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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47화 (47/257)
  • 47화 제5장 나는 의대생이다 (2)

    잿빛 하늘이 추적추적 겨울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

    출근을 준비하는 아파트 주민들은 우산을 든 채 잰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파트 동 출입구에 서 있던 나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귀를 한 후에도 나는 오늘의 날씨와 감정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하필이면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에 우울하게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 비는 단순히 우울한 비가 아니었다.

    오늘 낮과 밤에 닥쳐올 불길한 사고들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

    나는 머지않아 닥쳐올 일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걱정하지도 않고, 초조해하지도 않기로 했다.

    두려움이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이므로 의사인 내게 두려움이란 반드시 물리쳐야 할 감정이었다.

    우산을 활짝 펼치고 담대하게 빗속으로 나아갔다.

    후두둑. 후두둑.

    빗줄기가 우산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고 경쾌했다.

    나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지하철을 타고 신원대학교 캠퍼스를 찾았다.

    도착 시간은 오전 8시 40분.

    의대 강당이 있는 달래관에는 벌써 파릇파릇한 의예과 신입생들이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귀하고 처음 만나게 된 동기들.

    그중에는 회귀를 하고도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동기들이 있는 반면.

    얼굴만 봐도 반가움이 절로 샘솟는 동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만 간직하고 있는 추억이란 달콤하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것이기도 했다.

    ‘가만 보자.’

    나는 달래관 1층 홀에 서서 앞으로 6년을 함께 보낼 동기들의 얼굴을 좀 더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친해져야 할, 가장 먼저 친해지고 싶은 동기가 곧 눈에 들어왔다.

    신철우.

    전봇대처럼 큰 키에 안경을 쓰고 있는, 다소 까탈스러워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

    전생의 나는 신철우와 썩 친하지 않았다.

    굳이 신철우가 아니더라도 나와 친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긴 했지만 말이다.

    전생의 나는 사교성이 많이 떨어졌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외를 하느라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했고,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번 생까지 외톨이로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풍족한 가정 형편 덕분에 딱히 과외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의학 실력 키우기.

    먼 훗날 함께할 파트너 구하기.

    의예과 2년 동안은 아마 이 두 가지 작업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네가 이믿음이지?”

    신철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부티가 잘잘 흐르는, 마치 순정 만화 속 주인공처럼 생긴 학생의 이름은 이민호였다.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

    어머니는 고위직 공무원인 이민호는 자타 공인 엄친아였다.

    이민호가 내게 다가오자, 주변 동기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어디서나 주목 받는 삶을 사는 녀석은 존재감부터 남달랐다.

    “어. 맞는데?”

    “전체 수석이라고 해서 입학식 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다. 너 정도면 꽤 괜찮은 친구 같네.”

    이민호는 마치 상품을 품평하는 말투로 나를 평하더니 노골적으로 내 위아래를 훑었다.

    나를 향해 관심을 드러내는 이민호를 통해서 나는 내 인과율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전생의 이민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민호는 선민의식과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인간으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민호 곁에는 부모님이 판검사, 변호사, 의사 등인 학생들이 모이게 된다.

    이민호와, 이민호와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을 먼 훗날 동기들은 로열패밀리라고 불렀다.

    부러움 반, 경멸 반을 담은 별칭이었다.

    그러니까 대학 전체 수석을 하면서 나도 그 로열패밀리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걸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오늘부터 내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리는 건 어때?”

    이민호는 마치 자기 자신이 엄청난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표정으로 강당 입구 쪽을 가리켰다.

    이민호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집안이 빵빵한 친구들이었다.

    “…….”

    나는 잠시 고민했다.

    로열패밀리에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았다.

    이민호의 큰아버지가 신원대학교 병원의 진료부원장이었기에 무엇보다 병원 생활이 편해질 것이다.

    실제로 이민호와 친하게 지낸 동기들은 다른 동기들보다 진급이 빠르기도 했고.

    “제의는 고마운데,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

    “나랑 같이 지내면 도움 받을 일이 많을 텐데…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민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기회는 두 번 오지 않아. 잘 생각해 봐.”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전체 수석이라는 녀석이 원 이렇게 머리가 나빠서야. 됐다.”

    이민호는 각 잡힌 동작으로 돌아서더니 제 패거리에게 돌아갔다.

    유치한 대사에 유치한 엘리트 놀이를 하는 건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녀석이었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예쁨을 받으며 오냐오냐 자라기만 했으니 정신연령이 성숙할 리가 있을까.

    나이와 나잇값은 빗나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민호처럼.

    어쨌거나 이민호의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나는 앞으로 이민호와 사사건건 시비가 붙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눈 밖에 난 인간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찍어 누르는 게 이민호란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민호의 패거리에 들어가서 이민호에게 아부하고 병원에서 승진하는 것이 내 목표는 아니니까.

    내 목표는 내가 구하지 못했던 환자들을 구하고.

    내가 안타깝게 놓쳐 버린 동료 의사들과의 인연을 복구하며.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흉부외과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출세만을 바라보는 이민호와는 애초부터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또한 이민호의 집안 배경이 아무리 좋아도.

    이민호가 아무리 잘났어도.

    나는 이민호가 가지지 못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민호가 앞으로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손금을 보듯이 훤히 알 수 있었다.

    날 건드려서 후회하는 쪽은 분명 이민호가 될 것이다.

    * * *

    대강당에서 대망의 오리엔테이션의 막이 올랐다.

    과대표의 진행에 따라 교수님 소개, 의대 연혁 소개, 학생회 및 총학생회 소개, 수강 신청 요령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신 몇 시간 뒤에 벌어질 참사를 어떻게 막아 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참사가 벌어질 것을 아는 이는 오로지 나뿐이었으므로 나는 고독하기 그지없었다.

