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살부터 의사 생활-51화 (51/257)
  • 51화 제1장 관종의 탄생 (1)

    “왜 이렇게 늦었어? 교수님하고 인생 상담이라도 하고 왔냐?”

    배정받은 숙소로 돌아가자, 신철우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오리엔테이션 시작 시간에 맞춰 나갔지만, 신철우는 자리를 지키는 중.

    그렇다면 그동안 나를 기다려 준 것이 분명했다.

    전생에는 미처 몰랐던 신철우의 새로운 일면을 나는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하나, 신철우는 의리가 있다.

    우리가 환자의 뇌와 심장이라는 코어 장기를 다루는 파트너가 된다고 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이 바로 의리가 아닌가.

    성격이 4차원이면 어떠랴, 의리만 있으면 되지.

    “미안, 이야기가 길어져서. 상대가 교수님인데 내가 먼저 말을 끊을 수가 있어야지.”

    “됐으니까 빨리 가자.”

    “고맙고 미안하다.”

    나는 백팩에서 오늘 남초롱의 목숨을 구하게 될 비장의 아이템을 챙겨서 숙소를 나왔다.

    비장의 아이템의 이름은 바야흐로… 젤포스 현탁액.

    위염, 위산 과다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제산제이자 일반 의약품이었다.

    타다다다닥.

    소집에 늦은 나와 신철우는 고요한 복도를 요란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철우야, 너 술 잘 마시냐?”

    “뜬금없이 주량은 왜 물어보는데?”

    신철우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궁금해서. 호기심에 뭐 대단한 이유가 있겠어?”

    “적당히 마시지. 소주 1병 반 정도?”

    “됐다. 그 정도면 충분해.”

    원하는 정보를 얻은 나는 지하 강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2차 숙소 오리엔테이션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총 100여 명의 입학생은 열 명의 조로 찢어져 장기 자랑을 준비하게 되었다.

    나와 신철우는 5조에 편성되었는데, 5조에는 비극의 주인공 남초롱, 제 잘난 맛에 사는 이민호의 왼팔 배태섭이 포함되어 있었다.

    5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리엔테이션 도중에 친해진 동기들이 다들 적어도 한 명씩은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조원들이 장기 자랑의 내용을 토의하는 동안, 나는 잠시 딴생각에 빠졌다.

    바로 오리엔테이션에서 왜 신입생의 장기 자랑이 필요한가에 대한 불만이었다.

    장기 자랑은 오히려 먼저 학교를 다니며 경험을 쌓은 선배들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입생 장기 자랑은 그저 강제적인 재롱잔치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믿음, 혼자 딴생각하냐? 팀원들이 열심히 토의하는 거 안 보여? 수석이면 장기 자랑 같은 건 무시해도 된다, 그런 뜻인가?”

    배태섭이 가자미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같이 대화를 하자고 하면 될 것을…….

    거기에 수석이니 무시라는 단어를 결부시켜 논리를 비약한 뒤 나를 공격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누가 이민호의 왼팔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이다.

    “열등감이 폭발하기 직전인 것 같은데, 진정 좀 하지 그래?”

    “뭐라고? 열등감?”

    “잠깐 혼자 생각한 거 가지고 수석 운운하는 거. 그거 열등감에서 나온 거 아닌가?”

    “이 새끼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내 도발에 활활 타오르는 배태섭의 눈동자.

    하지만 나는 전혀 기죽지 않고 배태섭과 눈을 마주쳤다.

    이민호의 패거리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그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이민호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다 적으로 간주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민호의 측근을 찍 소리도 못 하게 찍어 누르는 것이 옳았다.

    수족을 하나하나 자르고, 나중에는 이민호까지 손봐 줘야 할 것이다.

    “야, 벌써부터 너희들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냐? 너희 싸우라고 만든 자리가 아니잖아.”

    나와 배태섭의 말다툼으로 분위기가 흉흉해질 무렵, 2학년 선배가 우리 조에 합류했다.

    선배가 스스로 소개한 이름은 유동훈.

    전생을 뒤져도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유동훈의 등장으로, 얼음장 같았던 분위기가 간신히 녹아내렸다.

