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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살부터 의사 생활-43화 (43/257)

43화 제4장 매듭 (3)

“아주 대단~하시네. 우리 심병수 씨. 사람 괴롭히는 쪽으로는 머리가 아주 쌩쌩 돌아가시는 모양이야.”

나는 세상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머리를 조아리고 싶을 만큼 황송하게도 말이다.

심병수는 나를 하루 동안 미행하고, 또래 친구를 환자처럼 둔갑해서 유인한 다음, 일진들로 손봐 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그 넘치는 애정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면, 회귀한 다음부터 영화처럼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나였다.

미행의 피해자가 되고, 곧 액션 신도 찍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넌 이런 게 재밌냐?”

나는 심병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놀람과 당혹스러움이 지나간 자리를 분노와 적개심이 대신했다.

심병수가 나를 미워하는 만큼 나도 심병수가 미웠다.

자신이 박정훈에게 저지른 짓들을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것 같아서.

심지어 내게 보복하려는 적반하장의 태도까지 취해서.

“당연히 졸라 재밌지. 너무 기대돼서 어젯밤부터 잠을 설쳤거든.”

“…….”

“나야 어차피 퇴학당했고 이사도 갈 건데… 이 기회에 널 손봐 주고 뜨면 그만이거든.”

“국민학교 때부터 넌 변함이 없구나. 쓸데없이 부지런하게 못됐네.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건방지게 훈계하지 마. 주제 파악이 안 돼?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도 봐줄까 말까인데?”

심병수가 영화 속 악당처럼 섬뜩하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너 그거 알아?”

뜬금없이 화제를 돌리는 심병수.

“뭘.”

“너는 나를 버리고 박정훈을 택한 거야. 그리고 그 대가를 바로 이 순간에 톡톡히 치르고 있는 거지.”

심병수의 궤변에 내 미간이 좁아졌다. 박정훈을 택하고 심병수를 버렸다라…….

딱히 마음에 와 닿는 말은 아니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군. 딱 한 번 설명해 줄 테니까 귀 씻고 들어라.”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가는 심병수.

“네가 박정훈을 돕지 않았다면 내가 퇴학당하고 고소를 당할 일이 없었겠지.”

“당연한 소리를…….”

“맞아. 난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네가 박정훈을 모른 척했다면 지금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네 양심은 조금 찔렸을지라도.”

“…….”

“하지만 너는 박정훈을 돕기로 선택했어. 그 순간 너는 나와 적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지. 자, 어때? 이 상황을 자초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생각되지 않아?”

심병수의 일장연설은 명백한 궤변이었다.

이 상황의 원인 제공을 내가 했다며, 억지를 부리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논리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박정훈을 모른 척했다면?

심병수는 평소대로 학교를 다녔을 테고 일진을 동원해서 나를 손봐 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나는 약자의 편에 서기로 오래전부터 마음먹었으니까.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내 선택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심병수.”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심병수를 불렀다.

“왜? 이제 조금 후회가 되나?”

“전혀. 넌 헛소리를 길게 늘어트리는 재주가 있구나.”

“하… 새끼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야, 저 새끼 적당히 두들겨 패고 손목만 집중적으로 뭉개 놔. 수능에 시옷 자도 못 보게.”

심병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정면에서 두 명, 등 쪽에서 두 명의 일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나를 붙든 것은 체육관 관장님이 해 준 한마디였다.

-믿음아, 룰을 벗어난 놈은 결코 룰로 처벌할 수 없단다. 그럴 때는 너도 적당한 범위 안에서 룰을 벗어나야 하지.

나는 내가 정한 룰을 처음으로 벗어나야 하는 날이 오늘임을 깨달았다.

사람을 치료해야 할 의사가 사람을 폭행한다?

실로 불쾌하고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발상이었지만, 그 선을 오늘만큼은 넘지 않으면 안 됐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오늘만큼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대신 함무라비 법전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집중하면 질 수가 없지.’

제자리에서 스텝을 밟으며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엄밀히 말해서 일진은 싸움을 잘해서 일진이 아니었다.

불량한 짓을 하는 놈들이 뭉치다 보니 그 집단에서 나오는 힘을 자신의 힘이라고 착각하는 머저리들일 뿐이었다.

따라서 복싱을 2년 동안 연마한 내가 대처만 잘한다면 이놈들을 얼마든지 때려눕힐 수 있었다.

파바바밧!

나는 우선 정면으로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떡대 좋은 놈이 내 옷깃을 잡으려 하길래 몸을 틀어서 가볍게 피해 주었다.

빠아아악!

떡대의 옆구리에 적당한 힘을 담은 훅 한 방을 갈겼다.

떡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쩍 벌린 입으로 침만 주르륵 흘렸다.

그 천금같은 기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두 번째 주먹으로 떡대의 턱을 올려 치자, 떡대는 그대로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순간 일진들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놀라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라고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를 어쩐다?

나는 공부 말고도 복싱에도 꽤 일가견이 있는데 말이다.

“어라? 이 새끼 봐라?”

떡대 옆에 있던 수수깡 같은 놈이 대뜸 발차기를 날렸다.

관자놀이를 노리는 기습적인 옆차기.

나는 전광석화처럼 날쌔게 한쪽 팔을 들어 옆차기를 막아 냈다. 그리고 한 발로 위태롭게 서 있던 수수깡의 다리를 힘차게 걷어찼다.

“아야야야야!”

