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제5장 나는 의대생이다 (3)
촤아아아!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서늘한 봄비가 우산을 때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벌어질 고난과 역경을 마치 예고라고 하는 것처럼.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괜찮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예전의 나만큼만 하면 돼.’
나는 오로지 환자를 살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교통사고 환자는 전생과 똑같이 죽을지도 모른다.
내가 제대로 손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은 쓰레기 치우듯이 멀찍이 치워 버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발목을 잡는 것들은 전부 물리쳐야 했다.
“조교님! 119에 신고부터 해 주시고 구급함을 챙겨 주세요.”
나는 뒤따라 나온, 겁에 질린 조교에게 지시부터 했다.
제아무리 명의라고 해도 맨손으로 응급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요리사에게 조리 도구가, 벌목공에게 전기톱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어? 그래. 알았어. 거기 학생들, 나 좀 도와줘요.”
조교가 뒤늦게 버스에서 내린 학생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자네, 이름이 뭐지?”
앞서 걷던 양 교수가 뒤로 돌아 나를 응시했다.
“이믿음이라고 합니다.”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군.”
담백한 한마디였지만, 그 울림은 컸다. 양 교수가 나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퍼즐 조각 하나를 또 맞췄다.’
양 교수는 내 의예과 생활에 중요한 중심축이 될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전생의 내게서 모자란 것들을 양 교수를 통해 채우게 될 테니.
교통사고가 나자마자 내가 1등으로 버스에 내렸던 이유.
그중 9할은 환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고, 나머지 1할은 양 교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
“…….”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와 양 교수는 갓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사건 현장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두 대의 차량이 버스 뒤쪽 갓길에 멈춰 있었다.
차량 한 대는 범퍼가 떨어지고 앞쪽 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졌으며.
남은 한 대의 차량도 상태가 썩 좋지는 못했다.
현장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
전생의 나는 치료에 나서지 않았다.
버스에 앉아서 그저 상황이 해결되기를 기다렸으므로 교통사고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즉 회귀를 했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교통사고가 일어난다는 사실 그 자체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모르는 부분은 경험으로 메우는 수밖에…….’
각오를 마치기 무섭게 도착한 현장.
양 교수는 훼손이 더 심한 자동차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의 뒤에서 자동차를 확인했다.
정면의 차창과 조수석의 차창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차에 타고 있던 인원은 두 명으로, 중년의 부부처럼 보였다.
에어백은 터졌고, 두 사람 다 의식이 없었다.
“괜찮으세요?”
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음에도 두 사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의식이 없는 환자들의 상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우선 운전석에 앉은 환자부터 꺼내야겠구나.”
“네, 교수님. 다들 이쪽으로! 빨리!”
내 다급한 외침에 동기들 몇몇이 우르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중 두 학생의 손에 들린 구급함을 본 순간,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저 구급함이야말로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너무 강제로, 힘으로만 빼내려고 하지 말고 최대한 목 부위를 보호하면서. 알겠지?”
양 교수의 지시는 응급 구조의 기본 중의 기본 사항이었다.
의식이 없는 환자는 목을 제대로 가눌 수 없다.
그래서 함부로 환자를 이동시켰다간 경추골절이 발생하기 일쑤였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이 없는 환자를 등에 업고 달리는 것은 최악의 행동 중 하나였다.
그 과정에서 힘이 없는 환자의 목이 마구잡이로 꺾이기 때문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거기 두 사람이 환자의 팔과 몸통을 당겨 줘. 내가 환자의 머리를 받칠게.”
나는 학생들에게 지시하며 운전석에 앉은 환자부터 구조에 나섰다.
여기 있는 의대생들은 의대 수업 한 번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으나, 양 교수와 나의 지시를 따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뭇가지도 뭉치면 단단해지는 법.
“내가 둘을 셀 때마다 환자를 당겨. 하나, 둘! 하나, 둘!”
동기들이 운전석의 환자를 차 밖으로 끌어내는 동안, 나는 두 손으로 환자의 목을 조심스럽게 받쳤다.
차 앞부분이 찌그러지고 에어백이 터진 상황이라 환자를 빼내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동기들의 호흡이 금방 거칠어졌다.
“환자가 잘 안 빠지는데? 힘을 더 쓸까?”
“아니. 지금처럼만 해. 힘으로만 빼내려고 하면 그 과정에서 더 큰 부상이 생기니까. 조급해할 필요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돼.”
나는 구조 중인 학생들을 차분하게 다독였다.
응급처치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치료자가 쫓기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쫓기는 기분이 들면 괜히 마음이 다급해져서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된다.
“다시 하나, 둘! 하나, 둘!”
구호에 맞춰 힘을 쓰던 학생들이 마침내 운전석에 끼어 있던 환자를 바깥으로 빼냈다.
“…….”
“…….”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환자를 확인한 나와 양 교수, 학생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남자 환자의 대퇴부에 무려 개방성 골절이 있었다.
개방성 골절.
뼈가 부러지면서 부러진 뼈가 피부를 뚫고 바깥으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환자의 대퇴부는 5센티 가깝게 찢어져 있었고, 그 부위에서 철철 피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부러진 뼈는 이를 지켜보는 사람의 모골마저 송연하게 만들었다.
이 기막힌 상황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나였다.
나는 황급하게 개방성 골절이 일어난 부위에서 약 5센티 윗부분의 동맥을 양손으로 압박했다.
간접 압박 지혈법.
개방성 골절 환자라 직접 압박을 할 수 없었기에 간접 압박 지혈법을 선택한 것이다.
“거기 빨간 옷, 우산으로 환자가 비 안 맞게 막아 줘. 거기 안경은 외투 벗어서 환자 덮어 주고, 구급함을 가져다줘.”