    “시간이 이제 40분밖에 안 남았다. 장기 자랑으로 뭐를 할지 결정하고, 미리미리 연습도 해야지. 다들 조금이라도 잘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장기 자랑, 제가 할게요.”

    나는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순간, 선배와 동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내가 나설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믿음이, 네가? 조금 의외인데? 뭐 하려고?”

    “노래 부르겠습니다. 저 노래 잘 부릅니다. 다른 조원들은 뒤에서 간단하게 율동 같은 걸 하면 될 것 같아요.”

    “노래에 율동이라… 무난하긴 하네. 물론 믿음이, 네 노래 솜씨가 제일 무난해야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배의 눈빛에 의심이 담겨 있었다.

    전체 수석 = 공부벌레 = 레크레이션 무능력자.

    아마도 이런 공식에 따라서 나를 미심쩍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회귀한 나는 다른 사람의 예상과 달리 수능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주 2-3회 복싱 체육관에서 훈련을 하고, 틈틈이 노래도 불렀다.

    전생과 현생에서 내가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던 도구.

    그것이 바로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노래를 퍽 잘 부르는 편에 속했다.

    ‘기왕 엎질러진 물이니 달려 보자.’

    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대학 전체 수석.

    낮에 있었던 교통사고 처치.

    이 두 가지만으로도 나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관심은 일회성이 아니라 내가 어디를 가든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다.

    40여 년 시간을 거슬러 회귀한 흉부외과의인 이상, 내 활약이 또래와 같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먼 미래에 신조어로 생겨나는 관종.

    나는 정의로운 관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겠다고.

    능력을 숨기는 건 1살 때부터 질리도록 했으니 이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싶었다.

    그 시작은 오늘 장기 자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부터 막을 올릴 것이다.

    “그럼 노래 한 소절만 불러 볼래?”

    “네, 흠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창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열창하기 시작했다.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였다.

    “얼마 동안 야윈 널 달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시원시원한 가창력을 뽐내고 나니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180도로 바뀌었다.

    감탄한 느낌?

    의외라는 느낌?

    신선하다는 느낌?

    그런데 그 시선들에 부끄럽다기보다는 반대로 후련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어쩌면 나는 전생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관심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 *

    5조의 장기 자랑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강당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나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냈다.

    열창의 후유증이었다.

    “야, 너 다시 봤다? 오히려 공부를 안 하고 노래만 부른 거 아니야?”

    신철우가 내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건드리며 말했다.

    “그럴지도?”

    “세상에 나만큼 특이한 캐릭터가 또 있을 줄이야. 역시 세상은 넓단 말이지.”

    “너도 네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아는구나. 난 까맣게 모르는 줄 알았는데.”

    “어쭈? 비꼬기냐?”

    나는 신철우와 티격태격하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전생에는 병풍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오리엔테이션이었지만, 이번 생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주목을 받는 기분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이 느낌, 앞으로도 익숙해져야겠지.

    다른 조원들의 장기 자랑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남초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밤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선택된 남초롱을.

    ‘슬슬 준비해야지.’

    나는 잠깐 강당에서 빠져나와 화장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미리 챙겨 온 젤포스 현탁액 두 포를 단번에 삼켰다.

    남초롱이 죽는 이유는 낮에 있었던 교통사고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교통사고가 대처하기 힘든 불가항력이라면, 남초롱의 죽음은 인재(人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벌어지는 광란의 술판.

    남초롱은 선배들이 강권하는 술을 마시다가 만취가 되어 버린다.

    만취 상태에서도 폭음에 폭음을 강요당하다가 결국 콘도 야외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그러니까 음주 사고로 허망하고 원통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먼 미래에는 이런 악습이 어느 정도 고쳐진다지만 현재는 1999년.

    이런 악습조차 하나의 문화로 여겨지던 때였다.

    매해마다 OT로 인한 음주사망자가 나와 매스컴이 떠들썩했으니 말 다했다.

    ‘최대한 버텨 봐야지.’

    나는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술을 잘 드시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나는 술을 곧잘 마시는 편이었다.

    주량은 소주 3병 정도.

