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제1장 관종의 탄생 (2)
“이믿음, 살아 있냐? 살아 있으면 대답해라. 오버.”
“으으으으.”
침대에 뻗어 있던 나는 문장 대신 신음으로 대답했다.
신철우의 질문에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대답은 ‘살아는 있지. 지옥에서’였다.
광란의 술 파티에서 나는 기어이 남초롱을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잔만 비우면 된다.
이 규칙에 따라 남초롱이 못 마시는 술을 내가 대신 다 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나는 생지옥과 같은 숙취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간헐적으로 손도끼를 이용해 내 머리를 푹푹 찍어 대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마구 쪼개지는 기분이었다.
속이 뒤집혀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린 횟수는 차마 다 세지도 못할 정도였다.
화장실에선 변기를 애인처럼 끌어안고 미친 듯이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남초롱한테 제대로 반했나 보네. 나는 술자리 흑기사가 중세 기사보다 용감한 건 처음 봤거든.”
신철우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농담을 던졌다.
친구는 술병이 나서 죽기 일보 직전인데, 이런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다니…….
신철우가 얄미웠으나 나는 뭐라고 대꾸할 기운조차 없었다.
하지만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신철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오리엔테이션 첫날.
남학생이 잘 알지도 못하는 여학생의 술을 연거푸 대신 마셔 준다?
이런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한눈에 반했다는 말밖에 없을 것이다.
원치 않는 오해를 산 것 같다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모든 것은 시간이 증명해 줄 테니까.
“물 좀…….”
나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밤새 토한 보람이 있었을까.
희미하게나마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었다.
“흑기사님, 목 많이 마르시죠? 물 많이~ 드세요.”
“그놈의 흑기사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냐? 요즘 시대에 기사가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요기 있지.”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낄낄 웃는 신철우.
나는 의대 다니는 동안, 내 별명이 흑기사가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비듬보다는 나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후, 이제 좀 살 것 같네. 땡큐.”
“어쨌거나 어제 네 덕분에 재밌는 구경 많이 했다. 나중에는 다른 조에 있는 사람들까지 와서 너 구경했던 거 알아?”
“그 정도였어?”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광란의 술 파티가 2시간 정도 지난 다음부터는 기억이 흐릿했다. 내가 몇 잔을 마셨는지도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도 안개처럼 어렴풋했다.
“나 혹시 이상한 짓 하지는 않았지?”
전생의 안 좋은 술버릇이 떠오르자, 등골이 오싹했다.
전생의 나는 과음한 뒤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옆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못된 술버릇이 있었다.
오죽하면 수술실에서는 정승이요, 술자리에서는 개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을까.
“했는데?”
“좀 말려 주지 그랬어. 분위기 개판됐을 텐데…….”
“개판은 무슨, 여학생들은 좋아서 아주 난리가 났더구먼.”
신철우에게 들은 내 술버릇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갑자기 웃통을 훌러덩 벗더니 상반신을 노출하고 주변 사람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남발했다는 것이다.
전생의 술버릇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이번 생의 술버릇도 딱히 좋아 보이진 않았다(인생이 바뀌면 술버릇도 바뀌는 모양이다).
‘쪽팔리네. 진짜.’
신철우가 말해 준 술버릇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시 한번 구토를 하고 싶은 역겨운 기분마저 들었다.
“이믿음, 너 혹시 무슨 만화 주인공이냐?”
신철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무슨 뜻인데.”
“오리엔테이션 첫날부터 교통사고 환자를 구해, 장기 자랑 때 무대를 독차지해, 하다못해 술자리에서까지 존재감을 뽐내.”
“…….”
“이 정도면 사실상 만화 주인공 아니냐? 이제 우리 과에서 널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걸?”
“듣고 보니 첫날부터 스펙이 화려하긴 하네.”
나는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하나만 하기도 힘든 것을 나는 하룻밤 사이에 무려 세 개나 해냈다.
아마 오리엔테이션에서의 활약은 앞으로 관종으로 살아가야 할 내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근데 캐릭터로 따지면 너도 만만치 않아. 나한테 가려져서 그렇지.”
“나는 네 발끝에도 못 미칠걸? 넌 오르지 못할 나무야.”
“제발 좀 올라와 주라. 나 외롭다.”
“너 하는 거 봐서.”
신철우와 농담을 주고받은 뒤 나는 화장실로 이동했다.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나는 결국 남초롱을 살리는 데 성공했다.
전생의 남초롱이 음주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면.
이번 생의 남초롱은 무난하게 성장해서 멋진 의사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나만 아는 이야기였으나 그걸로 족하고 충분했다.
내 손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는 만족감은 내겐 그 무엇보다 커다란 보상이었으니까.
전생의 나도 그 만족감 하나로 고된 흉부외과 생활을 버텨 냈다.
돈이나 명예를 바랐다면, 애초에 흉부외과를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외부에서 구걸하지 않는 행복.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내는 행복.
나는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행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괜찮아졌으면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밤새 토해서 배고플 텐데.”
“당연히 그래야지.”
씻고 나오니 신철우가 아침 식사를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방을 나와 1층 식당으로 향했다.
어제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인지 동기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익숙해져야 할 시선이었다.
“저기… 믿음아.”
식사 도중, 누군가가 말을 걸어 고개를 돌렸다. 남초롱과 남초롱의 단짝인 권아름이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싸늘한 시신이 아닌 활력 넘치는 모습의 남초롱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어. 안녕.”
“어제는 진짜 고마웠어. 네가 아니었으면 나… 선배들이 주는 술을 마시다가 어떻게 됐을지 몰라.”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그게 흑기사의 역할이니까.”