엉덩방아를 찧고 고통스러워하는 수수깡.

나는 다음 손속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녀석들이 심병수의 명령을 받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이 녀석들은 애초에 나를 흠씬 두들겨 팰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놈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되갚아 주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내가 알고리즘으로 선택한 팃포탯이었다.

나는 쓰러진 수수깡의 복부에 냅다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러자 수수깡이 배를 움켜쥔 재 좌우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네 명의 일진 중 두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한 상황.

남은 일진 두 명은 잔뜩 얼어 내게 다가올 엄두도 못 냈다.

“뭐 해? 하던 거 마저 끝내야지.”

내가 검지를 까닥거리며 도발하자, 두 명은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여기 모였던 다섯 명 중 도망친 저 두 명이 제일 똑똑한 듯했다.

벌써 주제 파악을 끝낸 것을 보면 말이다.

“씨… 씨발, 이럴 리가 없는데?”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는 심병수를 향해 나는 다가갔다.

사냥꾼에서 먹잇감으로 전략한 심병수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머저리 같은 놈.

날 제대로 괴롭히고 싶었으면 내가 야자를 안 하고 어디를 가는지도 미리 알아 뒀어야지.

“이믿음, 너 장래 희망이 의사가 아니라 깡패였냐? 어떻게 우리 학교에서 제일 센 애들을 한 번에…….”

“남 걱정 말고 네 걱정을 하는 게 더 좋을 텐데?”

나는 심병수와 바짝 거리를 좁힌 뒤 심병수를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심병수는 예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퇴학을 당하고 소송까지 휘말리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전부 다 자업자득이라서 딱히 불쌍해 보이지는 않았다.

수치화할 수는 없겠지만, 심병수의 고통은 새 발의 피일 것이다.

그동안 이 녀석에게 괴롭힘을 당한 박정훈의 고통에 비한다면.

“네가 나한테 했던 헛소리를 고스란히 돌려줄게. 상황을 이렇게까지 최악으로 꼬아 놓은 건 너다.”

“나… 나라고?”

심병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네가 박정훈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과연 이 꼴이 났을까?

“…….”

“그냥 돈으로 일진을 부리면서 왕 노릇만 했으면 퇴학도 안 당했을 테고, 소송도 안 당했을 테니까.”

나는 주먹을 쓰기에 앞서 말로 심병수를 두들겨 팼다.

논리라는 것이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이 바보 같은 놈은 몰랐다.

“어때? 내 말이 틀린 것 같아?”

“으…….”

뒤바뀌어 버린 상황이 분한지 심병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리에 박정훈이 없다는 사실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런 좋은 구경을 나 혼자만 하게 되다니…….

“어쨌든 나… 난 때리지 마. 넌 의사가 될 거라며. 의사가 사람을 때려도 되는 거야?”

심병수가 적반하장으로 대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게 담뱃불로 친구 손목을 지진 미친놈이 할 소리냐? 네 몸은 금은보화고, 정훈이 몸은 뭐 쓰레기라도 돼?”

분노를 참지 못한 나는 심병수의 양 옆구리를 훅으로 잇달아 두들겼다.

“아으으윽.”

고통을 이기지 못한 심병수가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저열하고 비겁한 놈, 이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나는 손가락으로 심병수의 이마를 밀어 넘어트렸다.

원하는 목표를 이뤄 냈음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내 마음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대체 왜 그런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심병수를 따끔하게 손을 봐준 다음부터 이상하게 감정이 계속 가라앉아 있었다.

이 감정은 분명 모순된 감정이다.

심병수를 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을 나는 꽤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고.

오늘에서야 그 한을 일부 풀어냈다.

그러니 지금 나는 속이 후련하고 통쾌해야 옳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마땅한 대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나… 난 때리지 마. 넌 의사가 될 거라며. 의사가 사람을 때려도 되는 거야?

심병수의 말이 옳았던 걸까.

환자를 치료하고 보듬어야 할 내가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천벌을 받은 걸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분석이었지만, 지금의 감정을 온전히 설명하기엔 뭔가 모자란 분석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묘한 감정 변화의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깨달음을 얻었다.

약자의 편을 들면, 강자의 적이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전생에서도.

오늘 사건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회귀한 지식으로 아픈 사람들을 도운 뒤 나는 늘 내적인 충족감을 맛보았고.

물질적으로나 인맥을 통해서나 적당한 보상을 얻어 왔다.

그런데 그 황금 공식이 오늘 처음으로 깨졌다.

약자를 돕는다는 것이 뒤집어 생각하면 강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뜻이 될 줄이야.

지금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남은 평생을 강자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야지. 힘들다고 위험하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어.’

약자를 돕는 건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원한 길이었다.

그에 따르는 책임과 부담을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의대에 들어가고 병원에서 수련하면 이 고통은 배가 되겠지만.

회귀한 지식들을 잘 활용한다면 어떻게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라고 의술의 신이 내게 회귀라는 선물을 준 것일 테니까.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는 국민학교 때 김요한이 그려 준 그랑죠 책받침이 놓여 있었다.

그때의 풋풋한 감성과 감정을 음미하다 보니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 나쁜 감정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동심과 순수함만으로 보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이제 내 앞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권력과 명예와 부, 권모술수를 부리는 인간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활개를 치는 사회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인 나는 심병수를 통해 그 차가운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나아갈 수밖에.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랑죠 책받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동심과 순수함에 작별을 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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