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제1장 관종의 탄생 (4)
“내 말이 네겐 당황스럽고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 거라는 거 잘 안다. 등교한 지 하루 만에 학교를 떠나서 미국으로 가라고 했으니 말이야.”
양순재는 이믿음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시험지에 적은 이믿음의 답안을 본 순간, 양순재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OT를 갓 마친, 솜털도 가시지 않은 신입생이 의사고시 문제, 나아가서 흉부외과 전문의 문제를 술술 푼다고?
그것도 오답 하나 없이?
이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믿음은 본인이 말한 대로 천재가 분명해 보였다. 이믿음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천재밖에 없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순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미국행 제안을 받은 뒤, 이믿음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생각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기반을 버리고 타국에서 의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럼에도 양순재는 이믿음이 미국에서 성장하기를 강력하게 원했다.
한국은 천재를 위한 나라가 아니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천재의 발목을 잡는 나라였다.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 공동체 의식은 분명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탁월한 성취를 보이는 개인을 평균으로 끌어내리는 단점 또한 갖고 있었다.
“고민하는 동안, 네가 미국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해 주마.”
“네, 교수님.”
“첫째로 미국 의료계는 흉부외과 대접부터 다르단다. 우리나라 흉부외과는 지원자도 부족하고 봉급도 짜지만 미국은 정반대지.”
“…….”
“흉부외과에 가고 싶어 하는 의사들이 줄을 선단 말이다. 근무하기 좋은 환경과 보상은 네게 분명 큰 날개가 되어 줄 거란다.”
한국 흉부외과의 연봉은 대략 1억.
미국 흉부외과의 연봉이 대략 4억이라는 것을 양순재는 추가로 덧붙였다.
더불어 미국은 100일 당직 같은 야만적인 문화가 존재하지 않으며, 수술 스케줄이 널널하다는 사실도 말이다.
이믿음이 미국에 가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양순재는 한국의 의사 문화를 지적했다.
“믿음아, 네 지식은 벌써 레지던트를 하고 있는 의사들과 맞먹는단다. 그렇다고 그 선배들이 널 이해해 줄까? 아마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란다.”
“…….”
“한국의 선후배 문화와 위계 서열 속에서는 네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가 없어. 이것도 매우 큰 문제지.”
이믿음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제안한 미국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아니면 미국행을 꺼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양순재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영어 문제 때문이니? 의사소통이 잘 안 될까 봐서?”
“아닙니다. 저는 영어 공부도 꾸준히 해 왔습니다. 현지인하고도 막힘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이믿음이 모처럼 야무지게 대답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영어까지 장착했다면, 더더욱 미국행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믿음아, 내가 내 일이 아니라고 네게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교수님이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양순재는 뜸을 들였다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믿음이, 네가 한국에서 흉부외과 생활을 할 때 얼마나 고생할지 눈에 뻔히 보여서 그러는 거란다.”
“…….”
“편하고 좋은 길이 있으면 그쪽으로 가는 게 옳지 않겠니? 천천히 고민하고 네 대답을 들려 다오. 만약 미국행을 선택한다면,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믿음을 보낸 뒤 양순재는 다시 한번 시험지를 손에 쥐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오답은 없었다.
과연 이믿음은 천재가 맞았다.
* * *
오후 수업을 듣는 동안, 나는 생각이 많았다.
양순재의 미국행 제안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미국행.
솔직히 아예 고려를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양순재는 까맣게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청춘을 흉부외과에 바친 농익은 흉부외과의였다.
한국에서 흉부외과의 노릇을 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한국에 비하면 미국에서 보내는 흉부외과의 생활은 천국일 게 분명했다.
인종차별이나 문화 적응에 대한 어려움은 다소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왜일까.
비교적 편한 길이 눈앞에 있음에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은.
나도 모르게 내 결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의 정체는.
오후 수업까지 마친 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한잔하자는 신철우의 제안을 매정하게 뿌리친 채.
현관에 들어서자,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이가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큰아들 왔어?”
“첫날인데 친구들과 놀다 오지 그랬니?”
“형아, 안녕.”
가족들이 건네는 따뜻하고 사랑 넘치는 인사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미국행을 쉽사리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가족 때문이라는 것을.
혼란하고 위험한 세상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 싶다는 것을.
물론 전생과 달리 우리 집안은 풍족하고 여유로웠다.
내가 미국으로 떠난다고 해서 갑자기 폭삭 주저앉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왔다.
누가 뭐래도 내 행복의 뿌리는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저녁 먹기 전까지 방에서 좀 쉬고 있을게요.”
나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하얀 천장을 도화지 삼아 내 미래를 고민해 보았다.
그냥 화끈하게 지금 미국으로 가 버려?
아니면 한국에서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내 마음은 매초마다 한 번씩 양쪽을 오갔다.
* * *
양순재가 예상치 못하게 제안한 미국행.
나는 그것을 나흘의 여유 기간을 두고 판단하기로 결정했다.