“야! 적당히 하자. 응?”
나 대신 신철우가 까불거리는 바람에 내가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나 때문에 많이 힘들지?”
“지금은 괜찮아. 내가 술에 좀 강한 편이기도 하고.”
“미안.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대신 이거라도 마셔. 그리고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나 어제 도움 받은 거 잊지 않을게.”
남초롱은 매점에서 파는 꿀물을 식탁에 올려놓고서 총총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식사를 마친 나는 꿀물을 손에 쥐었다.
꿀물은 따뜻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꿀물은 달콤했다.
전생에서는 마셔 보지 못한 귀중한 꿀물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머니와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어제 다녀온 오리엔테이션에 대해 어머니는 관심이 많았다.
수재라고 일컬어지는 의대생들이 어떤 식으로 오리엔테이션을 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과 오리엔테이션하고 크게 다를 건 없어요. 수능 성적이 좋을 뿐이고, 어차피 대학교 1학년생인데요, 뭐.”
설명을 마친 나는 몇 마디로 내 소감을 정리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여학생은 없었고? 큰아들도 이제 슬슬 연애해야지.”
어머니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연애는 별로 생각이 없어서…….”
“아 참, 연애는 힘드려나? 지원이가 있으니까 말이야. 지원이가 큰아들 연애한다는 사실을 알면 엄청 상처 받을지도 모르겠어.”
“지원이가 저보다 먼저 연애할지도 몰라요. 서로 바빠서 앞으로 얼굴 보기도 힘들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그럴까? 엄마 생각은 안 그런데.”
어머니는 내 의대 생활이 고될 테니 앞으로 식사에 좀 더 신경을 써 주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의대생에게 의예과 2년이란 수능에 희생당한 지난 세월을 보상받는 기간이었다.
실제로 받는 수업이나 수강 스케줄도 다른 과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학 용어나 해부생리학 같은 전공과목만 잘 이수하면 적당히 놀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예과 성적 자체를 본과나 취업에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다르겠지만.’
다른 동기들과 달리 나는 의예과 2년을 허투루 보낼 생각이 없었다.
양순재 교수의 실력 테스트를 무사히 합격한다.
이를 통해 흉부외과의 폐·식도 파트 펠로우 과정을 선행 학습한다.
이것이 내 간절한 목표였다.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흉부외과는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심장 파트 전문의가 폐·식도 파트까지 다룰 수 있다면, 흉부외과에 크나큰 보탬이 될 것이다.
폐·식도 외상 환자가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해 사망하는 비극.
그것을 나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전직 흉부외과 부교수였던 내게 의예과 과정은 수학의 덧셈, 뺄셈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심장 파트야 내 전공이었으니 뼈를 깎아 가며 수련할 정도는 아니었고.
“의대생이 돼도 계속 공부만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구나.”
“네, 의예과 2년 동안은 널널해요.”
“하긴, 사람이 숨 쉴 구멍도 좀 있어야지. 큰아들도 공부 좀 쉬엄쉬엄하고 캠퍼스 생활을 만끽하렴.”
“…….”
“너무 고리타분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사람은 그 시절에만 경험할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야. 그걸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해.”
평소 어머니답지 않는 화법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진지한데 왜 웃니?”
“어쩐지 어머니가 아버지 화법을 쓰는 것 같아서요. 원래 이런 이야기 잘 안 하시잖아요.”
“사람은 원래 오래 같이 지내다 보면 서로에게 물드는 법이지. 생각해 보니 이것도 아빠 말투네?”
어머니도 스스로의 말투를 자각하고 미소를 띠었다.
벌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아버지가 안방에서 나왔다.
최근 가족애를 다룬 소설을 마무리하고 있는 아버지는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큰아들, 학교 가니?”
“네, 피곤해 보이시는데 또 새벽 작업을 하셨어요?”
“꿈에서 뭔가 떠오른 게 있었는데 그걸 놓치고 싶지 않더라고. 그래서 무리를 좀 했단다.”
“그래도 잠은 편하게 주무셔야죠. 간단하게 요기하시고 푹 주무세요.”
“소설을 완성하는데 그까짓 잠이 대수겠니?”
아버지는 본인의 수고와 피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전생에도 저렇게 몸을 아끼지 않다가 협심증을 앓게 됐거늘.
아버지의 과로가 나는 못마땅하기만 했다.
“대수인 거 맞아요.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시고 꼭 주무세요. 저랑 약속하세요.”
나는 평소와 달리 강하게 주장을 펼쳤다.
잠자는 시간은 버리는 시간이다.
잠자는 시간은 아까운 시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의견에 절대 찬성할 수 없었다.
휴대폰 배터리로 비유를 해 보자.
휴대폰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충전을 한다고 치면, 그 충전 시간이 정말로 버리는 시간일까.
반대로 꼭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늘 아슬아슬한 전력이 남은 배터리로 살아가다가 기어이 전원이 꺼져 버리는 것.
기어이 휴대폰까지 고장 나는 것.
나는 그것이 질환이라고 생각한다.
스트레스 조절과 충분한 수면.
물론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지키기 힘든 것이지만, 이 두 가지야말로 건강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나는 생각했다.
“의대생인 큰아들이 두 눈 부릅뜨고 말하면 들어야지. 네 말대로 하마. 학교 잘 다녀오고.”
“네, 꼭 푹 쉬세요.”
물을 마신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찾아온 등교 첫날.
오늘은 양순재 교수와 오후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실력 테스트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오랜만에 의학 지식을 뽐낼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