    강당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 신입생들은 우르르 버스로 몰려갔다.

    이동하는 중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이민호가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이제 보니 유치하기만 한 게 아니라 속도 좁은 놈이었다.

    한편 나는 신철우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신철우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신철우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훑었다.

    “전체 수석이 내 옆자리에? 황송하네.”

    “알면 됐다. 기왕이면 자리도 따뜻하게 데워 두지 그랬어?”

    내 농담에 깔깔 웃는 신철우.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간단하게 통성명을 했다.

    내가 이민호 대신 신철우를 택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신철우는 동기들이 알아주는 4차원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일처리만큼은 똑 부러졌다.

    그래서 선배들도 신철우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후배들 역시 신철우를 무시하지 못했다.

    더 결정적인 사실은 신철우가 훗날 신경외과 명의로 거듭난다는 사실이었다.

    T.A(교통사고) 환자나 긴급 외상 환자가 이송되면 흉부외과와 신경외과가 함께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잦은데 그때 신철우는 내게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신체 중에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 없다지만.

    그중에서도 두 가지 핵심 기관을 꼽으라면, 단연 뇌와 심장을 꼽을 수 있었다.

    내가 환자의 심장을 맡고 신철우가 환자의 뇌를 맡는다면 못 살릴 환자가 없지 않을까.

    「신철우와 친분을 두텁게 쌓고 나중에 모종의 이유로 신원대학교 병원을 떠나게 되는 신철우를 붙잡아 내 곁에 둔다.」

    나는 내가 그린 청사진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퍼즐 조각을 맞추다 보면, 언젠가 수술 드림팀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까 봤는데, 이민호랑 싸우는 것 같더라?”

    “글쎄, 싸움까지는 아니고 내가 자기 패거리에 안 들어가니까 심사가 뒤틀렸나 봐.”

    “들어가는 게 좋지 않나? 뜯어먹을 게 많아 보이던데.”

    신철우의 화법은 역시 특이했다.

    이민호를 뜯어먹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발상도 독특했고.

    “그럼 내가 너를 추천해 줄까?”

    “그건 사양할게. 비위가 약해서 비위 맞추는 걸 못 하거든.”

    신철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마찬가지라서 거절했지.”

    “그래? 근데 내가 봤을 땐 너도 이민호만큼 보통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뇌는 선천적으로 놀기 좋아하는 기관이지. 왜인 줄 알아? 뇌는 우리 체중의 2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우리 몸에 있는 에너지의 25퍼센트나 사용하거든. 그러니까 뇌를 쓴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지.”

    “…….”

    “그런 게으른 기관을 움직여서 수능 만점을 받고 대학 전체 수석을 했다?”

    “…….”

    “그럼 넌 당연히 정상이 아닌 거야.”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하는 신철우를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나를 비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굳이 뇌까지 엮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펼쳤어야 했을까.

    전생에 소문으로 들었던 신철우의 4차원 기질.

    그것을 실제로 마주하니 충격은 배가되었다.

    하… 이거 신철우가 아니라 이민호를 택했어야 하나, 하고 후회될 정도로.

    “비정상이라는 표현보다는 집념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비정상이라는 표현에 고통 받을 필요는 없어. 사실 감정이라는 것도 사실 포유류의 뇌라고 불리는 대뇌변연계에서 생성되는 것이니까.”

    “…….”

    “감정도 일종의 화학 및 신경 반응인 셈이지.”

    나는 신철우가 흥분해서 떠드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회귀를 통해 익힌 화술도 신철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3차원의 화술로는 4차원의 화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신철우의 뇌 강의는 30분 만에 종료되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 신철우가 극심한 멀미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뇌 과학자 선생님, 멀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아이 씨, 몰라.”

    내가 놀리자 신철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은 나를 더욱 웃음 짓게 만들었고.

    신철우와의 대화로 긴장을 해소한 나는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관광버스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아침부터 내렸던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이제 슬슬 때가 됐는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고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버스는 교통사고 현장을 지나게 될 것이다.

    빗길에 미끄러진 자동차 한 대가 다른 차를 들이받으면서 생긴 교통사고였다.

    전생에서 버스는 사고 현장 근처의 갓길에 정차하고, 동승 중인 흉부외과 임상 교수 양순재와 몇몇 학생들이 급하게 버스에서 내려 응급처치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전원 사망.

    그 원인은 단순했다.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양 교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버스에 탄 신입생들은 아직 솜털도 나지 않은 의대생들이었기에 양순재의 처치와 지시를 소화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전직 흉부외과의인 내가 있었다.

    내가 활약한다면, 119가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테고.

    그러면 교통사고 환자들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야, 방금 저거 봤어? 교통사고 났던데?”

    “봤어. 차가 완전히 찌그러졌더라.”

    “우리가 신고할까?”

    교통사고를 목격한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현장과 반대편이라 사고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감지하고 잠자고 있던 서전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이제 내가 활약할 때였다.

    “몇 명만 나를 따라 나오거라. 오리엔테이션 중이라도 환자를 보고 모른 척할 순 없다.”

    현장에서 은퇴한 백발의 교수 양순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들을 조용히 시켰다.

    버스 기사에게 버스를 갓길에 세워 달라는 부탁도 했다.

    이윽고 멈춰 선 관광버스.

    찬물이라도 얻어맞은 듯 조용해진 버스 안의 공기.

    예상치 못한 상황에 겁에 질려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는 동기들.

    더 두고 볼 것이 있겠는가.

    나는 가장 먼저 양순재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환자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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