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제4장 매듭 (4)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시간은 천천히 흐르거나 급기야 멈춰 버린다.
하지만 심병수라는 난관을 퇴학과 소송으로 물리친 뒤 잠시 멈췄던 내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학교 그리고 체육관에서 집으로.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일정이 마치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됐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똑같다고 해서 지루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내가 이뤄야 할 목표는 딱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수능을 잘 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족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목표에 대해서는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할아버지와 신원대 의대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한 것도 있고, 나 스스로도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회귀 후 준비하는 수능은 솔직히 어렵지 않았다.
의대 본과에 들어가서 하는 공부에 비교하면, 수능에 필요한 공부량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지옥을 경험한 터라 수능은 내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내게 정말 중요했던 것은 두 번째 목표였다.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행복한 추억을 쌓는 것.
의예과 2년 동안은 그나마 여유롭겠지만 본과에 들어가면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다.
PK라고 해서 현장 실습도 자주 나갈 테니까.
의사 면허증을 딴 뒤 병원에 취업하면, 그때는 가족의 얼굴을 그저 사진으로만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 목소리는 휴대전화로만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턴과 흉부외과 레지던트 생활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마치 지옥과 같으니까.
특히 레지던트의 경우, 그 어원이 숙박을 의미하는 레지던스(residence)에서 기원된 것이니.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나는 사랑이에게 특히 더 애정을 쏟았다.
전생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스러운 내 동생에게.
“맙소사!”
수능이 가까워질 무렵, 사랑이는 맙소사를 연발하고 다녔다.
뒤늦게 본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유행어를 따라 하는 것이다.
입을 벌리고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툭 치는 사랑이의 모습은 귀여웠다.
하긴 사랑이가 무슨 행동을 한들 예뻐 보이지 않을까.
사랑이가 쑥쑥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랑이처럼 자랐을 때, 부모님은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하고.
자고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한편 나는 부모님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두 분이 영양제 먹는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했으며, 자주 대화를 나누며 아픈 곳이 있는지 묻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생과 달리 건강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대망의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은 언제나처럼 매서운 한파와 함께 수험생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또한, 학부모들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었으며, 전국을 긴장의 도가니로 빠트렸다.
바로 수능 날이었다.
* * *
“야, 진짜 떨린다. 수능을 망치면 일 년이 그냥 날아가는 거잖아. 난 진짜 재수하기 싫은데.”
곁에서 걷고 있는 곽도안이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곽도안이 말을 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수능 당일 나는 곽도안, 박정훈과 함께 영등포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로 이동 중이었다.
우리가 수능을 쳐야 하는 시험장이 영등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 시험 전에 먹으려고 우황청심환까지 챙겨 왔어. 근데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네.”
“나는 아까부터 이상하게 배가 아파.”
곽도안과 박정훈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물론 나라고 해서 전혀 긴장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능은 고등학생이 사회로 진입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이 관문을 제대로 통과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많은 것들이 걸려 있다.
하지만 수능이 주는 긴장감은 내겐 쥐꼬리만 한 수준에 불과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긴박한 주제.
즉 생과 사를 수도 없이 다뤘던 전직 흉부외과의였으니까.
개흉술을 하다가 파열된 대동맥에서 솟구친 피를 흠뻑 뒤집어쓴 적도 있었고.
개흉을 한 뒤 뛰지 않는 환자의 심장을 내 손으로 직접 주무른 적도 부지기수였다.
수술실에서 경험한 이런 에피소드들이 내 마음을 강철만큼 단단하게 단련시켜 주었다.
물론 그럼에도 강태섭에게 이용당했던 것은 어리석었지만 말이다.
“너희 둘 다 열심히 공부했잖아.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역시 이믿음. 혼자서만 아무렇지도 않네. 전국모의고사 전국 수석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믿음이야 평소대로만 해도 전국구겠지. 부럽다. 부러워.”
두 사람은 입을 모아 나를 부러워했다.
“너희들도 분명 성적 잘 나온다니까? 긴장만 하지 않으면 돼.”
나는 곽도안과 박정훈을 다독였는데, 그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내가 틈틈이 두 사람에게 과외 아닌 과외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곽도안의 경우 약점인 수학을, 박정훈의 경우 약점인 영어를 말이다.
둘 다 성실히 공부한 걸 알기에 나는 두 사람의 성적도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도착한 수능 시험장.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교실에 자리를 잡았다.
수능을 앞둔 교실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학생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고, 묵묵하게 자신들이 챙겨 온 문제집으로 복습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자리에 걸고 책상에 앉았다.
나 역시 준비해 온 문제집을 살폈지만,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머릿속에 담길 리도 없었다.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집중을 하지 못했다.
‘하… 긴장되네.’
교실에 들어온 후부터 나는 초조함과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이런 내 감정을 모순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교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긴장의 기억 자도 느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내 감정은 결코 모순 된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수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잠시 후 닥칠 재앙이 두려웠다.
전생에서 경험한 오늘은 내가 잊지 못하는 날 중 하나였다.