나는 신속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체온 조절과 개방성 골절의 처치라는 것을 단박에 파악했다.
나의 깔끔한 지시에 놀랐는지 양순재가 눈을 깜빡거렸다.
“믿음아.”
“네, 교수님.”
“이 환자 소독하고 상처 위에 붕대를 감아 주거라. 단 절대로 뼈를 도로 집으려고 하면 안 된다. 2차 오염이 발생하면 큰일 나.”
“…….”
“여긴 너에게 맡기고 나는 다른 쪽 환자를 살피마.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나를 찾아라.”
“네, 교수님.”
양 교수가 몇몇 학생들을 데리고 황급히 다른 차량으로 이동했다.
제아무리 잘난 교수라고 해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고 난 차는 두 대였고, 환자는 총 네 명이었다.
이 차량의 환자를 살피는 동안, 반대편 차량의 환자는 더욱 위험해질 수 있었다.
양 교수의 입장에선 비교적 똘똘해 보이는 내게 이쪽 환자를 맡기고, 다른 환자를 살피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혼자 감당할 수 있지. 양 교수가 저쪽 환자를 봐준다면 여기에 있는 환자 그 누구도 죽지 않을 테고.’
냉정하게 계산을 마친 나는 본격적인 처치에 나섰다.
외상 환자를 처치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그중 하나는 지혈이요, 그다음은 감염 방지였다.
우선 나는 다른 학생에게 나 대신 환자의 허벅지를 압박하도록 지시했다.
그제야 자유로워진 두 손.
알코올 솜으로 닦아 깨끗해진 손으로 내가 가장 먼저 쥔 것은 생리식염수였다.
콸콸콸.
피부 바깥으로 드러난 허연 뼈와 상처 주변의 시꺼먼 이물질을 식염수로 씻어 내렸다.
그다음, 거즈로 상처와 뼈를 가볍게 닦아 낸 뒤 본격적인 드레싱에 나섰다.
드레싱은 쉽게 말하면 소독이었다.
하지만 소독에도 요령이 있었다.
소독액이 묻은 솜으로 상처를 문지른다고 해서 소독이 아니었다.
소독이란 동심원을 그리며 상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야 상처 주변에 있는 피부 조직이나 이물질을 바깥으로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치이이익.
과산화수소로 1차 소독을 마치자 하얀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탄산음료를 딸 때 나올 법한 소리가 나기도 했다.
“…….”
“…….”
포비돈 용액, 흔히 말하는 빨간 약으로 2차 소독을 하는데 문득 우산으로 환자를 받쳐 주던 학생과 눈이 맞았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이렇게 치료를 잘하는 건데?
…라고 학생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눈으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4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돌아온 흉부외과 의사라고.
물론 학생은 이해할 리 없겠지만.
소독을 마친 나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환자의 개방성 골절 부위에 단단하게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환자의 종아리 부근에 나무토막처럼 생긴 부목을 대고 한 번 더 붕대를 감았다.
상처 부위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한 것이다.
이래야 대퇴부에서 튀어나온 뼈가 다른 조직을 다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처치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한시름 덜었다.
“이믿음, 너 의대생 맞아? 의사 아니야?”
처치를 지켜보던 학생 한 명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학생의 입장에선 당연한 질문이었다.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치료를 하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노련한 의사 그 자체였으니까.
오리엔테이션 중인 파릇파릇한 의예과 신입생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천재일지도?”
실로 낯부끄러운 말을 나는 과감하게 질러 버렸다.
성인이 되었고, 신원대학교 전체 수석을 차지한 내가 아니던가.
앞으로는 더 이상 내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또한 말도 안 되는 활약을 설명하기에 천재만큼 좋은 핑계가 없지 않는가.
나는 더 이상 내 능력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체온계랑 혈압계 좀 줄래?”
“여기.”
나는 건네받은 체온계를 환자의 왼쪽 겨드랑이에 끼워 놓았다.
먼 미래에는 사용 금지를 당하는 수은 혈압계로 환자의 혈압까지 측정했다(과거 버스 전복 사건을 겪은 이후 의대 구급함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앰부 백도 보유하고 있었다).
응급처치가 효과가 있었던 걸까.
150/100㎜Hg.
개방성 골절을 입은 환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 괜찮은 수준의 혈압이었다.
우산으로 비를 막고 외투로 체온을 보존해 준 덕분에 체온도 36.1도로 양호했다.
흉곽의 움직임으로 계산한 호흡수는 분당 60회로 정상 수치였다.
비록 환자의 의식은 없었으나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활력징후 역시 만족할 만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치료를 해야 하는 환자가 한 명 더 남아 있었다.
“믿음아, 이쪽 환자 우리가 빼냈다. 목 안 다치게 조심해서.”
“고마워. 확인할게.”
나는 조수석 쪽으로 황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수석의 여성 환자는 운전석의 환자에 비하면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그녀 역시 의식은 없었지만, 별다른 외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활력징후를 확인한 결과, 특이 사항 또한 없어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비록 뇌출혈이나 비장 파열 같은, 보이지 않는 질환이 발생하는 도중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대신 나는 혹시 모를 구역반사를 막기 위해 그녀가 회복 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회복 자세는 쉽게 말하면 환자가 측면을 보고 눕도록 만드는 자세였다.
의식 없는 환자의 혀가 쳐져서 기도를 막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주목적인 자세였다.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자, 홀딱 젖은 몸에 추위가 엄습해 왔다.
몸이 달달 떨리고, 치아는 딱딱딱 부딪쳤다.
하지만 숙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양 교수가 있는 쪽을 바라보니, 한창 CPR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향해 다시 한번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