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53화 (53/257)
  • 53화 제1장 관종의 탄생 (3)

    첫 등교일, 첫 수업 시간은 의학 용어였다.

    의학 용어는 개인적으로 의예과 수업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업이었다.

    일반 영어와는 다른 의학 용어의 쓰임새를 배우면서 동시에 해부학적인 지식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회귀한 흉부외과의인 내게는 큰 의미가 없겠지만.

    “흑기사 왔냐?”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신철우가 제법 큰 목소리로 내 별명을 불렀다.

    흑기사라는 단어가 교실에 울려 퍼지면서 대다수의 학생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얀마, 언제까지 흑기사 타령할 건데. 흑기사는 어제 죽었어.”

    “흑기사는 죽었지만, 흑기사의 용감한 정신은 영원히 살아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아침부터 헛소리할래? 이러다가 나한테 꼬투리 잡히면 너 뼈도 못 추린다?”

    나는 신철우와 티격태격하다가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여학생은 손으로 입을 가린 뒤 번개처럼 내 시선을 피했다.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그쯤에서 나는 흑기사란 별명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전체 수석.

    오리엔테이션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왜인지는 모르지만 능숙하게 처리한 학생.

    이런 면모만 보면 나는 동기들이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거부감을 느끼게도 만드니까.

    하지만 흑기사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은 동기들이 내게 친근감을 갖도록 하는 데 퍽 유용한 도구였다.

    지금 나와 눈이 마주친 학생들은 하나같이 웃음에 전염됐지 않았던가.

    이 별명은 어쩌면 나와 동기들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전체 수석까지 하신 분께서 나처럼 하찮은 인간에게 보복 같은 걸 하겠어? 에이, 설마.”

    “깐족거리는 건 네가 전체 수석 같은데?”

    “의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뭐 하나는 잘해야 하니까.”

    신철우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던 도중, 남초롱과 권아름이 교실로 들어왔다.

    전생에서 이맘때쯤 남초롱은 아마 영안실에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남초롱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장소 말이다.

    허망한 죽음에서 벗어나 청춘의 생기를 뿜어내는 남초롱을 확인하며, 나는 내가 다시 한번 옳은 일을 했음을 확신했다.

    내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죽음.

    소름 끼칠 정도로 맥없이 벌어진 죽음.

    노력을 했음에도 되돌리지 못한 죽음.

    전생에서 내게 상처가 되었던 모든 죽음들을 나는 이번 생에서 반드시 극복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회귀한 진짜 이유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믿음아, 안녕.”

    “좋은 아침.”

    남초롱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기에 나도 똑같이 받아 주었다.

    “몸은 좀 어때?”

    “보시다시피 팔팔하지.”

    내 대답에 묘한 미소를 띠는 남초롱.

    궁금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남초롱은 이렇게 대답했다.

    “팔팔이란 단어. 우리 아버지가 자주 쓰는 단어거든. 네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어.”

    “그… 그래?”

    “어쨌든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수업 열심히 듣고 파이팅.”

    교실 맨 앞자리로 이동해 자리에 앉는 남초롱과 권아름을 지켜보던 그때.

    어디선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져 주변을 살폈다.

    마침 이민호와 이민호 패거리가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음흉하게.

    전생엔 없었던 적대관계.

    하지만 나는 이민호 패거리가 두렵지 않았다.

    뒷배경이 아무리 든든하다고 해도 이민호는 결국 애송이였다. 산전수전에 회귀까지 겪은 내 상대는 될 수 없었다.

    * * *

    의학 용어 수업의 막이 올랐다.

    첫날은 강의 오리엔테이션이라서 진도를 빼지 않는 게 보통이었지만, 의학 용어 시간은 달랐다.

    김미숙 교수는 20분 정도 자기소개, 수업 소개를 하더니 곧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동기들이 아쉬운 눈빛을 보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눈치 빠른 학생들은 여기서 감을 잡았을 것이다.

    의학 용어 수업에서 좋은 학점을 따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전직 흉부외과의인 내게 의학 용어는 수학에서 덧셈, 뺄셈 수준의 기초 단계였지만 나름 듣는 재미는 있었다.

    일반 영어와는 다른 의학 용어만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간은 liver라고 한다.

    하지만 의학 용어에서 간은 hepat로 표기된다.

    의학 용어는 대부분 그리스어나 라틴어에서 유래된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의학 용어가 흥미로운 점은 접두사와 접미어로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hepat가 간이고 itis가 염증이니 hepatitis는 간염이다.

    hepat 뒤에 종양을 뜻하는 oma를 붙이면 hepatoma라고 해서 간암이 되기도 한다(oma 앞에 붙는 t는 종양의 성격을 알려 주는 어근 역할을 한다).

    이런 성격 덕분에 접두사와 접미사, 어근 등을 암기해 두면 처음 보는 의학 용어라도 어느 정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전생에서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의학 용어였다.

    의학 용어 수업이 끝난 뒤, 나는 식당에서 신철우와 점심을 해결하고 매화관으로 이동했다.

    “이 야박한 인간아, 나만 두고 대체 어딜 가는데?”

    “일 끝나면 말해 줄게. 형님 없이 지내면서 형님의 소중함도 좀 느껴 봐라.”

    농담을 던지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나.

    내가 향한 곳은 임상 교수 양순재의 연구실이었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인 양순재 교수가 진행하는 실력 테스트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물론 긴장된다거나 떨린다거나 초조하다든가 하는 감정은 손톱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풋내기인 다른 동기들과 달리 나는 사실상 완성된 의사나 다름없었다.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심장 파트 펠로우 2년 과정을 마치고.

    수많은 임상 경험을 쌓으며 부교수 자리에까지 올랐다.