수능 시험을 시작하기 50분 전.
우리 교실에 있는 학생 중 한 명이 갑자기 쓰러지기 때문이다.
학생은 좀처럼 의식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119에 실려 가고 만다.
그 학생이 쓰러졌던 이유와 그 학생이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단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 학생은 수능을 치르지 못했다는 것.
그가 수능을 치르기 위해 노력했던 땀방울이 허무하게 1년 뒤로 밀렸다는 것 말이다.
도저히 복습에 집중할 수 없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실 뒷자리에 서서 공부 중인 학생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들 중 누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될까.
학생들을 살피는 내 눈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의 그것처럼 매서웠다.
이번 사건은 한 학생의 인생이 달린 일이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막아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수술실에서 환자 한 명을 살리는 일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과연 다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넓게 보면, 의사 노릇은 병원 밖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아마 지구상에 있는 인간은 그 누구나 환자이면서 동시에 의사일 것이다.
‘기억이… 안 나네.’
학생들을 훑는 내 미간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23년.
회귀해서 18년.
둘을 합치면 잠시 후 벌어질 일은 대략 41년 전의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쓰러진 학생의 복장은 물론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쩌면 이 사건을 명확하게 떠올리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놀부 심보인지도 몰랐다.
팔짱을 낀 채 교실을 훑던 내 레이더에 이윽고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여학생은 흔히 말하는 떡볶이 코트를 걸쳤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체구는 작았으며 피부는 우윳빛으로 새하얬다.
막 교실로 들어오는 중이었는데,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뭐랄까.
몸의 중심을 못 잡고 이리저리 휘청거린다는 느낌이랄까.
내가 찾고 있는 주인공은 그녀일 확률이 매우 높아 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슬쩍 다가갔다.
혹시라도 쓰러진다면 받쳐 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 앉아서 교재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순간 살짝 김이 빠졌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쓰러지는 타이밍이 지금이 아닌 것인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용의자 한 명을 가슴에 품고 나는 관찰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덩치가 큰 남학생이 물 묻은 손을 점퍼에 문지르며 교실로 들어왔다.
쿵. 쿵. 쿵.
우람한 체구 탓에 교실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건강 그 자체로 보였던 남학생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손은 어느새 이마 위로 올라갔으며 걸음을 딱 멈췄다.
이윽고 다리가 풀리며 뒤로 넘어지는 남학생.
설마 이 거구의 학생이 전생의 비극의 주인공일 줄이야.
나는 쏜살같이 달려가 남학생의 등 뒤에서 남학생을 떠받쳤다. 육중한 무게 탓에 나도 함께 뒤로 넘어질 뻔했다.
“으으으으으.”
마치 전기에라도 감전된 것처럼 남학생이 바들바들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남학생을 교실 바닥에 눕혔다.
“으으으으으.”
남학생은 흰자위를 드러낸 채 육중한 몸을 좌우로 연신 흔들어 댔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허연 게거품이 흘러나왔다.
남학생이 일으킨 균열로 한순간 교실의 평화가 깨지고 말았다.
모두가 초조하고 긴장된 눈빛으로 남학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교실에서 침착한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귀신에게 빙의라도 된 듯 기괴한 행태를 보이는 남학생을 바라보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되어 보니 남학생이 쓰러진 이유를 알았다.
아마도 뇌전증(간질)으로 인한 발작이겠지.
남학생이 보이는 모습은 뇌전증 발작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뇌전증 발작의 경우 겉보기에는 당장 죽을 것처럼 심각해 보이지만 그런 반면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일 또한 의외로 많았다.
119에 당장 이송할 질환이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한시름 덜었다.
“저기요. 잠시만 책상을 앞으로 당겨 주세요.”
나는 주변의 양해를 구한 뒤 차분하게 남학생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발작 도중에 주변 물체와 충돌해서 생길 수 있는 2차 손상을 예방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다음에는 내 옷을 벗어 남학생의 머리맡에 두고 남학생이 옆으로 돌아눕도록 만들었다.
흔히 회복 자세라고 불리는 것.
기도를 확보하는 동시에 혹시라도 구토물이 역류하는 것을 막아 주는 자세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학생의 점퍼를 벗긴 뒤 꽉 조인 허리 벨트를 풀어 남학생이 호흡을 편하게 하도록 해주었다.
일련의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
“…….”
시간이 지나면서 남학생의 발작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떨림과 경련 횟수가 줄어들고 입에서 흘러나오던 게거품의 양도 확연히 줄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완벽하게 마음을 놓지는 못했다.
내가 싸워야 할 상대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타다다닥.
남학생이 좀처럼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가운데, 수능 감독관과 119 대원들이 신속하게 교실로 진입했다.
놀랍게도 그들이 나와 2차전을 벌여야 하는 상대였다.
“학생, 거기 서 있지 말고 빨리 나와요.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해야 하니까!”
내가 남학생의 앞을 가로막자, 119 대원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하지만 나는 한 걸음도 물러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선언하듯 한마디 했다.
“아니요. 이 친구는 병원에 데려가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