    젤포스 현탁액의 도움을 받으면 조금 더 무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초롱이 마셔야 할 술을 내가 대신 마신다.」

    그게 내 작전이었다.

    많이 조잡하고 유치해 보이지만, 회귀한 나라도 이 이상의 묘안은 찾을 수 없었다.

    신원대학교에서 의사 생활을 하는 한, 앞으로 평생을 보게 될 선배들과 원수로 지낼 수는 없었다.

    의료계 바닥은 워낙 좁아서 한두 다리만 건너도 서로 다 알지 않는가.

    괘씸한 놈으로 낙인찍히면, 미래가 고달팠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는 강당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장기 자랑이 성황리에 끝난 뒤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각 조에 3명 정도의 선배가 투입되어 술자리의 흥을 돋웠다.

    “예과 때는, 그것도 1년 차 때는 성적 신경 쓰지 말고 팍팍 놀아. 그동안 공부만 했던 거 보상 받아야지.”

    “암. 그렇고말고. 동아리 활동도 최소한 한 개는 꼭 하고.”

    “이 두 새끼 말은 적당히 걸러 들어라. 전공하고 교양 F 받고 빌빌거리는 놈들이니까.”

    선배들이 자기 경험담을 유쾌하게 풀어놓으면서 술자리는 화기애애해졌다.

    신철우를 포함한 동기들도 꽤 흥에 겨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취기에 오른 선배와 동기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과 귀는 오로지 남초롱을 향해 있었다.

    꿈에 그리던 의대에 입학해서 참석한 오리엔테이션.

    그 자리에서 음주 사고로 사망을 하게 된다니…….

    이보다 더 기막히고 기구한 운명이 또 있을까.

    남초롱 본인은 물론이요, 남초롱의 부모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나는 전생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다.

    “초롱아, 잔이 안 줄어든다?”

    한 선배가 남초롱의 잔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핀잔을 주자, 남초롱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남초롱의 얼굴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다.

    “잔 내밀어. 하늘 같은 선배가 주는 술을 거절하면 안 되지. 지금 잔을 비워야 앞으로가 편해.”

    “…네.”

    강압적인 분위기에 못 이겨 남초롱은 잔을 받았다.

    죽상이 다 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열이 받았다.

    선배가 정말 하늘 같다면, 전 세계의 하늘은 먹구름 천지일 것이다.

    술 못 마시는 신입생에게 술을 강권하는 게 하늘 같은 선배가 하는 짓이란 말인가.

    “얼굴 펴고 시원하게 쭉 들이켜. 이것도 딱 오늘 하루뿐이니까.”

    “…네.”

    “선배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드디어 잠자코 있던 내가 나섰다.

    “이야, 전체 수석에 가수 이믿음이잖아. 그래? 왜?”

    “제가 초롱이 흑기사를 해도 됩니까?”

    “흑기사?”

    내 행동이 예상 밖이었는지 남초롱에게 술을 따라 준 선배가 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선배들과 동기들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뭐… 안 될 것도 없지. 잔만 비우면 되니까.”

    “남초롱. 네 잔, 나 줘.”

    “아… 아니야. 내가 마실게. 너한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내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는 남초롱은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나는 그래서 남초롱을 더 살리고 싶었다.

    멋진 의사가 된 미래의 그녀를 직접 보고 싶었다.

    “이야, 분위기 달달한 거 뭔데? 수업 듣기 전부터 러브라인인가?”

    “역시 신입생들은 뜨겁구먼.”

    철딱서니 없는 선배들이 이상한 쪽으로 분위기를 잡아갔으나 나는 그들이 그저 한심할 따름이었다.

    이 멍청한 인간들아.

    내가 지금 당신들 목숨까지 살려 주고 있는 거 알아?

    주변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나는 오히려 과감하게 자리를 옮겨 남초롱 곁에 앉았다.

    “선배들이 주는 술 억지로 마시다가 죽는 수가 있어. 괜한 고집 부리지 마.”

    남초롱에게 귓속말을 전하고.

    나는 남초롱의 손에 쥔 잔을 빼앗아 단번에 들이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