    쓰라린 배신을 당했으나 신수술법을 완성하는 쾌거까지 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껍데기만 의대생이고, 알맹이는 이미 노련한 흉부외과 서전이었다.

    양순재 교수가 어떤 문제를 내더라도 손쉽게 해치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에서 배울 것들을 의예과에서 선행 학습한다.

    그리하여 전생과는 달리 심장은 물론이요, 폐까지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흉부외과의가 된다.

    이것이 바로 내 야무진 목표였다.

    똑. 똑. 똑.

    연구실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양순재 교수는 책상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왔구나. 거기 소파에 앉아라.”

    “네, 교수님.”

    내가 소파에 앉고 양순재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탐색이라도 하듯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양순재였다.

    “저번에 오리엔테이션 때 네가 한 말 말이다. 흉부외과 폐·식도 파트를 선행 학습하고 싶다는 말.”

    “네, 교수님.”

    “그게 흉부외과 펠로우 과정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양순재는 저번에 물었던 사실을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 물었다.

    “네, 의사고시에 합격하고 인턴을 마치고 흉부외과 레지던트 4년 차 과정까지 끝낸 뒤 세부적으로 배우는 과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허…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부탁을 했단 말이지? 고작 의대생인 네가 11년 뒤에나 배워야 할 것들을 지금 배우겠다는 게 가당키나 한 생각이니?”

    양순재의 목소리에 지독한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황당하고 어이없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의술 솜씨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왜?

    나는 이제 어엿한 의대생이니까.

    “교수님의 눈에는 제 행동이 마냥 맹랑하게만 보이실 겁니다.”

    “잘 아는구나.”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과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들이 할 수 없는 일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당하게 내 의견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달려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으음… 입으로 옥신각신 떠들어 봐야 의미가 없을 테니 곧바로 시험을 치르자꾸나. 준비됐니?”

    “네, 교수님.”

    “시간은 40분이다. 문제의 절반만 맞춰도 네 능력을 인정하고 원하는 걸 가르쳐 주마.”

    양순재는 미리 준비한 프린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펜을 들고 문제들을 차근차근 살피기 시작했다.

    시험 문항은 총 30개.

    주관식과 객관식이 반반 섞여 있었다.

    또한 의사고시 문제와 흉부외과 전문의 시험 문제가 반반 섞여 있었다.

    나는 객관식부터 격파하고, 주관식을 풀기 시작했다.

    수술실에서 수술까지 할 수 있는 질환들을 글로 설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관상동맥 질환 외과 수술의 적응증 및 금기에 대해 모두 나열하시오.>

    빠른 속도로 정답을 표기하다가 맞닥뜨린 마지막 문제는 긴 설명이 필요한 주관식이었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양순재가 내 실력의 한계를 확인하기 위해 이 문제를 냈다는 것을.

    그렇다면 더더욱 신경을 써야겠지.

    나는 비교적 간단한 금기부터 적었다.

    폐동맥고혈압을 동반한 심부전증.

    심박출계수 0.2 미만의 심한 좌심실 기능 저하.

    그밖에도 좌측주관상동맥의 협착이 있을 때, 안정성 협심증일 때, 불안정성 협심증일 때, 급성심근경색일 때, 급성심근경색 후 찾아온 협심증일 때.

    이렇게 다섯 가지의 상황에서 수술이 가능한 경우를 나열했다.

    화룡점정으로 환자의 나이는 관상동맥우회술의 금기가 되지 못한다는 내용까지 적었다.

    놀랍게도 91세 환자가 관상동맥우회술을 성공적으로 받은 케이스도 존재하니까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

    나는 20분 만에 모든 문제를 풀고 의기양양하게 시험지를 양순재에게 내밀었다.

    시험지를 내미는 순간, 나는 내가 만점임을 알았다.

    “믿음아, 설마 포기하고 막 찍은 건 아니겠지? 문제 푸는 속도가 너무 빠르구나.”

    나를 향한 양순재의 눈빛은 못 미더운 기색이 역력했다.

    등교 첫날의 의대생이 의사고시 문제와 흉부외과 전문의 문제를 20분 만에 푼다?

    그것도 주관식까지 섞여 있는데?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시험지를 훑는 양순재의 눈빛이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의심에서 당혹으로, 당혹에서 경악으로.

    그는 시험지를 다 살피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

    “객관식은 다 맞았고, 주관식까지 흠잡을 데가 없구나. 의료 지식으로만 따지면 벌써 전문의 수준인걸?”

    “제가 폐·식도 파트를 미리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린 이유. 이제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양순재의 반응을 살피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능력을 증명했으니 이제 양순재에게 가르침을 받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래. 이만하면 폐·식도 파트를 배우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구나.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만…….”

    양순재는 감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입이 아닌 시험 결과로 실력과 지식을 증명했기에 양순재도 순순히 나를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네 수준과 뜻은 이제 충분히 알겠다만… 굳이 흉부외과를 택한 이유가 있니?”

    “…….”

    “내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과 달리 흉부외과는 무척 힘든 과란다. 일이 고된 데다 지원자 수도 적어서 의사들이 다 기피하지.”

    양순재의 지적은 구구절절 옳았다.

    흉부외과는 자타 공인 생지옥의 진료과였다.

    먼 미래에는 대학병원에서조차 흉부외과 지원자가 몇 년 동안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나의 결심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흔들리지 않았다.

    전생에서 내가 살리지 못한 환자들이 나를 부르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부름을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었다.

    “정말 흉부외과를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겠니?”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잡다한 이유를 붙이는 것보다 그게 더 확실한 대답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폐·식도 파트 교육을 해 주마. 그건 어려운 일도 아니고, 오히려 내게 보람된 일일 테니까.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이라 하심은…….”

    “내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더 좋겠구나.”

    양순재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믿음아, 넌 미국으로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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