말까지 오갔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갈 듯 험악한 분위기였으나, 주방 이모가 나선 덕분에 가까스로 잠잠해졌다.

    “술 마시면 꼭 싸우고 시비 거는 사람이 있더라. 난 저런 사람들 진짜 싫어. 으…….”

    권아름이 다툼이 있었던 테이블을 힐끔 훔쳐보고 진저리를 쳤다.

    “술이 무슨 죄가 있겠어. 죄는 사람한테 있지. 성격이 개판인 인간들이 꼭 술을 마시면 본성을 드러내더라.”

    “그런 해석이라면 흑기사 씨는 노출증에 애정 결핍이 있는 건가?”

    신철우의 농담에 남초롱과 권아름이 입을 가리며 킥킥킥 웃었다.

    감정 통제를 잘하는 나조차 그 순간만큼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했잖아. 흑기사는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래? 내가 사골이냐?”

    “당연히 그렇고말고. 평생 우려먹어도 마르지 않을 사골이지.”

    “아, 참. 믿음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남초롱이 눈을 빛내며 화제를 돌렸다.

    “뭔데?”

    “OT 때 왜 내가 마실 술을 마셔 준 거야?”

    “맞아. 맞아. 나도 그거 엄청 궁금했는데.”

    ‘내가 술을 대신 마시지 않았으면 넌 벌써 죽었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완곡한 화법을 사용했다.

    “네가 너무 힘들어 보였으니까. 우리 조에 붙은 선배들이 다른 조에 비해 술을 너무 강권하기도 했고.”

    “오~! 완전 정의의 사나이네?”

    “역시 의예과 흑기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이지.”

    이제는 신철우 말고 권아름도 나를 놀리는데 합류하고야 말았다.

    갑자기 골치가 아파졌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건물 1.5층에 있는 화장실을 찾았다.

    “…….”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다고, 화장실 앞에서 마주친 사람은 하필 이민호였다.

    우리는 서로를 싸늘하게 쳐다볼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이민호가 스쳐 지나간 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화장실 내부의 풍경은 살벌하고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내 또래로 보이는 학생이 화장실 바닥 중앙에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만취한 사람이 화장실에 뻗어 있는 풍경은 꽤 흔한 편이었으니까.

    문제는 학생의 복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상.

    그러니까 날카로운 흉기에 찔린 상처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횡격막 근처에는 흉기로 사용된 듯한 과도가 꽂혀 있기까지 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학생의 찢어진 셔츠와 피부 틈새로 붉은 피가 꾸물꾸물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흘러내린 피는 학생 주변에 참혹한 피의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의 온도가 확 내려갔다.

    한 학생이 잔인한 칼부림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어쩌면 그 주인공이 방금 막 마주친 이민호 때문일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어째서 이런 일이 대학교 인근 주점에서 벌어진 거지?

    전생에도 이런 참혹한 사건이 있었나?

    있었는데, 학과를 외톨이처럼 떠돌던 나만 몰랐던 건가?

    하지만 충격을 받았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여보세요. 여기 신원대학교 앞 오메가 술집입니다. 흉기에 찔린 학생이 화장실에 쓰러져 있습니다. 빨리 출동해 주세요.”

    의사로서 다져 놓은 본능과 알고리즘이 알아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119에 신고부터 한 것이다.

    “뭐… 뭐야? 이거?”

    “사람이 찔렸는데?!”

    뒤늦게 화장실을 찾은 학생 몇몇이 현장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서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오게 막아 주시고요.”

    나는 술자리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칼에 찔린 환자가 있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알렸다.

    그리고 번개처럼 달려가 가까운 약국을 찾았다.

    붕대, 거즈, 반창고, 생리 식염수, 알코올 등을 한 아름 구입해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환자가 무참하게 복부 자상을 입은 상황에서.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에서.

    내 목표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119 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출혈을 최소화하는 것.

    “으으으으, 너무 추워요.”

    의식이 없는 줄 알았던 학생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버티면 돼요. 119 대원이 올 때까지만 참아요. 제발.”

    나는 외투를 벗어 학생의 다리를 감싸 주었다.

    체온 손실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였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일 테니까 따라 해.”

    “으응.”

    “알았어.”

    나는 화장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철우와 남초롱, 권아름에게 지시를 내렸다.

    세 사람이 내 지시를 따르는 동안, 필요한 처치법을 시범으로 보여 주었다.

    우선 알코올 패드로 손을 소독한다.

    그다음 흉기에 찔린 상처 위에 거즈를 듬뿍 얹는다.

    그리고 상체의 힘을 담아 거즈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 준다.

    지혈법 중 직접 압박법이었다.

    네 사람이 본격적으로 지혈에 나섰음에도 학생의 상태는 악화하기만 했다.

    환자의 얼굴은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질려 갔다.

    호흡이 약해졌으며 경동맥에 손을 대어 본 결과, 맥박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자상으로 인한 복강 및 장기 출혈.

    그로 인한 저혈량성 쇼크가 가장 의심이 되었다.

    환자의 상태가 악화될수록 내 등골이 오싹해졌다.

    “믿음아, 거즈가 벌써 피로 다 젖었는데 떼어 내고 새 거즈 사용할까?”

    “지혈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해도 돼?”

    남초롱과 신철우가 동시에 질문을 던졌다.

    “둘 다 안 돼. 절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혈을 할 때는 어떤 이유에서든 최초 상처를 덮은 거즈를 제거해서는 안 된다.

    거즈를 제거하는 순간, 거즈와 함께 응고된 혈액이 같이 떨어져 나가 재출혈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혈 확인은 할 필요 없고, 기존 거즈가 너무 젖었으면 그 위로 새 거즈를 덮어서 지혈해 줘.”

    “알았어.”

    “목이 너무 말라요. 무… 물 좀 주세요.”

    쓰러져 있던 학생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미안한데 참아요. 병원에 이송되는 대로 전신마취 하고 수술을 받아야 할 거예요.”

    “…….”

    “물을 마시면 전신마취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으으…….”

    맥없이 꺼져 가는 생명.

    화장실에 퍼지는 피비린내.

    어느새 사건 소식을 듣고 화장실로 몰려든 학생들.

    화장실과 화장실 주변은 어느새 시장통처럼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워졌다.

    “믿음아, 이거는 빼는 게 좋지 않을까?”

    권아름이 내게 의견을 구했다.

    그녀의 시선은 학생의 명치 아래에 꽂혀 있는 과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대답했다.

    과도가 몸에 박혀 있으면 상처를 악화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과도는 오히려 출혈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LUQ(Left, Upper Quadrant 복부를 4부위로 나눴을 때 왼쪽 상단 부분)를 직접 압박하던 나는 근처에 있던 학생을 불렀다.

    나 대신 직접 압박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손이 자유로워진 나는 탄력 붕대를 손에 쥐었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처치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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