선택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선택을 미루는 게 좋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이 내가 가야 하는 길로 스스로 알아서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안고 현재를 살아라. 그러면 먼 훗날, 너도 모르게 대답을 지니고 살아갈 날이 온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릴케의 명언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생처럼 그 명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흑기사, 오늘도 형님만 외롭게 두고 내뺄 생각은 아니겠지?”
오후 교양 수업이 끝나자, 신철우가 내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건드리며 말했다.
“오늘은 학교 근처에서 한잔 빨자. 혹시 OT 때문에 술에 트라우마가 생긴 건 아니겠지?”
“트라우마는 무슨. 그런 거 없다.”
“그럼 곧바로 술집에 가자. 내가 괜찮은 데 봐 뒀으니까.”
나와 신철우는 캠퍼스를 빠져나와 인근에 있는 술집으로 이동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게 오후 6시라서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학교 인근을 배회하고 있었다.
젊음이 뿜어내는 생기가 곳곳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전생의 내 의예과 생활은 어땠더라?’
술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옛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조별 과제로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는 혼자서 외롭게 생활했던 것 같다.
예전의 나는 숫기도 없고, 존재감도 미미했으며 우울한 분위기까지 뿜어내는 아웃사이더였으니까.
‘다행히 별일은 없었던 것 같네.’
기억을 살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은 이미 OT 때 다 터졌다.
빗길의 교통사고와 남초롱의 죽음 같은.
그 이외의 급박한 사건은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만약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뛰어난 순발력으로 대처하면 될 것이고.
“야, 근데 너 어제 오후부터 좀 이상하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이야기하자면 엄청 긴데. 감당할 수 있겠어?”
“날 너무 우습게 보지 마. 이 몸은 멀미 말고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야.”
신철우의 농담에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잡담을 나누며 도착한 술집은 학생들로 붐볐다.
테이블 곳곳에서 잔 부딪치는 소리와 떠들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찍부터 술을 마신 학생들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
빈자리를 찾던 나는 순간 한 테이블에 앉은 무리와 눈이 마주쳤다.
이민호와 이민호 패거리였다.
그들이 나를 보는 눈초리도, 내가 그들을 보는 눈초리도 곱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야, 뭐 해. 자리 뺏기겠다.”
“나도 알아.”
이민호 패거리와 눈빛으로 펼쳤던 신경전을 거두고 빈자리를 차지했다.
닭볶음탕 안주와 소주를 주문한 뒤 어제 양순재와 나눴던 이야기를 신철우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벌써 양 교수님의 눈에 띄어서 미국행 제안까지 받았단 말이지? 하…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네.”
“멀쩡한 사람, 괴물로 만들지 마라. 나도 뇌 하나고, 심장도 하나거든?”
“그냥 하는 소리인데,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네. 짠이나 하자.”
나는 신철우와 잔을 부딪친 뒤 소주를 단번에 비웠다.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할 것 같냐?”
신철우의 의견을 구했다.
비록 4차원이긴 하지만, 신철우의 의견이 내 선택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4차원이 3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이지 않는가.
“글쎄, 가치관의 문제겠지. 미국에 가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을 거고, 한국에 남아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겠지.”
“…….”
“네 뇌는 분명 둘 중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을 고르게 될 거야.”
“가치라… 네 입에서 그런 진지한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친구의 장래가 걸린 일인데, 당연히 진지해야지.”
신철우와 나는 다시 한번 잔에 술을 따르고 잔을 비웠다.
“내 생각엔 이번 선택으로 네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을까 싶다. 중요하고 결정적인 선택일수록 가치관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니까.”
확실히 신철우의 접근법은 흥미로웠다.
인간은 단순히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속에 담긴 가치를 선택한다는 관점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행에서 내가 원하는 가치는 무엇이고.
한국에 남았을 때 내가 원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그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네 대답은 아직 못 들었다. 그래서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할 건데?”
“내 대답을 원하신다면야…….”
신철우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무조건 한국에 남겠어. 그리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돼서도 네 술친구가 되어 주겠지.”
“에라이, 나쁜 놈아. 나보고 한국에 남아서 네 술친구나 하라고?”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꼴이네. 내 대답을 듣고 싶다며?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잖아.”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 앞으로는 거짓말도 적당히 좀 하지 그래?”
나와 신철우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신철우.
4차원 끼가 있긴 하지만 유쾌하면서도 의외로 생각이 깊은 녀석이었다.
과연 이민호 대신 신철우를 선택한 것은 틀리지 않은 결정이었다.
전생에도 신철우와 일찍 친분을 쌓았다면 좀 더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냈을 텐데…….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생의 나는 신철우를 괴짜로만 여겨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선택의 결과.
어쩌면 신철우의 말대로 한 인간은 그가 살아오면서 선택한 선택지들과 그 선택지 속에 숨어 있는 가치로 이루어진 결과물일지도 몰랐다.
“야, 뒤 좀 봐라. 널 찾는 손님이 있는 것 같은데?”
신철우가 검지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